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동귀어진(同歸於盡)
창경제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진과 일식은 하늘의 뜻이 분명했지만, 제천기에 불이 붙은 건 결코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없었다.
‘분명 누군가 태자를 끌어내릴 셈으로 꾸민 짓이다!’
태자의 출신에 의문점이 있든 없든, 일국의 황태자가 다른 자의 꾀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불쾌했다.
하지만 창경제는 절대 평왕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황제의 자리와 조금도 관련 없는 절름발이 왕야가 태자와 맞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창경제는 근위군에게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라 명했다.
평왕은 태자가 폐위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유왕부가 평왕부의 근처에 자리 잡는다는 소식을 듣자, 기쁘면서도 불쾌해했다.
그리고 며칠 뒤, 창경제가 그를 불러 욕을 퍼부었다.
“용진, 제천일 날 깃발에 불을 붙인 게 네 짓이었다니, 대담하구나!”
“부황, 저는―”
평왕이 눈물로 호소하기도 전에, 창경제는 눈을 부라리며 위협했다.
“감히 억울하다 말해 보거라. 너를 발로 차버릴 테니!”
창경제가 걸상을 걷어차던 힘을 떠올린 평왕은 급히 말을 삼켰다.
“부황, 저도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황가의 혈통이 아닐 수도 있는 자가 어찌……, 어찌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대량을 위해 행동했을 뿐입니다―”
창경제는 화가 나 눈을 부라리며 평왕을 힘껏 내리쳤다.
“다른 자들은 그 소문을 믿어도, 왕야인 네가 그런 헛소문을 믿다니! 어리석은 놈!”
평왕은 수치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속으론 황제를 비웃고 있었다.
‘부황께서 그 소문을 조금이라도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태자를 폐위하셨겠는가? 20년 넘게 황태자였던 용침을 말이야!’
평왕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창경제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작 의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태자가 친아들이 아니라 수군대니, 마음에 걸리지 않을 리 없었다.
때문에 평왕에 대한 노여움도 생각보다 중하지 않았다. 한바탕 그를 꾸짖은 뒤, 왕부로 돌아가 반성하라 명하고 일 년간 감봉 처분을 내리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왕부로 돌아온 평왕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소문을 믿었다는 핑계로 부황을 속였지만, 내 다리가 나았다는 게 알려지면 부황께서 이 소문마저 내가 퍼트린 거라 의심하실지도 모른다. 부황이 내린 처벌은 그리 중하지 않아. 내가 절름발이라는 걸 가엾게 여겨주신 덕분이겠지. 하지만 다리가 다 나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부황의 신임을 잃으면 황위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거다.
됐다. 아무래도 절름발이 행세는 조금 더 이어나가다가, 이후 적당한 기회를 노려야겠어. 어쨌든 부황께서도 단시간 안엔 태자를 책봉하지 않을 테니.’
평왕은 황제의 말에 따라 얌전히 왕부에 틀어박혀 반성했고, 유왕은 소리소문없이 옆에 있는 유왕부로 입주했다.
* * *
소란스러웠던 수도는 꽤 평안해졌지만, 서쪽의 전투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서로 싸우고 죽이는 소리가 하늘을 울렸고 깃발이 여기저기 휘날렸다. 정철은 손에 은창을 들고 적의 심장을 찔렀다.
은창을 뽑자 비가 뿜어져 나와 정철의 백포를 더럽혔다.
“정 장군, 지원군이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젊은 병사가 달려와 크게 외쳤다.
정철의 출중한 무예 실력을 발견한 위무행은 그를 임시로 장군에 봉했고, 매일 전장에서 치열하게 전투하는 장병들에게 있어, 그를 부를 땐 ‘참의’보다 ‘장군’이라 하는 게 더 편했다.
정철은 입술을 꾹 다물고, 이 틈을 타 젊은 병사를 기습하려는 적을 긴 창으로 무찌르고 차갑게 외쳤다.
“다시 알아보거라!”
여기 백선하(白扇河)를 잃으면 대량군은 식량도 식수도 끊기기 때문에 끝까지 사수해야만 했다.
원래의 계획은 정철이 병사를 거느려 백선하를 지키며 서강의 맹장 야율홍(耶律洪)을 유인해 전투하고, 위 장군은 적의 후방으로 병사를 우회하여 기습한 뒤, 다시 백선하로 돌아와 협공하여 서강군을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지원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적을 유인하기 위하여 백선하에 남은 병력도 그리 많지 않았다.
“정 장군, 후퇴해야겠습니다!”
부장이 크게 외쳤다.
“제가 장군을 호위하겠습니다!”
정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나와 위 장군은 죽어도 백선하에서 죽기로 군령장(軍令狀)을 썼네. 절대 후퇴할 수 없다!”
그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정철의 어깨에 꽂혔다.
“정 장군!”
정철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를 악물고 화살을 뽑은 뒤, 한 손으로는 어깨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창을 사용해 적군을 찔렀다.
“화살에 맞았다. 저쪽 수령이 화살에 맞았어!”
서강군의 기세가 드세졌다.
정철과 함께 적을 무찌르던 장병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 이때 또 누군가가 외쳤다.
“정 장군, 큰일 났습니다. 야율홍이 병사들과 후방의 산비탈을 돌파해 이쪽으로 오고 있다 합니다!”
“병사의 수는?”
정철은 상처를 싸맬 겨를도 없이 손수건으로 어깨를 막으며 말을 타고 뒤로 달려갔다.
“정 장군, 가시면 안 됩니다! 부상까지 입으셨는데―”
병사의 외침에도 정철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때 서강군 차림을 한 무리가 뒤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보통 서강군과 다르게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원이었지만, 앞장선 장군의 지휘 아래 신들린 듯 대량군을 하나씩 베어나가고 있었다.
정철은 화가 치밀어 올라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쥐고 앞으로 힘껏 내던져 붉은 옷 병사의 가슴에 꽂았다.
병사의 비명과 함께, 야율홍이 돌진하며 외쳤다.
“정철,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정철이 창을 들고 피식 웃었다.
“그런가? 해볼 테면 해보시지!”
양측 장군이 순식간에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고, 좀처럼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정철은 노위국공이 전수해준 창법으로 신들린 듯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오랜 전투와 부상을 입은 상태로 힘이 필적하는 야율홍을 맞닥뜨리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이 빠져갔다.
다친 어깨에는 이미 아무런 감각이 없었고, 백포는 땀과 피로 젖어버린 상태였다.
정철은 전쟁터를 한 번 훑어봤다.
대량군의 군기는 이미 쓰러져있었고, 아직도 분투하고 있는 병사들은 이미 몇 남지 않은 채였다.
정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지원군이 아직도 오지 않았으니, 오늘 여기서 죽게 되겠군. 죽기 싫은 건 아니다. 나는 대량의 장병으로서, 결코 남들보다 특별하지 않아.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전쟁터에 올 때부터 이 정도 각오쯤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아있었다.
‘미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미와 함께 늙어가지 못하는 것. 그건 어쩔 수 없지. 이게 하늘의 뜻이라면……. 하지만 하늘의 뜻이 어떻든 간에, 오늘 야율홍은 반드시 제거한다!’
“도망치려고? 꿈 깨시지!”
정철이 창을 휘두른 후 갑자기 뒤돌자, 야율홍이 그를 쫓아갔다.
두 사람은 전쟁터에서 점점 멀어졌다.
백선하 옆에는 작은 숲이 있었는데, 이 황량한 사막에서 보기 드문 초록빛을 띠었다.
정철이 숲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휙 뛰어올라 나무줄기를 끌어안았다.
야율홍이 그를 뒤따라 잡으며 비웃었다.
“나무 위로 오르면 나를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웃긴 소리!”
정철은 야율홍이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나무줄기 뒤로 뛰어내렸다.
야율홍은 제 말을 무시하고 달아나는 정철을 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정철을 거의 따라잡았을 때, 순간 발밑이 텅 비는 느낌을 받은 그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두 사람은 그대로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야율홍은 순식간에 함정 바닥에 떨어졌고, 극심한 고통을 함께 느꼈다.
고개를 숙이자, 칼처럼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가슴을 뚫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바닥엔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수없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정철을 바라봤다.
함정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정철은 바로 옆에 있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나뭇가지가 그의 몸을 뚫고 그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
야율홍에겐 말을 이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몸에선 빠르게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철이 옅게 웃었다.
“이건 우리 장병들에게 짐승을 잡아주기 위해 만든 함정입니다……. 야율 장군……, 마음에 드십니까?”
정철 또한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야율홍은 소름이 돋았다.
야율홍이 애써 고통을 참으며 웃었다.
“정철……, 자넨 도대체 무엇인가? 그저…… 문신이라고 들었는데…….”
자신과 필적하는 적수를 만나자, 정철은 야율홍에게 조금의 탄복하는 마음이 들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지요……. 저는 대량의 신미년(辛未年) 문장원입니다.”
“문장원?”
야율홍은 대량에서의 문장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놀란 표정으로 피범벅이 되어도 준수한 얼굴의 정철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자네 같은 자에게 졌으니 억울하진 않군. 헌데…… 어찌 자네 자신마저도…….”
야율홍은 이미 숨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정철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입가에 피가 흐르든 말든 웃었다.
“야율 장군과 함께 묻히는 것도 영광일 것 같군요. 야율 장군……. 아, 왕자 전하라 불러야 할까요? 쿨럭쿨럭…….”
야율홍이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았는가?”
정철이 힘겹게 손을 들어 야율홍의 어깨를 가리켰다.
“전에 야율 장군의 어깨를 찔렀을 때, 그곳에 있는 문양을 보았지요.”
야율홍이 고개를 숙여 제 어깨를 쳐다보자 정철이 웃으며 설명했다.
“어떤 잡록을 본 적 있는데, 날개 끝이 황금색인 새 문양은 서강국의 왕족을 상징한다고 기록되어있더군요.”
야율홍은 문득 떠올랐다.
그 결투에서 야율홍은 그저 어깨 부분의 옷만 조금 찢겼을 뿐이었고, 어깨에 새겨진 문양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정철은 야율홍의 신분을 알아챈 것이다.
“하하하. 자네 같은 자의 손에 죽다니, 나 야율명탁(耶律明拓)은 전혀 아쉽지 않군!”
야율명탁이 피를 뿜어내더니 말을 이었다.
“정철, 내 진짜 이름을 잘 기억해두게.”
야율명탁이 눈을 굴렸다.
“정철, 자네는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가? 난 내 아내가 서강에서 날 기다리고 있거든. 출정하기 전 내게 회임 소식을 알렸는데, 이번엔 아들일 것 같다고 나를 닮아 용맹할 것 같다고 했는데…….”
야율명탁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고요해졌다.
툭 떨어진 그의 손을 보며 정철은 작게 말을 이었다.
“저도 당연히 있지요. 대량의 수도에 아주 아주 훌륭한 아가씨가 저와의 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구나.’
정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다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있었고, 대량군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승리를 거둔 서강군은 그제야 그들의 수령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왕자 전하는? 왕자 전하께서는 어디 가셨지?”
승리의 기쁨보다는, 왕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서강군은 안절부절못했다.
대량군을 섬멸했으니, 사람을 보내 보고한 뒤 더 많은 군사를 이끌고 백선하를 완전히 점령해야 마땅했지만, 서강의 병사들은 왕자를 찾느라 그 일은 잊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전방에서 갑자기 연진(*煙塵: 연기와 먼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 일어났다.
대량군이 닥쳐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