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붉은 반점
“잠깐, 정 수찬은 장원랑 아닙니까? 어찌 장원랑을 전쟁터로 보내셨습니까?”
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창경제가 뿌듯한 듯 말했다.
“모후, 그 아이는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재입니다. 짐의 호위도 그 아이를 이기지 못했지요!”
태후가 창경제를 흘겨보며 생각했다.
‘뭐가 그리 뿌듯한지. 그 아이가 정말 적황자라면, 풍씨 가문의 혈통이 뛰어난 덕분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황상의 다른 아들들이 그리 형편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황상, 애가는 아무래도 그 아이를 다시 불러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대량에 인재가 그 아이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창경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후의 말씀이 맞습니다. 내일 조정에 나가자마자 명하겠습니다.”
태후는 창경제가 떠나자마자 황후를 보러 갔다.
황후는 창가의 낮은 평상 위에 조용히 앉아 실로 망태기를 뜨고 있었다. 태후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한숨 쉬더니 다가가 앉아 황후를 품에 안았다.
“진진아, 하늘이 우리 적황자를 지켜주신 거라면 좋겠구나. 그럼 네게도 드디어 해 뜰 날이 오는 거란다.”
황후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고모, 제가 만든 망태기 좀 보세요. 태자 오라버니가 좋아하실까요?”
“그럼, 분명 좋아할 게다.”
태후는 갑자기 화가 났다.
‘하늘에서 문무를 겸비한 아들이 뚝 떨어지다니, 갑자기 황상에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군!’
* * *
침궁으로 돌아온 창경제는 머릿속으로 정철과 함께 서는 장면을 떠올리며 점점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그래, 어쩐지 그때 정철을 탐화랑에 두고 싶지 않더라니. 아버지의 직감이었구나! 이런 선견지명은 모든 아버지가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 아니. 아직 확정 지어선 아니 된다. 태후의 말씀이 맞아. 황가의 혈맥이니, 신중해야지. 만약 진짜 적황자가 아니라면, 일이 더욱 성가셔질 테니. 겨우 이 정도 단서로 정철이 당시의 황자라는 걸 어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 황자의 몸에 무슨 모반(母斑)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창경제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으며 외쳤다.
“주홍희!”
“예, 전하.”
“어서 황후를 모시는 궁녀 청아를 불러오거라. 그 아이에게 물을 게 있다!”
“그건―”
주홍희가 바깥 하늘을 슬쩍 살펴봤다.
‘이 시간에 청아를 부르시다니, 태후마마께서 나를 매질하시면 어쩌려고?’
창경제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기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서 가지 않고 뭣하느냐!”
“아, 예.”
“잠깐!”
창경제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래도 짐이 직접 가야겠군.”
주홍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태후마마께서 분노하시더라도 황상이 계실 테니.’
주홍희는 급히 유리 궁등을 들고 창경제에게 길을 안내했다.
6월의 여름밤은 여전히 더웠고, 매년 이때쯤이면 창경제는 피서를 떠나곤 했으나 올해는 전쟁이 일어 수도를 떠나지 않았다. 때문에 더운 날씨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창경제는 그 더위조차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걸음이 주홍희보다도 빨랐다.
자녕궁은 이미 문이 잠긴 상태였기에, 내시가 태후에게 보고를 올렸다.
“태후마마, 황상께서 오셨습니다.”
태후는 깜짝 놀라 급히 차려입은 후 밖으로 나가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창경제에게 물었다.
“황상,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창경제가 태후 곁의 궁녀들을 흘끗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 모두 물러나거라!”
궁녀들은 태후를 흘끗 쳐다봤고,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급히 물러났다.
순식간에 방 안엔 창경제와 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모후, 청아를 만나고 싶습니다!”
“청아를요?”
태후의 눈빛이 굳었다.
“황상, 뭔가 떠오르신 겁니까?”
창경제가 다급히 말했다.
“모후, 청아를 만나봐야 합니다. 당시 적황자의 몸에 무슨 모반이라도 남아 있는지 물어봐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증거를 찾더라도 적황자임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애가가 이미 물어봤습니다.”
태후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시 황자에게 목욕을 시켜줄 때, 발가락에 붉은 반점이 7개 있었다고 하더군요.”
창경제의 표정이 굳었다.
“붉은 반점 7개요?”
그는 뭔가 떠오른 듯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모후, 남안왕의 발가락에도 붉은 반점이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
‘왜 아들의 발에 남안왕과 같은 반점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 아이의 아비이거늘!’
태후는 창경제의 표정을 보자 그가 혹시라도 허튼 생각을 할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상, 광소제(光昭帝)도 발가락에 붉은 반점이 있었습니다.”
창경제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옥첩(玉牒)에도 그리 기록되어 있지요.”
광소제는 초대 회인백이 살려낸 황태자로, 재덕겸비한 인재에 이후 대량의 태평 성세를 이루었기에, 광소제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많았다.
야사(野史)에는 광소제가 당시 회인백의 여식과 이미 사적으로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회인백의 여식은 박명하여 당시 황태자였던 광소제가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져 있었다.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가덕제가 광소제의 부탁을 들어 후대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명을 남긴 것이었다.
‘회인백부의 후대 중 첫 번째로 성품과 용모가 단정한 적녀를 태자비로 임명한다.’
창경제는 갑자기 걱정이 일었다.
“모후, 옥첩에 의하면, 우리 용씨 가문에서 발가락에 붉은 반점이 있는 황자들은 대부분 요절했다고 합니다. 성인까지 살아있다고 해도 남안왕처럼 허약하다고 했지요.”
옥첩은 황가의 족보와도 같은 것이라, 평소 종정시(宗正寺)에 보관되어 있으며, 황제 외에는 태후 같은 지위의 인물도 마음대로 읽어볼 수 없었다.
태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철의 건강은 어떤가요?”
창경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짐이 그 아이를 전쟁터로 보냈지 않습니까.”
‘엉엉엉, 안 돼. 이제 그 훌륭한 아들이 다른 집 자제라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어!’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하지요. 애가가 내일 노위국공의 여식을 궁으로 부르겠습니다. 그 아이의 발에 붉은 반점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어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모후.”
창경제는 근심이 가득한 채 자녕궁을 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한 씨는 태후가 보낸 소식을 듣고 가마를 타고 궁으로 들어갔다.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한 씨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 곧바로 큰절을 올렸다.
“어서 일어나거라.”
태후가 직접 다가가 한 씨를 일으켜 세웠다.
“명주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젊을 때 모습과 그대로일 줄이야.”
한 씨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내 딸 덕분이지.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해주는 부수를 교대로 먹었으니, 젊어지지 않을 리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순 없어. 수도의 부인들이 내 딸을 잡아먹으려 할지도 모르니.’
태후는 한 씨의 아리따운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한명주는 여전히 단순하구나. 별것 아닌 칭찬 한마디에도 이리 좋아하다니. 하지만 이런 성정이니 그 힘든 세월을 견뎌내면서도 낙관적일 수 있었던 거겠지.’
적막하고 무거운 심궁에서 지내서인지, 태후는 그런 한 씨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명주야, 나를 따라오거라.”
한 씨는 태후를 따라 어떤 방으로 들어갔고, 황후를 보자마자 멍해졌다.
“진진?”
한 씨는 빠르게 다가가 황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다신 너를 못 볼 줄 알았어, 엉엉…….”
황후는 눈을 끔뻑이다가 한 씨를 알아보았는지 배시시 웃었다.
“명주야, 왜 울어? 네가 연모하는 사람에게 시집가게 되어 기뻐했으면서, 당장이라도 혼례를 치르고 싶어 했잖아.”
황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단짝과 했던 비밀이야기가 태후 앞에서 들춰지자, 한 씨는 얼굴이 빨개진 채 급히 태후를 흘끗 쳐다봤다가,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말했다.
“진진, 너―”
한 씨가 태후를 쳐다보자,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황후의 병은 아직 다 낫지 않았다. 황상께서 은혜를 베풀어 나와 함께 자녕궁에 지낼 수 있게 해주셨을 뿐이란다.”
한 씨도 한숨을 쉬었다.
“분명 멀쩡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나의 혼인은 내가 억지로 얻어낸 것이니,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것도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지. 하지만 황후는 어째서일까? 소꿉친구로 허물없이 지내왔으면서, 왜 나와 같은 상황이 된 거지? 아니지, 나와 같은 게 아니라, 황후가 나보다 더 비참하구나.’
한 씨는 절로 정아가 떠올라 황가의 무정함에 대해 탄식했다. 동시에 정미의 혼사는 제삼자가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 이런 무서운 곳과 관련될 일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황후를 본 뒤, 한 씨는 태후를 따라 응접실로 나갔다.
태후는 여전히 슬퍼 보였다.
“명주야, 기억하느냐. 당시 너와 진진이 친자매처럼 지내기에, 애가가 나중에 너희에게 아들과 딸이 생기면 부부로 맺어주자고 농을 쳤거늘.”
“기억하지요.”
한 씨가 어색하게 웃었다.
‘큼큼, 세상사는 알 수 없는 법이니, 진진의 딸이 우리 집으로 시집온다면 당연히 기쁜 일이겠지만, 만약 진진의 아들이 내 딸과 혼인한다면, 역시 안 되지. 내 딸을 다시 이 불구덩이로 보낼 순 없어!’
태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명주야, 애가는 정말 네가 부럽구나. 너는 아들도 딸도 있지만, 황후는―”
한 씨가 급히 말렸다.
“태후마마, 그리 슬퍼하지 마세요. 황후는 선한 인물이니, 분명 복이 있을 겁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사실 저도 그리 부러워할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두 딸 중 하나는 떠났고, 양사자는 집안에서 독립했으니까요.”
“아, 이제야 생각나는구나. 듣자 하니 네 양사자가 정가의 혈통이 아니라던데?”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강가에서 주운 아이입니다. 철이가 효심이 깊어, 제 출신을 안 뒤로 계속 친부모를 찾고 있습니다.”
태후가 혀를 차며 탄식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친족을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러니 말입니다. 부모를 찾기 전까진 혼인도 하지 않을 거라 하더군요. 저는 이것만 떠올리면 가슴이 정말 답답합니다.”
‘정말 효성스러운 아이구나!’
태후가 속으로 마음에 들어 하며 말했다.
“그건 아니 되지. 만일 끝까지 부모를 찾지 못하면, 평생의 중요한 일을 그르치게 되는 일 아니겠느냐? 그래, 그 아이에게 모반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으냐? 그걸 단서로 삼아 애가가 황상께 도움을 구해보마.”
“모반이요? 생각지도 못했네요. 철이가 돌아오면 물어보겠습니다.”
태후는 순간 멈칫하더니, 한참 뒤에야 한 씨에게 물었다.
“어미가 되어선 아들의 몸에 모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게냐?”
한 씨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철이가 양자로 왔을 땐 이미 여덟아홉 살 정도였으니, 당연히 모르지요.”
태후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 아프게 돌려 말했거늘. 한명주 이 녀석, 도움이 되지 않는군.’
한 씨를 보낸 후, 태후가 곧바로 교 유모에게 명했다.
“가서 황상을 모셔오거라.”
잠시 후, 교 유모가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태후마마, 주 공공의 말씀으로는 오늘 황상의 기분이 좋지 않아 조정에서 나오신 후 계속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일단 주 공공께 전하지 말라 일러두고 돌아왔습니다.”
태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젯밤 분명 오늘 정철을 전쟁터에서 다시 불러오기로 했으면서 조정에서 나온 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니? 설마,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태후는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애가가 직접 찾아가 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