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진실
“아이?”
창경제는 잠시 멍해졌다가 한숨을 쉬었다.
“진진, 공주는 누가 빼앗아간 게 아니라 그저 하늘로 떠난―”
황후가 창경제의 손을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공주가 아닙니다. 황자란 말입니다. 제가 천신만고 끝에 낳은 우리 황자란 말입니다!”
“황자? 황자라 했소?”
창경제는 다시 멍해졌다.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사실로 여길 리는 없었다.
황후가 갑자기 몸을 숙이고 창경제의 다리를 꽉 껴안았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아이를 죽이지 마세요. 아직 너무나도 작고 여린 아이란 말입니다…….”
청아가 낌새를 눈치채고 급히 들어와 황후를 부축하며 창경제에게 말했다.
“황상, 마마께서 또 발작하기 시작하실 겁니다.”
창경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청아, 황후를 잘 모신 뒤 짐을 찾아오라.”
* * *
잠시 뒤, 청아가 조용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황상.”
창경제는 찻잔을 들었다가 안에 차가 비어있자 다시 내려놓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청아, 황후가 계속 누군가 아이를 빼앗아갔다고 하던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청아는 바닥에 이마를 붙인 채 덜덜 떨었다.
창경제가 정색하며 엄하게 소리쳤다.
“말하거라!”
청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상, 마마의 말씀은 사실이옵니다. 마마께선 황자 전하를 잃은 뒤 극도로 상심하여 지금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냐!”
창경제가 벌떡 일어나자, 청아가 목숨을 걸고 입을 열었다.
“마마께선 관저궁에 갇히고 얼마 뒤, 회임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이후 황자 전하를 낳으셨고요.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당시 첩여였던 화 귀비가 등안을 보내 황자 전하를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창경제는 큰 충격에 빠졌다.
청아가 단호하게 맹세했다.
“소인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한 치의 거짓이라도 섞였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창경제는 숨을 깊게 들이켜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왜 당시 짐에게 보고하지 않았느냐?”
청아가 눈을 내리깔고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황상께선 마마께 화가 나 계셨고, 마마는 관저궁에서 소식을 전해 줄 믿을만한 사람조차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황상께 알려지기도 전에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되었으니까요.”
청아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황상께서 마마를 믿지 않으실까 봐 걱정하셨습니다―”
“멍청하군!”
창경제가 이를 갈았다.
‘당시 황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창경제는 20여 년 전의 자신이 정확히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회임한 황후를 냉궁에 지내게 하진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됐다, 청아. 이제 짐이 알게 되었으니 너는 황후를 잘 보살피거라. 무슨 일이 생기면 속히 짐에게 보고하고. 더는 숨겨선 아니 된다!”
“예.”
창경제는 자녕궁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청아는 곧바로 태후에게 보고를 올렸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황상은 분명 등안을 추궁하러 가셨을 게다.”
청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태후마마, 어찌 직접 황상께 아뢰지 않으시고―”
태후가 웃었다.
“사람은 남의 말보다 제가 직접 찾은 걸 더 믿기 마련이지 않더냐. 청아, 똑똑히 기억하거라. 애가는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게다. 모든 일은 모두 황상이 결심을 내려 직접 알아낸 것이다.”
“예, 마마.”
* * *
암실 안, 창경제가 무릎을 꿇은 채 죄를 시인한 등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개 같은 놈, 당시 정말 황자를 나무통에 넣어 강에 버렸단 말이냐?”
등안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동생들만은 살려두겠다는 태후의 말이 떠올라 창경제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비록 마음의 준비를 해놓았지만, 이미 호의호식하는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진 그는 창경제 앞에서 저도 모르게 벌벌 떨었다.
“나무통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느냐?”
창경제가 등안을 걷어차며 물었다.
“예?”
등안은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주홍희가 작게 기침했다.
등안은 정신이 들어 멍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이 정도였을 겁니다.”
창경제가 보자마자 크게 노했다.
“좀 큰 걸 고르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는 것이냐? 그렇게 작은 나무통이면 순식간에 뒤집혔을 텐데!”
등안은 멍해졌다.
‘중점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창경제는 후궁이 아닌 황후에게서 난 황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작은 나무통에 담겨 강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등안을 몇 번이고 걷어차며 말했다.
“주홍희, 이 개자식을 잘 지켜보고 있게. 일이 다 마무리되기 전엔 절대 죽지 못하도록!”
“예!”
등안이 끌려나간 뒤, 창경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주홍희가 참지 못하고 권했다.
“황상, 침상에서 잠시 쉬시지요.”
창경제가 주홍희를 쳐다봤다.
“주홍희, 짐의 아들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 보나?”
주홍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황제를 모시는 건 정말 힘들군. 이렇게 종종 목숨을 걸고 대답해야 하는 질문을 하시니!’
창경제는 주홍희의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짐의 적자다. 황위를 계승할 몸이니, 혹시 하늘이 지켜주셨을지도 모르지. 주홍희, 그렇지 않나?”
주홍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적황자에 황위 계승이라……. 황상께선 지금 적자 황손이라 이러시는 걸까, 아니면 태자에 대한 불만이 한계치에 다다른 걸까?’
“주홍희, 금린위의 암위장(暗衛長)을 불러오거라.”
주홍희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금린위는 명(明), 암(暗), 내(內) 세 가지로 나뉘었다. 요 며칠 사이 내위장과 암위장은 연이어 황제의 부름을 받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황궁엔 슬슬 바람이 일고 있었다.
잠시 후, 평범한 외모의 사내가 창경제 앞에 나타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하십시오.”
“현영(玄影), 지금 바로 암위들을 모아 수도와 근처 교외에서 스무 살이 넘은, 4월에 태어난 젊은 사내를 속속히 조사하라. 출신이 평범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더 중요시 여겨 조사해야 한다.”
“예.”
창경제가 손을 휘젓자, 사내가 몸을 숙여 물러났다.
“잠깐.”
창경제가 암위장을 불러 세웠다.
“짐은 최대한 빨리 결과를 알고 싶다. 그러니 용모가 비루한 자는 조사하지 않아도 된다.”
늘 신중하고 조용하던 암위장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그제야 밖으로 나갔다.
주홍희는 입꼬리가 올라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못생긴 자들은 살길도 없구나!’
* * *
며칠 뒤, 태후의 중독에 대한 조사를 맡았던 금린위 내위장이 책자 하나를 창경제에게 올렸다.
창경제는 책자를 훑어보더니 책상에 내던지며 낮게 고함쳤다.
“화 귀비를 불러오거라!”
무거운 분위기 속, 화 귀비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황상―”
창경제는 주홍희에게 책자를 화 귀비에게 보여주라 눈짓했다.
화 귀비는 책자를 건네받은 뒤 한 장씩 넘겨보았고, 마지막 장까지 읽었을 땐 등이 땀에 흠뻑 젖고 말았다.
책자에는 근 20년간 장춘궁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궁인들에 대해 적혀있었다. 모두 협죽도의 독에 의해 죽은 것이었다.
화 귀비는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인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는 이 방법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지금, 책자에 적혀있는 사람들 모두가 화 귀비가 태후를 독살하려 했다는 증거가 되고 만 것이다.
화 귀비는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화 귀비, 아직도 할 말이 있는가?”
창경제는 한때 총애했던 화 귀비를 쳐다보았다. 현재의 마음속엔 노여움만이 남아 있었다.
‘닭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은 여린 여인이, 이렇게도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니. 심지어 그중엔 나의 적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상, 신첩이 협죽도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 궁인들을 처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태후마마의 일은 정말로 신첩의 짓이 아닙니다!”
화 귀비는 눈물을 죽죽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 창경제 앞으로 가 엎드렸다.
“황상, 신첩이 태후마마를 해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신첩은 태자의 생모이자, 황궁의 귀비입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태후마마를 해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창경제는 화 귀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지은 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태후께서 어느 날, 황후에게서 네가 적황자를 해쳤다는 걸 듣게 되실까 두려웠던 건 아니냐?”
화 귀비는 깜짝 놀라 한참 뒤에야 목소리를 되찾고 입을 열었다.
“황상,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창경제는 피곤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화 귀비,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까지 짐을 속이려는 겐가? 여봐라, 등안을 불러오라―”
잠시 뒤, 등안이 나타나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화 귀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등안은 창경제의 물음에 다시 예전 일을 이야기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화 귀비가 고함을 질렀다.
“등안, 이 배은망덕한 개 같은 놈, 본궁은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
창경제가 무표정으로 화 귀비를 쏘아봤다.
“화 귀비, 네 죄는 적황자를 모해한 것이 우선이요, 태후를 독살하려 한 것은 그 뒤다! 게다가 수많은 자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네가 어찌 후궁을 관리하고, 장래에 자녕궁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창경제가 뒤돌아서 담담하게 말했다.
“허나, 태자를 낳고 기른 점을 감안하여 짐이 마지막 체면은 남겨주도록 하지. 목을 매든 사약을 받들든, 둘 중 하나를 택하라. 외부에는 네가 연회에서 일어난 일로 자책해 우울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릴 테니.”
“황상!”
화 귀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됩니다. 신첩은 태후마마를 독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창경제는 화 귀비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외쳤다.
“주홍희, 화 귀비를 장춘궁으로 돌려보내라!”
주홍희가 화 귀비 곁으로 걸어갔다.
“마마, 가시지요.”
그러나 화 귀비가 필사적으로 발악했다.
“황상, 마지막으로 태자를 보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신첩이 20여 년간 황상을 모신 지난 정을 봐서라도―”
주홍희가 창경제를 쳐다보자, 창경제는 등을 진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홍희, 동궁으로 가 짐의 명을 전하라. 화 귀비의 병이 중하니, 태자와의 만남을 특별히 윤허한다고.”
* * *
화 귀비가 장춘궁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급히 찾아왔다.
“모비,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태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머리가 헝클어진 채 넋이 나간 화 귀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희 모두 물러나거라.”
화 귀비의 말에 장춘궁의 내시와 궁녀들 모두가 조용히 물러났지만, 주홍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 귀비가 눈을 부라렸다.
“주 공공, 태자와 본궁의 만남은 황상께서 윤허하신 일이다. 우리 모자의 잡담까지 옆에서 들을 셈인가?”
주홍희가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이야기 나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