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기회
“협죽도요?”
화 귀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고,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내가 준비한 연회에서 태후마마가 협죽도의 독에 중독되다니. 이 황궁 안에 협죽도가 있는 곳은 장춘궁뿐이거늘!’
화 귀비는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으나, 창경제의 안색을 보고 급히 무릎을 꿇었다.
“황상, 신첩이 어찌 태후마마를 해친단 말입니까? 게다가, 제가 준비한 연회에서 독을 풀다니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 없지 않습니까?”
창경제가 피식 웃었다.
“바보라고? 화 귀비, 평범한 독이었다면 그리 생각했겠지. 하지만 협죽도는 다르다. 황궁의 태의를 다 불러 모아도 알아낼 수 없었단 말이다! 귀비 외에 협죽도에 독이 있다는 걸 아는 자가 또 누가 있단 말이냐?”
화 귀비는 말문이 막혔다.
“황상, 그렇다고 해서 신첩이 저지른 일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억울하옵니다―”
창경제가 손을 내저었다.
“해명할 필요 없다. 짐이 금린위에게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라 명할 테니!”
‘금린위’라는 말에 화 귀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태후의 음식에 독을 탄 건 내가 아니지만, 그동안 수없이 많은 일을 저질러왔다. 금린위에서 뭔갈 알아내면 끝장이야!’
“황상―”
창경제는 바닥에 무릎 꿇은 화 귀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여봐라, 화 귀비를 장춘궁으로 돌려보내라. 앞으로 짐의 허락이 없으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창경제는 화 귀비가 내시들을 따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 * *
동궁엔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태자는 동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물건을 부숴댔고, 손 양제와 마 양제를 보자마자 욕을 퍼부었다. 두 양제는 결국 울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내시가 급히 들어왔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태자가 눈을 부라렸다.
“뭐가 큰일이라는 게냐. 별일 아니었다간 본궁이 네 입을 찢어버릴 것이다!”
‘이미 충분히 재수 없는 하루이거늘, 또 무슨 일이라는 거냐!’
내시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하, 태후마마께서 중독되어 생사가 불명하옵니다. 귀비마마께선―”
“모비께서?”
내시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귀비마마께 장춘궁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명하셨습니다. 누군가 귀비마마를 찾아뵐 수도 없습니다!”
“뭐라!”
태자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망신을 당하자마자 모비께도 일이 생기다니? 안 되겠다. 부황을 찾아가야겠어. 분명 누군가 우리 모자를 계략에 빠트린 것이다!’
태자는 노발대발하며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나무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발치에 작은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내가 지금…… 소변을 지린 건가?’
무릎을 꿇고 있던 내시 또한 바닥을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자 전하께서…… 귀비마마의 일로 놀라 바지를 적신 건가? 그 정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 않나?’
장래에 대량의 황제가 될 인물이 오줌싸개라고 생각하자, 내시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태자가 그를 쏘아보자, 내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태자는 놀라 벌벌 떠는 내시를 보며 망설였다.
‘이놈을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하나?’
태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다. 만약 진짜 무슨 이상한 병에 걸린 거라면, 나 대신 상황을 처리해주고 숨겨줄 사람이 필요하니, 이 녀석의 목숨은 일단 살려둬야겠군.’
한편 창경제는 암위(暗衛)가 동궁에서 돌아와 올린 보고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태자가 찾아와 화 귀비를 풀어 달라 부탁했다면, 당연히 그 녀석에게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런데, 와 보지도 않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어미에게 일어난 일이거늘 이리도 무정하다니.’
창경제는 점점 기분이 나빠져 주홍희에게 명했다.
“동궁으로 가 태자를 불러오거라.”
태자는 부황의 부름에 몹시 당황했다.
‘방귀만 뀐다면 다행이지, 부황 앞에서 소변이라도 지리면―’
태자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두려워 갑자기 아픈 척을 했다.
“주 공공, 본궁이 청량전에 있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지금은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군. 부황 앞에서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본궁의 망신은 둘째치고 부황께도 큰 실례이지 않나. 주 공공이 부황께 잘 말씀드리게.”
주홍희는 다시 허둥지둥 창경제에게로 돌아가 보고했다. 창경제는 더욱 화가 났다.
‘나를 만나기도 꺼리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정말 답답하구나. 황자들은 늘 황제에게 잘 보이려 갖은 수를 쓰건만. 그런데 내가 오히려 태자를 달래야 하는 상황이라니. 다른 황자들이 아직 어리지만 않았어도 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지 않았을 텐데!’
창경제는 화가 나 옆에 있던 걸상을 멀리 걷어차 버렸다.
주홍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못 본 체했다.
‘큼큼, 우리 황상께선 역시 좋은 분이라니까. 화가 나도 사람을 걷어차지 않으니.’
* * *
며칠 동안 조정의 분위기는 몹시 무거웠다. 연회에서 일어난 일을 어렴풋이 들은 대신들이 알아서 몸을 사리자, 서로 목에 핏줄을 세우고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사라져 보기 드물게 일 처리가 빨라졌다.
창경제는 조정에선 기분이 좀 풀렸다가, 후궁에 돌아오면 다시 기분이 좋지 않아 틈만 나면 태후를 찾아가 상황을 살폈다.
사흘 후, 태후는 다른 사람과 잡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모후, 오늘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태후가 베개에 기대앉아 웃었다.
“예, 애가도 느껴집니다. 이게 다 황상께서 마음 써준 덕분이지요.”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들이 효를 다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태후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독을 탄 자는 알아내셨습니까? 애가는 이미 늙었으니 세상을 떠나도 상관 없지만 황궁엔 황상과 황자, 공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겁 없는 작자를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창경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걱정 마십시오, 모후. 제가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예, 다행입니다.”
태후가 안심한 듯 웃다가 다정한 눈빛으로 창경제를 쳐다봤다.
“황상, 황후를 만났지요?”
창경제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예. 허나 황후는 짐을 보기만 해도 흥분하여, 황후가 잘 때만 찾아 가볼 수 있었습니다. 아, 짐이 국사께 황후의 진료를 부탁드렸는데, 황후는 마음의 병이 심해 그 응어리를 풀지 않으면 치료하기 어려울 거라 하셨습니다…….”
태후가 창경제를 빤히 쳐다봤다.
“황상, 황후의 응어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창경제가 난처한 듯 대답했다.
“그때…… 그 일 때문입니까?”
태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황상, 아직도 황후를 오해하고 있는 겁니까?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지금 와서 파헤치려 해도 어려울 겁니다. 그저 황상께서 황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지요.”
창경제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거지요, 황상?”
태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앞으로 황후를 자극하지 말아 주세요. 그 아이가 관저전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게요. 어쨌든 인생은 한순간이고, 황후는 그곳에서 벌써 20년을 넘게 지내왔으니, 앞으로 계속 그렇게 지낸다 해도 괜찮을 겁니다.”
“아닙니다―”
창경제가 태후의 말을 끊었다.
“제가 틀렸습니다. 짐은 황후가 좋아지길 바랍니다. 모후, 곧바로 황후를 찾아가 사과하겠습니다. 황후의 응어리가 풀리면 국사께서도 치료해주실 수 있겠지요.”
태후가 안심한 듯 웃었다.
“그렇게 되면 애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군요.”
창경제가 나가자, 방 안엔 태후와 교 유모 둘만 남게 되었다. 교 유모가 감탄하며 말했다.
“태후마마, 황상의 반응이 정말 마마께서 예측한 그대로군요.”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황상도 그동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직접 독을 드신 건 역시 너무 위험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큰일 났을 겁니다, 마마.”
태후가 눈꺼풀을 매만졌다.
“이 태의와 국사가 계시지 않느냐.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 또한 애가의 책임이지.”
만약 이 태의가 제때 오지 못하고, 다른 태의들도 속수무책인 상황이 되면, 협죽도의 독이라 이야기해줄 사람도 미리 준비해놓았다지만, 다행히 상황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우리 풍씨 가문이 위기에 처하고, 내 조카가 평생 정신 나간 채 살게 두고 죽을 순 없지!’
* * *
창경제는 황후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궁녀들의 인사도 생략한 채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화장 거울 앞에 앉아있었고, 청아가 그 뒤에 서서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유독 세월이 편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황후이리라.
오랫동안 관저궁에 유폐되고 정신이 온전치 못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속세의 번잡함과 고통스러움을 느끼지 못해 그녀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별로 남지 않은 채였다.
“황상―”
청아가 기척을 느끼고 급히 옆으로 물러나 예를 갖췄다.
창경제가 손을 내저었다.
“물러나거라.”
청아가 잠시 망설였다.
“음?”
창경제가 청아를 흘끗 노려봤다.
“예.”
청아는 빗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작은 방 안엔 황제와 황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창경제의 얼굴이 화장 거울에 선명히 비치자, 황후가 뒤돌아보더니 방긋 웃었다.
“태자 오라버니, 내 눈썹 좀 그려줄래?”
창경제의 머릿속에 지난 청춘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막 소성년식을 치른 창경제는 황궁의 규칙에 따라 교육받은 궁녀 네 명에게 남녀지간의 일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당시 창경제는 어린 소년이었기에, 처음 맛본 남녀의 정에 한참 동안 빠져있었고 자연스레 진진에게 소홀해졌다.
진진은 화가 나 보름 동안이나 창경제를 상대하지 않았고, 창경제는 몹시 당황했다. 결국 젊은 태감에게 조언을 구해 직접 고른 고급 화장품으로 진진의 눈썹을 그려주었고, 두 사람은 그제야 사이가 좋아졌다.
당시 창경제는 생각했다.
‘진진, 속이 이렇게 좁아서야. 나는 황태자고 장래에 황제가 될 몸인데, 어찌 진진 너 하나만 바라볼 수 있단 말이야.’
황위에 오른 뒤 느낀 것은 진진보다 신중하고, 다정하며, 지고지순한 여인들은 너무나도 많다는 점이었다.
중년이 된 창경제는 가끔 저와 진진의 균열은 필연적인 거라 생각했다. 당시 두 사람 모두 아주 젊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썹을 그려달라는 황후의 말을 듣자 창경제는 참으로 감개무량해졌다.
“그래, 그려줄게.”
창경제가 몸을 숙여 눈썹 먹을 들고 황후의 눈썹을 그려주었다.
황후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활짝 웃었다.
“태자 오라버니, 서투시네요.”
창경제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눈썹 먹을 옆에 던진 뒤 황후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진진, 짐이 잘못했소. 짐이 그대를 오해해선 안 됐는데. 사실 짐은 줄곧 그대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리라 믿지 못했소. 깨어나시오, 진진. 후궁의 주인은 그대가 아니면 그 누구도 맡을 수 없소.”
황후는 멍하니 창경제를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듯 그를 밀쳐냈다.
“나가세요. 다신 보고 싶지 않습니다!”
창경제가 황후의 손을 붙잡았다.
“진진, 아이처럼 굴지 마시오. 우린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왔고, 나중엔 함께 황릉에 묻힐 부부 아니겠소. 어찌 나를 보지 않으려는 거요? 짐에게 벌을 주려거든, 그대가 다 나은 뒤에 벌하면 안 되겠소?”
황후가 광기 어린 눈빛으로 발악했다.
“벌이요? 예, 반드시 벌해야지요. 제 아이를 돌려주세요. 어찌 화려군이 내 아이를 빼앗아가는 걸 두고 보기만 하셨습니까. 제 아이란 말입니다!”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