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20화 (319/375)

320화. 문득 떠오른 생각

화 귀비의 죽음은 빠르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평왕은 이를 알고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숙비를 만나러 궁을 찾아갔다.

“연회에서 일어난 일로 자책하여 우울증으로 사망했다? 태후를 독살하려 한 사람은 분명 화 귀비일 겁니다. 때문에 부황께서 비밀리에 화 귀비를 처리한 걸 테고요!”

숙비가 고개를 저었다.

“화 귀비와 연관이 있을지는 몰라도, 화 귀비가 한 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조금 이상하구나…….”

“무엇이 이상하다는 겁니까?”

숙비가 웃었다.

“네 부황께선 그리 매정하신 분이 아니지 않으냐. 태후마마께서도 결국 회복하셨고. 화 귀비의 짓이라 여겼다고 해도, 기껏해야 화 귀비를 냉궁으로 보내는 정도에서 그칠 테지, 죽이진 않으셨을 게다.”

“모비, 그 말씀은―”

“추측하건대, 이번 일로 네 부황께서 화 귀비가 저질렀던 더 추악한 짓을 알아내신 듯하구나.”

“잘 되었군요!”

“진아?”

숙비가 눈을 흘기자, 평왕이 급히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제 말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화 귀비가 이 지경으로 떨어진 것이 인과응보라는 뜻이지요.”

‘태후를 독살하려 한 것보다 더 심각한 악행이 있단 말인가? 화 귀비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부황이 태자를 미워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구나!’

최근 연이어 망신을 당한 태자를 떠올리자, 평왕은 지금 상황이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께서도 그 가짜 태자놈이 남의 것을 차지하는 걸 원치 않으신 게지.’

평왕이 감정을 숨기질 못하자, 숙비가 말렸다.

“진아, 바깥에선 그리 기쁜 티를 내선 안 된다. 네 부황께서 화 귀비를 내치셨다고 해도, 명의상으로는 너의 서모 아니냐. 부황께서 아시면 너를 무정하다 꾸짖으실 게다.”

“알겠습니다.”

평왕은 평왕부로 돌아온 뒤 곧바로 암위를 불러 비밀 임무를 명했다.

* * *

화 귀비가 죽자마자 수도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뭐라, 태자가 목은백의 아들이고, 화 귀비가 제 아이와 바꿔치기하여 궁으로 데리고 왔다가 짐에게 들켜 은밀히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돈단 말인가?”

창경제는 이 터무니없는 소문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다.

암위들에게 수도 각지에서 적황자를 찾으라는 임무를 맡겼기에, 이 소문은 수도에 퍼지는 다른 소문들처럼 한바탕 떠들썩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곧바로 창경제의 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창경제는 안색이 몹시 어두워진 채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걸상을 퍽 걷어차 버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황태자가 다른 집 아이라는 소문이 돌다니, 황제로서 너무나도 비참하구나!’

“조사하라. 그 소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절대 가벼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주홍희는 태자를 짓밟을 기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고, 곧바로 용감하게 권유했다.

“황상, 백성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소인은 우선 적황자를 찾는 일이 우선이라 사료되옵니다.”

‘적황자가 살아있든 죽었든, 이런 소문이 돈다면 태자도 편히 지낼 수 없겠군.’

소문은 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처럼 빠르게 와서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소문이 사실이라 믿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화젯거리로 여기고 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제삼자들의 이야기일 뿐, 소문과 관련된 당사자들은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창경제도 마찬가지였다. 이 갑작스런 소문에 콧방귀를 뀌며 넘기더라도, 속마음에는 응어리가 남아버렸고, 심지어 종종 화 귀비를 너무 빨리 죽였다고 후회하기까지 했다.

“화 귀비를 모셨던 사람들을 잘 주시하거라.”

창경제가 주홍희에게 명하자 주홍희는 속으로 조용히 기뻐했다.

‘황상께서 그 소문을 신경 쓰시나 보군. 황제의 의심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지.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 상황이 어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 조정에 나간 창경제는 시시때때로 목은백을 살펴봤다. 그는 아무리 봐도 목은백과 태자가 닮은 것 같자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목은백은 안 그래도 켕기는 판에, 조정에 나가자마자 창경제의 날카로운 눈빛과 문무백관들의 이상한 시선을 받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얼마 뒤부터는 꾀병을 부려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창경제가 서재에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목은백이 조정에 나오지 않다니, 도둑이 제 발 저린 건가? 아니지, 목은백은 태자의 친외숙부이니, 둘이 닮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나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단 말이다!’

창경제는 생에 가장 괴로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믿어선 안 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도저히 떨쳐내지 못했다.

창경제는 남서재로 가 창밖에서 황자들의 수업을 엿들었다.

서재 안에서 책을 낭독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창경제가 안을 들여다보자, 백발의 시독이 서책을 들고 고개를 흔들며 시를 읊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래에 앉아 그를 따라 낭독했다. 그리고 정중앙에 앉은 육황자는 무기력하게 책상 위에 엎드려 뭔갈 하고 있었다.

창경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봤다가, 순간 화가 치밀었다.

‘저 망나니 녀석, 지금 귀뚜라미를 싸움 붙이고 있잖아!’

창경제는 기가 차 어두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시독은 누가 들어오는 소리에 크게 꾸짖으려다가 황상임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책을 제 발등에 떨어트려 버렸다.

“아야―”

시독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작게 내었다가 급히 창경제에게 예를 갖췄다.

육황자의 반독(*伴讀: 옛날, 귀족이나 부호 자제의 독서 친구)들은 모두 일고여덟 살 정도였고, 선생이 망신을 당하자 처음엔 시시덕대다가 뒤늦게 창경제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육황자는 급히 귀뚜라미를 책상 아래의 작은 대나무 통에 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창경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창경제는 안 그래도 최근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는데, 소문에 휩싸인 태자와 철없는 어린 황자를 보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성큼성큼 다가가 육황자의 귀를 꼬집어 들었다.

“귀뚜라미를 내놓거라!”

“부황―”

육황자가 안쓰럽게 외쳤다.

창경제는 조금도 가엾게 여기지 않고 육황자의 귀를 한 바퀴 비틀었다.

육황자가 빌었다.

“놓아주십시오, 부황. 놓아주세요! 바로 내놓겠습니다!”

창경제는 대나무 통을 건네받았다. 뚜껑을 열어보자 귀뚜라미 두 마리가 한창 싸우고 있었는데, 둘 중 하나는 창경제를 향해 당당하게 더듬이를 흔들어댔다.

창경제는 화가 나 대나무 통을 들고 시독에게 다가갔다.

“학생 관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겐가?”

시독이 벌벌 떨며 대답했다.

“소신이 무능한 탓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창경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됐다, 선생은 역시 한림원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네. 앞으로 오지 않아도 되네.”

시독이 크게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황상. 소신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육황자의 선생이라니,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황상의 미움을 받더라도 조용히 한림원에서 일하는 게 낫겠어!’

토끼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는 시독을 보며 창경제는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아 육황자를 매섭게 노려봤다.

“짐을 따라오거라!”

창경제는 육황자를 데리고 어서재로 가 욕을 퍼부었다.

“이 녀석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잘하더니, 짐이 며칠 내다보지 않았다고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게냐?”

육황자는 압수당한 대나무 통을 몰래 흘끗 쳐다보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황, 제 잘못이 아닙니다. 새로 온 선생이 너무 재미없는 걸 어떡합니까. 하루 종일 고리타분한 말만 하고, 선생이 고개를 흔드는 모습만 봐도 졸리단 말입니다. 잠이라도 깨어 있으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냐?”

창경제는 기가 막혔다.

육황자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삐죽였다.

“예전에 가르쳐주셨던 선생이 더 잘 가르친단 말입니다. 부황께서 그 선생을 다시 모셔오면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예전의 선생?”

창경제는 문득 떠올렸다.

“정 수찬 말이냐?”

“맞습니다!”

육황자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부황, 정 수찬은 전쟁터로 간 겁니까? 언제 돌아오는 겁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학생이 선생에게 맞춰야지, 선생이 학생에게 맞추는 게 어디 있단 말이냐! 돌아가서 벽보고 반성하고 있거라. 짐이 선생을 다시 골라올 테니, 또 얌전히 굴지 않으면 절대 가벼이 넘어가지 않겠다!”

창경제는 사람을 불러 육황자를 보낸 뒤,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정철은 분명 태자와 또래인데, 어찌 문무를 겸비하고 모든 일에 능할 수 있는 것인가? ……잠깐!’

창경제의 가슴이 쿵 내려앉더니,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그 녀석…… 친부모가 분명치 않다고 했는데.’

창경제가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말도 안 돼. 이런 우연이 있을 리가.’

창경제는 곰곰이 돌이켜봤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큼큼, 사실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한데. 내 적황자라면 그렇게 훌륭한 인재인 것도 말이 되지. 그래, 나는 황제다. 출류발췌한 아들 하나 없을 리 있는가?’

“여봐라!”

창경제가 암위에게 명했다.

“정 수찬의 상황을 속히 짐에게 보고하라.”

반나절 뒤, 창경제의 책상에 자료가 하나 올라왔다.

창경제는 빠르게 자료를 훑어본 뒤,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정철은 승평 5년 4월에 태어나, 회인백부 방계혈족인 정구백 부부가 강가의 작은 나무통에서 주운 아이라고 쓰여있었다.

‘승평 5년 4월에, 작은 나무통. 게다가 그리 준수한 외모라니. 겹치는 단서가 너무 많군. 설마 정말 내 아들인 건가?’

창경제는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장 자녕궁으로 향했다.

태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황상, 정 수찬이 20여 년 전 강에 버려진 적황자라 여기는 겁니까?”

창경제는 천천히 진정을 되찾았다.

“사실 짐도 감히 적황자의 생존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늘이 도와 아직 살아있는 거라면, 정철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창경제가 그 이유를 하나씩 태후에게 들려주었다.

“모후, 보세요. 정철은 승평 5년 4월에 태어났고, 친부모가 불분명하며, 회인백부의 방계혈족이 강가의 작은 나무통에서 주운 아이입니다. 우연이라 해도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태후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공교롭군요. 그 아이의 용모는 어떠합니까? 애가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아이입니다.”

창경제가 웃었다.

“아주 준수합니다. 옥과도 같습니다!”

태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조용히 애가에게 보내주십시오. 황가의 혈통이 확실해야 하니, 이 일은 천천히 신중하게 봐야겠습니다.”

창경제가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짐이 그 아이를……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전쟁터에 보냈다니, 전쟁터에 보냈다니!’

태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창경제를 노려봤다.

‘황상은 제 아들과 원수라도 질 셈인가? 아, 아니지. 아직 아들이라 확정된 것도 아닌데. 허나 가장 유력한 후보를 전쟁터에 보내다니.’

“황상, 전쟁터가 얼마나 위험한데요.”

태후가 탄식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창경제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여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내가 왜 정철을 전쟁터로 보냈을까!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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