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19화 (318/375)

319화. 인심

방 안엔 태자와 화 귀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태자가 화 귀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모비, 부황께서 모비의 병이 중하다 하셨는데요?”

화 귀비는 가슴이 저려와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병이 중하기는. 침아, 네 부황께서 나를 죽이려 하신다!”

“뭐라고요?”

태자는 깜짝 놀랐다가 자신의 괴상한 병을 떠올리곤 급히 마음을 진정시킨 뒤 화 귀비를 붙잡고 물었다.

“모비,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태후마마께서 연회에서 중독된 것 때문에 부황께서 모비를 죽이려 하시다니요?”

화 귀비는 눈물을 닦고 태자를 침상 머리맡으로 데리고 가더니 목소리를 낮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태자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가 관저궁에서 남자아이를 낳았고, 그 남자아이가 저보다 고작 며칠 더 일찍 태어났다는 말씀이십니까?”

화 귀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등안의 배신이 떠오르자, 이를 갈며 말했다.

“등안 그 개 같은 자식을 믿어선 안 됐는데. 그때 본궁이 관저궁을 잘 감시하라고 일러두었는데도, 황후의 회임을 알아채지 못해 결국 아이가 태어났지 않느냐! 본궁이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침이 네가 황태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태자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등안이 그 아이를 확실히 처리한 건 확신하십니까?”

화 귀비는 잠시 멈칫했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 아이를 살려둘 만큼 대담한 자는 아니다. 오늘 황상께서 등안을 불러와 삼자대면을 시키셨다. 등안이 당시 본궁의 명에 따라 아이를 질식시킨 후 몰래 묻었다고 했지.”

“그럼 다행이군요.”

태자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왠지 모르게 멍해졌다.

“침아, 황상께서 나를 죽이려 하신다. 빌고 빌어서 겨우 널 만날 수 있었어.”

“모비―”

태자는 가슴이 아려왔다.

화 귀비가 태자의 손을 꽉 붙잡았다.

“침아, 네 부황은 완전히 나를 버리셨다. 지금 모비가 믿을 건 너뿐이야.”

“모비, 제가 무얼 하면 됩니까?”

태자가 멍하니 묻자, 화 귀비는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태자를 바라봤다.

“가서 네 부황께 간청드리거라. 넌 모비가 없으면 안 된다고. 모비를 냉궁으로 쫓아내도 되니, 모비를 죽이지만 말아 달라고.”

‘냉궁이든 어디든 살아있기만 하면, 태자가 황위에 오르는 날까지 버티면 된다. 그때 웃는 자가 바로 최후의 승자나 마찬가지지. 그때가 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인 태후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황제의 몸속엔 화씨 가문의 피가 흐르게 되지. 황상은 그 사실을 평생 모를 테지만!’

창경제가 일말의 정도 없이 저를 내친 것과, 제 조카가 창경제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화 귀비는 몹시 통쾌했다.

태자는 화 귀비의 부탁에도 그저 침묵했다.

‘부황께는 자식이 많지 않다. 내가 아는 부황은 황자와 공주들에게 늘 자애롭고 너그러우시지. 허나 모비께서 황후의 아들을 살해했으니, 부황께서 얼마나 노여워하실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부황을 찾아간다면―’

창경제의 모진 말과 눈빛이 떠오르자, 태자는 순간 흠칫했다.

‘안 돼. 부황께서 분명 나를 더 탐탁지 않아 하실 거다.’

태자가 화 귀비를 슬쩍 쳐다봤다.

‘내가 매달리면 부황이 모비의 목숨만은 살려주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비께서 살아있으면, 부황의 불만은 나날이 깊어지겠지. 그리고 부황께서 오황자와 육황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계실지도 모르는 일이고. 역사를 살펴보면, 늙은 황제는 늘 어리석은 선택을 하곤 하지. 그때가 되어도 내 황태자 자리가 굳건할 수 있을까?’

“침아?”

태자가 한참 대답하지 않자, 화 귀비가 참지 못하고 불렀다.

태자가 천천히 손을 빼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화 귀비는 깜짝 놀랐다.

“침아, 이게 무슨 짓이냐?”

화 귀비가 손을 뻗어 일으켜 세우려 해도 태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비, 늘 저를 가장 아껴주셨지요. 그럼 저를 가엾이 여겨주십시오. 이 아들은 얼마 전 망신을 당했고, 작년엔 정가 셋째의 일도 있었지요. 만약 지금 상황에서 부황께 간청드리면, 분명 더욱 노여워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 황태자 자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침아?”

화 귀비가 태자를 나지막이 불렀다.

태자를 내려 보고 있음에도 심연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침아.”

화 귀비가 태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벌써 20년 동안이나 황태자 자리에 있었으면서, 어찌 그리 생각하는 게냐?”

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비, 황자는 저뿐만이 아닙니다. 십몇 년이 지나면 다섯째와 여섯째도 스물, 서른이 되겠지요. 그때도 제 자리가 굳건할 리 있겠습니까? 부황께서 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갈수록, 두 황자는 저와 다툴 필요도 없게 될지 모르지요! 모비, 제가 지금 부황을 찾아가 모비를 냉궁으로 보낸다 해도, 앞으로 제가 뭔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부황께선 모비께서 저지른 죄를 떠올리시겠지요…….”

화 귀비가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내가 저지른 죄?”

화 귀비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저지른 죄라니. 그 모든 건 내 눈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아들을 위한 것이었거늘. 허나 그 아들은 지금 내가 죽길 바라고 있구나!’

화 귀비는 기가 찼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태자의 뺨을 내려쳤다.

태자는 얼굴을 쥐고 일어나 화 귀비를 보며 웃었다.

“모비, 이러지 마세요.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단, 그 죽음이 가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지요. 부황께선 마음이 여린 분이십니다. 지금은 노여워하시더라도, 나중엔 저를 볼 때마다 모비를 떠올리고 저를 가여워하실지도 모르지요.”

화 귀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낯선 사람을 보듯 태자에게 삿대질하며 웃었다.

“그래, 참으로 총명하구나. 내가 20여 년간 온 마음을 쏟아부어 키운 아들이, 내가 죽길 바라다니!”

태자가 화 귀비의 손을 밀어냈다.

“모비,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이는 모두를 위한 겁니다. 외조모님과 목은백부를 생각해보십시오.”

태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화 귀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지요? 고모님.”

화 귀비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고, 한참 동안 태자를 빤히 노려보다가 완전히 무너진 모습으로 말했다.

“이제 가보거라.”

태자가 무릎을 꿇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모비.”

화 귀비는 사라져가는 태자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앞을 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후회, 원망, 슬픔, 모든 감정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래, 모든 건 목은백부를 위해서였지. 그렇다면 나는? 나는 뭐가 되는 거지?’

태자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가다가 계단에 서 있는 주홍희를 보고 멈춰 섰다.

“태자 전하, 다녀오셨습니까?”

태자는 눈가가 빨개진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게 되었다. 모비를 잘 보내주게, 주 공공.”

태자가 멀리 떠나자, 주홍희가 내시들에게 눈짓한 뒤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화 귀비가 대들보에 목을 맨 채 발버둥 치고 있었다. 금색으로 수 놓인 신발이 깨끗한 융단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주홍희와 내시들은 옆으로 잠시 물러나 조용히 기다리다가, 화 귀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그제야 다가가 조심스럽게 화 귀비를 내려주었다.

주홍희가 두 내시에게 화 귀비를 살펴보라 눈짓했다.

둘 중 하나가 화 귀비의 호흡을 살피더니, 주홍희에게 말했다.

“서거하셨습니다.”

주홍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귀비마마를 지키고 있거라. 나는 황상께 아뢰겠다.”

장춘궁은 몹시 조용했고 나무 위의 매미만 시끄럽게 울어댔다. 주홍희는 뜨거운 햇볕을 쬐며 급히 밖으로 나가다가, 이미 깨끗이 뽑혀 사라진 협죽도가 있었던 곳에서 멈춰서더니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황상의 명으로 화 귀비를 자결하게 했으니,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나를 가만둘 리 없겠구나!’

나이도 꽤 있었고 호화로운 나날들도 충분히 보냈지만,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주홍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쳐다봤다.

‘큼큼, 조용히 태자를 내쫓을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자녕궁의 그분께서도 기뻐하실 테고 말이야.’

* * *

태자는 장춘궁을 떠나 잠시 고민하더니 곧바로 창경제가 있는 건청궁(乾淸宮)으로 향했다.

“황상, 태자 전하께서 전 밖의 계단에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내시가 창경제에게 말했다.

창경제는 화 귀비를 죽게 한 것으로 한은 풀었다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어쨌든 태자의 생모고, 저를 이십여 년간 따랐던 여인이었다. 개를 키워도 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한때 총애했던 여인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태자가 왔다는 소식에 창경제는 머리가 아파졌지만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들라 하라.”

잠시 후, 태자가 창경제 앞에 나타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창경제가 물었다.

“네 모비를 만나고 왔느냐?”

태자는 온몸이 흠칫 떨리더니 바닥에 엎드렸다.

“예, 다 이 아들의 죄입니다.”

창경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태자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태자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모비께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차마 부황께 모비를 용서해 달라 말씀드리진 못하지만, 차라리 이 아들에게 벌을 내리고 모비의 죄를 경감시켜주길 간청 드립니다.”

창경제는 태자의 행동에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놓여 한숨 쉬며 말했다.

“태자, 네 모비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안다면, 짐이 절대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네 마음은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너는 네 모비의 아들임과 동시에 일국의 황태자다. 모비를 대신해 벌을 받겠다는 말은 다신 해선 안 된다. 외부에는 화 귀비가 중병으로 사망했다고 알리고, 짐도 귀비의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를 테니, 너도 잘 처신하거라.”

태자는 속으로 몹시 기뻐했다.

‘역시, 부황께선 여전히 내 체면을 살펴주시는군.’

“하지만 모비께서 이렇게 떠나시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부황, 저도 함께 벌해주십시오. 모비의 목숨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태자가 효심 가득한 모습을 지어내고 있을 때, 주홍희가 급히 들어왔다.

“황상, 귀비마마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뭐라!”

태자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충격받은 듯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분명 부황을 찾아뵈겠다고,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 모비께 말씀드렸거늘, 이렇게 빨리 떠나셨다고?”

태자가 주홍희를 휙 쳐다봤다.

“주 공공, 설마 모비께선 원치 않으셨는데 너희가 압박해서―”

“조용히 하거라!”

창경제가 꾸짖었다. 화 귀비가 떠나자, 그는 왠지 태자에게 마음이 약해져 주홍희를 쳐다봤다.

주홍희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들이 방에 들어갔을 땐 이미 귀비마마께서 목을 맨 상태였습니다.”

“모비께서 어찌 나를 기다리지 않으셨지?”

태자가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했다.

“모비, 이 아들의 죄가 큽니다. 분명 저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시려고―”

그때, 푸식 하는 소리가 울리자 태자는 갑자기 울음을 멈추었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태자는 멍한 표정이었다.

‘방금…… 또 방귀를 뀐 건가? 하늘이시어, 어찌 이런 괴상한 병을 내리십니까!’

태자는 당황하여 더 이상 연기를 지속할 수 없었다.

창경제도 기가 막혀 태자의 추태를 꾸짖고 싶었지만, 태자도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꾹 참았다. 그러나 방금까지 가슴 깊이 느껴졌던 가엾음은 그 불쾌한 소리로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여봐라, 태자를 동궁으로 모셔다드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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