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제천
“황상, 최근 기이한 현상이 잦습니다. 일식은 예로부터 군신이 덕망을 잃었다는 상징이었고요. 어찌하실 셈입니까?”
창경제는 몹시 낙담한 듯한 모습이었다.
“짐이 죄기서(*罪己書: 주로 임금이 천재지변이나 정사의 실행(失行)을 자기의 허물로 돌리면서 관료와 백성들에게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내용의 글)를 내어, 흠천감에게 길일을 정해 태자와 함께 하늘에 제천 의식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태자요?”
태후의 눈빛이 번뜩이자, 창경제가 물었다.
“모후, 그 소문을 들으신 겁니까?”
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그 소문 때문에 태자와 함께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는 겁니다. 일국의 황태자가 고작 소문 때문에 폐위당할 순 없지요. 선례가 생기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겁니다.”
태후는 한참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황상의 생각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유언비어가 아니라면요?”
“모후, 뭔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요. 애가는 황상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황상께서 잘 판별하셔야 합니다.”
창경제가 침묵하자,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애가는 그저, 화 씨가 적황자를 모해하는 일까지 저질렀으니 황가의 혈통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할 뿐입니다.”
“화 씨의 회임은 태의들이 회진하여 회임 기간의 진료는 진료부에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후비가 출산할 때는 기록만을 맡은 궁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요. 짐이 당시 궁녀를 찾아내어 직접 물어보았는데, 그 궁녀는 산파가 태자를 방에서 안고 나오는 걸 직접 보았다 했습니다. 그러니 화 씨가 목은백의 아이를 태자로 바꿔치기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창경제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황가의 혈통을 어지럽힐 수 있다면, 모든 황제들이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했겠지.’
태후가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황상,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일은 없는 법이지요. 얼마 전 황상께서 애가에게 후궁을 일을 맡기셨지요. 최근 애가가 후궁을 정리하며 이상한 부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십여 년 전 화 씨를 모시던 하인들 중, 살아남은 자는 등안 뿐이라는 것을요.
심지어 당시 화 씨의 진료를 보고 태자를 받은 산파들도 예외 없이, 태자가 태어난 후 몇 년 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특히 화 씨의 회임 기간 동안 맥을 짚어준 태의는 태자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실족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는군요.”
태후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당연히 그저 우연일 수도 있고, 이것만으로 뭔가를 밝혀낼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또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황상, 화가의 큰아가씨를 기억하십니까?”
“음?”
창경제는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그게 누군데, 지금은 화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단 말입니다!’
태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화 씨의 조카딸입니다. 당시 태자비를 맞이하기 전, 태자와 그 아가씨는 서로를 연모하게 되었지요. 그 아가씨를 입궁시키려 태자와 귀비가 어찌나 다투던지, 애가의 귀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 아가씨는 이미 홑몸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창경제가 입을 뻐끔거리며 답했다.
“이 일은, 짐도 몰랐습니다.”
“황상께선 매일 온갖 정사를 처리하셔야 하니, 황궁의 사사로운 일까진 알지 못하지요. 황상, 화가 아가씨가 결국 어찌 되었는지 아십니까?”
태후는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당시 애가는 몹시 의아했지요. 태자비를 제외하면 동궁엔 정3품의 양제라는 지위도 있는데 말입니다. 화가 아가씨를 양제로 입궁시키면, 그리 부끄러운 신분도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화 씨는 어찌하여 친조카를 목매어 죽게 하고, 입궁을 허락지 않았을까요?”
“모후,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창경제의 표정이 굳자,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별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만약 요즘 들려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당시 화 씨의 행동이 이해가 될 뿐이지요.”
창경제가 침묵했다.
태후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일국의 황태자는 중하고도 중한 자리입니다. 황상께서 자세히 조사해보실수록 좋겠지요.”
창경제는 멍하니 있다가 한참 뒤에야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모후. 짐은 이만 황후를 보러 가겠습니다.”
태후는 떠나는 창경제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황상이 태자를 다시 책봉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적황자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확률이 크지만, 이미 세상에 없다고 해도 그 아이를 해친 여인의 아들에게 황위를 줄 순 없지!’
* * *
일식 후, 백성들의 공포심은 한계치에 다다랐고, 태자가 황가의 혈통이 아니라는 소문은 더욱 퍼져나갔다.
평왕부 안, 평왕이 크게 웃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때마침 일식까지 찾아오다니!”
‘대흉망국의 징조라고? 하하, 두려울 게 뭐 있는가. 가짜 태자가 황위에 오르는 게 망국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역시 하늘은 다 알고 계시다!’
“뭐라, 부황께서 태자와 함께 제천 의식을 치른다 하셨다고?”
그러다 보고를 들은 평왕은 몹시 당황했다.
‘지진에 이어서 일식까지 일어났는데, 태자와 함께 제사를 올리다니? 부황은 소문에 흔들리지 않으신 건가?’
평왕은 애써 피식 웃었다.
‘그럼 제천 의식 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여전히 끄떡 않는지 봐야겠구나! 내가 황위를 갖지 못하더라도 차라리 다른 형제들이 갖게 하지, 그 짝퉁에게 줄 순 없지!’
* * *
흠천감은 이레 뒤로 길일을 정했다.
급히 정해진 일정에 태상시는 며칠 동안 아수라장이 되었고, 관원들은 관아에서 아예 먹고 자며 지냈다. 그렇게 의식 전날 겨우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다 준비되었느냐?”
태상시경이 두 보좌관에게 재차 물었다.
“예.”
답을 듣고서도 태상시경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 둘에게 분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살펴보거라. 이번 제천 의식은 조금의 차질도 생겨선 아니 된다.”
“예.”
의식일이 되고, 며칠 동안 재계해온 창경제는 일찍이 목욕한 뒤 옷을 입고 면류관을 썼다. 이어 그는 태자와 문무백관들을 이끌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러 천단으로 향했다.
수도의 백성들은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와 천단 밖을 둘러쌌고, 근위군의 통제 아래 얌전히 기다렸다.
제천 의식은 장중하고 복잡했다.
창경제는 높은 천단 위에 서 있었고, 북명진인의 진행에 따라 의식이 시작되었다.
제천단은 수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던지라, 무수한 백성들은 고개를 젖히고 위를 쳐다보며 황제의 동작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의식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부모를 따라 구경하러 온 어린아이들도 부모에 의해 입이 막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창경제는 제천 의식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이어서 태자가 제천대에 올라서자 백성들이 수군거렸다.
“황제 폐하의 의식이 끝난 뒤, 또 누군가 올라가다니?”
시력이 좋은 자가 발꿈치를 들고 내다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자 전하인 것 같은데.”
“태자?”
사방의 백성들은 이를 듣자마자 더욱 수군거렸고 작은 소란이 일기까지 했다.
“황태자는 황제 폐하의 친아들이 아니라던데, 그래서 하늘께서 번번이 경고를 내리는 거고.”
“그래, 그래! 저 태자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다니.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 아냐?”
“정숙하시오!”
근위군은 백성들에게 고함치며 질서를 정리했다.
근위군에겐 패도(*佩刀: 몸에 차고 다닐 수 있는 칼)가 있었지만, 제천일에 백성들을 향해 칼을 겨눌 순 없었다. 때문에 군중들을 관리하기가 아주 힘들었고, 뜨거운 태양까지 내리쬐니 병사들의 얼굴엔 땀이 가득 맺혀있었다.
“봐봐, 저게 뭐지?”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오고, 사람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근위군은 통제하는 것도 잊은 채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높은 천단 위의 제천 깃발이 갑자기 바람을 맞으며 발화하더니, 불빛이 아홉 개의 작은 태양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사람들이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제천 기둥이 갑자기 넘어져 태자의 발치에 떨어졌고 무수한 불똥이 튀며 엄청난 소음을 만들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백성들의 격한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짜를 진짜로 속이다니요, 태자는 부덕합니다! 황제 폐하, 태자를 폐위하여주시옵소서!”
백성들의 함성은 파도처럼 높아져만 갔다.
근위군은 백성들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그들조차 제천 깃발이 자연 발화한 모습에 놀라 멍해진 상태였다.
태자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이제 끝장이야. 이제 나는 태자로서 끝장이라고!’
만민이 지켜보는 자리였기에, 창경제는 마음을 가다듬고 근위군에게 어서 백성들을 진정시키라 명한 뒤 친위의 호위를 받으며 급히 자리를 떴다.
* * *
궁으로 돌아온 뒤, 창경제는 내각의 학자들과 조정의 중신들을 빠르게 불러 모았다. 굳게 닫혀있던 어서재의 대문은 등불을 켤 시간이 되어서야 천천히 열렸다.
무거운 문소리와 함께, 어떤 자들에겐 침통하겠지만 대부분은 환호할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태자를 폐위하고, 유왕(幽王)에 봉한다.’
태자 폐위는 엄청난 일이었으니, 보통은 태자가 중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신하가 태자를 대신해 황제에게 호소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황명이 떨어졌을 때, 백관들 중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설해에 이어 전쟁이 일어났고, 지진과 일식까지 더불어 제천 의식 때는 깃발이 자연 발화했으며, 황태자는 무너진 기둥에 깔려 죽을 뻔했다. 이게 태자의 운이 다한 게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런 태자를 위해 황상께 호소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백성들의 함성을 듣지 못했는가? 태자가 계속 황태자 자리를 지킨다면 나라 전체가 흔들릴 것이다!’
잠시 분위기가 무거워지긴 했지만, 태자의 폐위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왔던 일처럼 여겨졌다.
태자, 즉 유왕의 귀에도 이 소식이 들려왔으나 그는 오히려 침착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본궁, 아니……, 본왕은 언제 동궁을 떠나야 하는가?”
명을 전하러 온 태감이 말했다.
“폐하께서 내무부와 공부에 최대한 빨리 유왕부를 건설하라 명하셨습니다. 왕부의 건축이 끝난 후, 곧바로 입주하시면 됩니다.”
유왕부를 건설한다곤 하지만, 사실은 서쪽 거리에 있는 평왕부와 가까이 있는 저택을 조금 손질할 뿐이었다.
“알겠다.”
태감이 떠난 후 유왕은 성지(聖旨)를 품에 안고 내실로 들어간 뒤, 그제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그친 뒤엔 다시 껄껄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럴 줄 알았다면…….”
‘모비, 이럴 바에 왜 저를 궁으로 데리고 오신 겁니까. 20여 년 동안 지켜온 황태자 자리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군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모비를 떠나게 두지 않았을 텐데…….’
유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