326화. 중임
은은한 빛이 갑자기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사라졌다.
갑자기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자, 정미는 부적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숨을 헐떡였다. 정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무슨 일이지?’
정미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 안에 있는 얇고 질긴 실이 이리저리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아주 고통스러웠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떤 느낌이 든다던데, 설마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정미는 누군가 망치로 가슴을 쾅 내리친 것처럼 비틀거렸다.
“오라버니―”
정미가 눈물을 닦고 내실 밖으로 달려나가자, 환안이 깜짝 놀랐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정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문을 벌컥 열었다. 마침 어떤 도동이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려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정미는 순간 멈칫했다.
“사숙조님, 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아, 응.”
정미는 작게 대답하고는, 추태를 보였다는 걸 깨닫고 뒤돌아 매무새를 정리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환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급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청령진인의 거처에 도착하자, 환안은 도동에게 가로막혔다.
“관주님께선 북명 사조님과 현미 사숙조님만 부르셨습니다. 다른 분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환안은 안으로 사라지는 정미의 뒷모습에 발만 동동 구르며 밖에서 기다렸다.
정미는 정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되어, 청령진인을 찾아가 서방에 가는 걸 허락받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내로 들어가자, 북명진인을 보고 멈칫하더니 인사를 올렸다.
“현미가 사부님과 사형을 뵙습니다.”
“현미 왔구나. 와서 앉거라.”
청령진인의 목소리는 높은 산에 내린 눈이 녹아 만들어진 깨끗한 물처럼, 머릿속을 맑아지게 했다.
정미는 다가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청령진인이 입을 열었다.
“북명, 현미. 너희들에게 가르칠 부적이 있어 불렀다. 너희 둘 중 누가 이 부적에 대해 오성(悟性)이 있는지도 볼 겸.”
북명진인의 새하얀 수염이 살짝 떨렸다.
‘오성? 이 어린 사매와 비교당하는 게 가장 싫다고! 이겨도 찝찝하고, 지면 창피하단 말이다. 게다가 난 단 한 번도 오성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잘 보거라.”
청령진인이 벌떡 일어나 긴 손가락을 뻗어 허공에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미는 일단 걱정은 뒤로 미뤄두고 청령진인의 동작을 자세히 살펴봤다.
부적은 복잡하고도 이상했다. 청령진인은 잠시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손가락만 움직이다가, 점점 양팔을 흔들며 손발을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적이라기보단 현묘하고 신기한 춤처럼 보였다.
반주향 정도 지났을 때, 청령진인은 동작을 갑자기 멈추더니 은발을 휘날리며 미소를 지었다. 무수히 많은 빛이 그의 주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북명, 해보거라.”
“예?”
북명진인의 온몸이 굳었다.
‘바로 해보라니? 방금은 그저 보여주신 게 아니었나?’
“북명―”
청령진인이 은근히 재촉했다.
북명진인은 방의 중앙으로 나가 잠시 고민하더니,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청령진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북명, 지금 부적을 그린 것이냐, 아니면 굿을 한 것이냐?”
북명진인이 동작을 멈추더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투덜댔다.
“사부님, 잘 보십시오!”
그러고는 얼굴을 매만지고 수염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 얼굴에 주름도 가득하고, 수염도 한가득하니, 사부님의 동작을 완전히 따라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 눈엔 굿처럼 보인단 말입니다.”
‘사부님은 은발에 동안이시라 신선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고, 사매는 한창 꽃다운 나이에 용모도 출중하니, 나와 같을 리가 없지 않나! 게다가…… 난 이미 그 동작을 다 까먹었다고.’
청령진인이 눈을 피했다.
“현미, 네가 해보거라.”
정미는 ‘예’하고 대답한 뒤 중앙으로 나가 양손을 들고 기이한 곡선을 그렸다.
청령진인의 눈빛이 반짝였고, 북명진인의 얼굴은 붉어졌다.
‘음, 나는 첫 동작부터 틀렸던 거였군.’
정미는 한 번 부법의 세계에 빠져들면 완전히 몰입하곤 했다. 머릿속엔 청령진인의 동작 하나하나가 이어서 떠올랐다. 그렇게 손과 발을 따라서 움직이느라, 청령진인의 감탄하는 눈빛과 북명진인의 억울한 표정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춤과도 같은 부적을 다 그리자, 작은 빛이 정령처럼 정미의 손끝에서 춤추다 온몸을 둘러쌌다.
정미는 멍하니 눈을 떴다가 청령진인의 기뻐하는 눈빛을 발견했다.
“사부님―”
정미는 어리둥절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복잡한 부적이라면 최소 한 달은 배워야 겨우 그릴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사부님의 시연을 한 번 본 것만으로 기억해냈지? 사부님의 동작이 하나씩 이어서 떠오르는 느낌은 정말 신기했어.’
“잘했다. 너희 둘 중 이 부적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있을 줄이야.”
청령진인이 두 사람을 천천히 훑어봤다.
북명진인의 수염이 떨렸다.
‘이 사매는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역시 그때 덤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 부적의 이름은 ‘구역(驅疫)’이다. 팔도기부(八道奇符)중 하나이지. 아까 말했듯이, 이 부적을 배우려면 ‘오성’이 있어야 한다. 이 부적과 연이 있는 사람은 자증(*自證: 자신이 직접 체득한 깨달음)을 깨달았다는 뜻이고, 이 부적과 연이 없는 사람은 백번 천번을 봐도 요령을 깨닫지 못하지. 그러니 북명은 낙담하지 말거라. 현미도 네가 한 번 만에 성공한 데에 의문을 품지 말고.”
청령진인이 담담히 설명하며 두 제자를 바라봤다.
“현미, 이 부적을 깨우쳤으니, 스승을 대표해 장고로 가거라. 북명, 네 사매는 아직 어리니 네가 동행하여 보조해주고.”
“장고요? 저는―”
정미는 깜짝 놀라 서쪽으로 가 정철을 찾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어진 청령진인의 말에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장고에 지진이 일어났으니 얼마 뒤면 역병이 돌 게다. 밤에 별을 살펴보니, 장고의 별이 사성(死星)이 될 것 같더구나.”
“사성이요?”
북명진인이 깜짝 놀랐다.
“그럼 장고 전체가 죽음의 도시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부님, 장고엔 수만 명의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청령진인이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장고의 별은 아주 기이하단다. 사성의 조짐이 보였지만, 그중 한 가닥 희망이 보였지. 그러니 너희 둘을 보내는 것도 하늘을 거스르는 일은 아니란다.”
“걱정 마십시오, 사부님. 제자가 전심전력으로 사매를 보조하여 장고의 생명을 구하겠습니다.”
북명진인이 엄숙하게 답하자, 청령진인이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내겐 세상 모든 사람보다 오라버니가 더 중요한걸? 오라버니를 잃으면 모든 걸 잃은 것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수만 명의 목숨을 두고 내게 선택하라니, 어떡하란 말이야?’
열여섯 살의 정미는 마침내 제 지위에 얼마나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지 깨달았다.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면 연모하는 사람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쯤이야 아무도 개의치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국사의 제자라면, 상황이 달랐다.
정미가 절을 올리며 대답했다.
“예. 장고로 가서…… 전심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 * *
정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엎드려 통곡했다.
‘사부님이 그랬어. 오라버니는 이번 전쟁에서 위기를 겪고 전화위복을 할 거라고. 그럼, 지금이 바로 그 위기일까? 그런데 세상 만물은 순식간에 변하곤 하잖아. 사부님이 신도 아니고, 잘못 알고 계신 거면 어떡하지?’
정미는 잠을 이루지 못해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밖에서 쉬고 있던 환안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옷을 걸친 후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아가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정미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환안이 침상 곁으로 가 앉았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면 소인에게 말해주세요. 말하면 한결 나아질지도 모르잖아요.”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데, 나를 너무 마음 아프게 해.”
“그럼 하지 마세요.”
정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라버니가 날 용서치 않을걸. 나도 염치없는 사람이 될 거고.”
‘국사의 제자로서 누린 게 얼마나 많은데, 져야 할 책임은 나 몰라라 하고 다시 평범한 소녀가 될 순 없잖아?’
환안은 도무지 정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끔뻑였다.
정미가 환안을 쳐다봤다.
“환안, 사부님이 내게 내일 장고에 가라 하셨어.”
환안은 ‘헉’ 하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아가씨,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고요.”
“준비할 것도 없어. 갈아입을 옷 두어 벌 정도면 돼. 북명 사형도 함께 갈 거야. 환안, 내일 너는 산을 내려가서 국공부로 돌아가.”
환안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 소인도 함께 가지 않고요? 그럼 누가 아가씨를 모셔요?”
“시종은 필요 없어. 환안, 기억해. 국공부로 돌아간 뒤 둘째 오라버니의 소식이 들리면, 어머니께 호위 둘을 부탁드려서 장고로 나를 찾으러 와.”
“둘째 공자님이요?”
환안은 뭔가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정미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가서 쉬어. 나도 자야겠어.”
환안이 물러난 뒤, 정미는 침상 위에 옆으로 누워 창밖의 별을 멍하니 쳐다봤다.
‘관성술(觀星術)은 정말 신기해. 저 수많은 별 중 어떤 게 오라버니일까. 나는 어떤 별일까?’
* * *
며칠 뒤.
창경제는 한밤중에 전해진 급보로 잠에서 깨어났다.
급보는 두 통이었고, 창경제는 그 중 ‘가급(加急)’이라는 표시가 있는 전보를 급히 열어본 후 기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서강의 맹장 야율홍의 진짜 신분은 서강의 왕자 야율명탁이고, 백선하 전투 중 백선하 옆의 숲에서 사망했다. 밀정의 보고에 의하면, 서강의 국왕은 이 일로 앓아누웠고, 왕자들은 왕위 쟁탈을 시작했다…….]
창경제는 감격하여 읽어내려가다가 마지막 부분을 읽고 멈칫했다.
[정철, 정 참의는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며 기지가 넘치는 인물로, 삼백 군사를 이끌고 적군 천 명에 맞서 싸우다가, 병사가 몇 남지 않았을 때 꾀를 써 야율명탁과 함께 죽었다. 백선하 전투에서 서강은 왕자를 잃고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아군은 여세를 몰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로를 정 참의 한 사람에게 돌리니…….]
창경제의 손에 힘이 풀렸다. 전보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주홍희가 급히 받았다.
창경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넋을 놓고 말았다.
급보를 전한 중서사인(中書舍人)은 어리둥절했다.
‘서강이 왕자를 잃고 내분에 빠졌고, 서쪽의 전쟁은 곧 있으면 대량군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데, 황상께선 어찌 넋이 나간 모습이신 걸까? 너무 기뻐서 그런 건가?’
그는 주홍희를 슬쩍 쳐다봤으나, 주홍희 또한 무거운 표정이었다.
창경제의 심복으로서, 주홍희 역시 서쪽에 있는 정 참의가 황상의 적황자일 확률이 크다는 걸 알았다.
만약 정철이 정말 적황자였다면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서강이 왕자를 잃었다지만, 대량에도 전혀 이득이 없어!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심지어 황상께선 적황자를 직접 전쟁터로 보내셨으니!’
주홍희가 전보를 슬쩍 훑어보더니, 순간 눈을 반짝였다.
“폐하, 보십시오!”
주홍희가 전보를 건네며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길 읽어보십시오!”
[……아군이 정 참의와 야율명탁 두 사람을 발견했을 때, 정 참의는 아직 숨이 붙어있었지만, 폐를 다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니…….]
“폐하, 정 참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창경제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부분을 흘끗 쳐다보다가 주홍희를 걷어차고만 싶었다.
‘폐를 다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중서사인은 어리둥절한 채 입을 열었다.
“폐하, 장고의 역병에 관한 급보도 있습니다…….”
창경제는 정신을 차리고 다른 급보를 펼쳐보았고,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장고에 역병이 돌아 사망자가 천 명에 달한다.]
“그렇게 많은 구호금과 약재를 쏟아부어도 결국 역병이 터졌구나!”
창경제의 머리가 아파왔다.
“주홍희, 현청관으로 가 지키고 있다가 내일 아침 국사를 조정으로 모셔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