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만남
청아는 묵묵히 황후를 붙잡고 눈을 내리깔아 드러나는 감정을 숨겼다. 안에서 생사를 알 수 없는 태후가 떠오르자, 절로 감탄스러운 감정이 치솟았다.
태후는 황상이 황후를 만나고자 하면, 반드시 황후를 깔끔하게 단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황후마마께서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드리지 않는 겁니까?
태후는 인자한 어른처럼 청아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었다.
- 청아야, 여인은 절대 사내의 가엾어하는 마음에 기대 지내선 안 된다. 그런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릴 뿐이야. 게다가, 그 사내가 황제일 땐 더더욱!
당시 청아는 반신반의했지만, 방금 황상의 눈에 스친 놀라움을 보고 그제야 태후에게 감탄하게 되었다.
- 겉으론 괜찮아 보이시지만, 입을 열면 숨길 수 없을 텐데요.
당시 청아가 태후에게 묻자 태후가 피식 웃었다.
- 그래야지. 아름다운 물건일수록 갑자기 망가지면 마음이 동하기 마련이니. 아름다운 비단이 바닥에 떨어져 짓밟히면 아까운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만, 걸레가 밟히는 건 누가 신경 쓰겠느냐?
청아는 태후의 말을 떠올리고 몰래 창경제의 반응을 살폈다.
창경제는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듯, 한 걸음씩 황후에게 다가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 왔소?”
풍 황후는 키가 컸기에 아래턱을 살짝 드는 것만으로도 창경제와 마주 볼 수 있었다.
까맣고 빛나는 눈동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창경제의 눈을 비추었다.
창경제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20년이나 지났는데, 역시 아직도 황후를 잊지 못했군. 황후의 눈이 이리도 익숙하게 느껴지다니.’
“황후, 짐을 잊은 거요?”
황후가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창경제가 복잡한 심경으로 물었다.
황후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대며 웃더니 철없는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태자 오라버니, 왜 저를 고모로 착각하시는 거예요? 저는 진진이잖아요!”
“황후―”
창경제는 깜짝 놀랐다.
황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애교스럽게 꾸짖었다.
“또 그렇게 부르면 고모님께 이를 거예요. 누가 태자 오라버니의 황후라는 거예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창경제는 멍해졌다.
어린 시절 그는 황위에 오르려면 양모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태후가 가장 사랑하는 조카인 진진도 자연스레 아끼게 되었었다.
의도가 담겨있었던 그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심으로 변해갔다.
열세 살의 소녀는 마치 개나리처럼 아름답고 선량했다. 창경제가 그녀와 혼인하면, 양모의 전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아내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떨칠 수 있었겠는가?
창경제는 갓 열세 살이 된 소녀에게 몰래 속삭였다.
- 진진, 내가 황위에 오르면 내 황후가 되어줘. 어때?
“진진―”
창경제는 정신이 들어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황후를 쳐다봤다. 가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해졌다.
황후가 갑자기 손을 뻗어 창경제의 손을 끌어당겼다.
창경제는 흠칫했지만, 풍 황후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래요. 황후가 아니라 진진이라니까요. 고모님께서 아시면 분명 꾸짖으실 거라고요. 그나저나 고모님은요? 못 뵌 지 꽤 된 것 같아요.”
창경제가 황후의 손을 붙잡고 황후를 부축하고 있는 청아를 쳐다봤다.
청아가 급히 말했다.
“황상, 마마의 정신이 온전치 않아 종종 기억이 어린 시절에 머무르곤 합니다.”
창경제가 눈을 질끈 감더니, 황후를 보고 씁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진, 고모님께 데려가 주마.”
두 사람이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청아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따라 들어갔다.
태후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베개에 기대있었고, 교 유모가 옆을 지키며 태후의 손을 주무르고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기척이 들리자, 태후가 눈을 떴다. 그녀는 황후와 황제가 나란히 들어오는 걸 보고 급히 다시 눈을 감고 복잡한 심경을 가라앉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태후의 눈빛엔 감격만이 남아 있었다.
“진진, 어서 고모 곁으로 오거라. 보고 싶었단다!”
황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경제가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진진, 어서 가 봐야지. 고모님이 보고 싶다며?”
황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모님은 저렇게 늙지 않았는데―”
“정말 고모님이야. 자세히 봐봐.”
황후가 창경제를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태자 오라버니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오라버니는 한 번도 날 속인 적 없으니까요.”
황후가 달려가 태후 곁에 엎드렸다.
“고모님, 무슨 일이에요. 편찮으신 거예요?”
태후가 황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진진이가 보고 싶어서 병이 났단다.”
그때, 태후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황후는 어리둥절하며 창경제를 쳐다봤다.
창경제가 재빨리 다가와 우선 황후를 껴안고 태후의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한 뒤 태후의 손을 붙잡은 채 크게 외쳤다.
“어서 국사를 모셔오거라!”
태후의 손이 움찔거리더니 가까스로 눈을 뜨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황상……, 아직도…… 진진을 원망합니까?”
창경제는 고개를 숙여 아이 같은 모습의 황후를 쳐다보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주 예전부터 이미……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진진이 어찌…… 그런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앞으로 황상이 나 대신 진진을 잘 보살펴주세요…….”
“예, 모후. 사실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이 들려오자, 태후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정신을 잃었다.
창경제의 품속에서 고개를 든 황후는 기절한 태후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진진, 괜찮다. 고모님은 괜찮―”
창경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후에게 밀쳐져 비틀거렸다.
“저리 가, 저리 가! 너희 모두 나쁜 사람들이야. 내 아이를 뺏어갔어―”
주홍희가 급히 창경제를 부축했다.
“황상―”
“괜찮다.”
창경제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진진, 왜 그러는 게야?”
청아가 황후를 꽉 붙들고 설명했다.
“황상, 황후마마의 기억이 항상 어린 시절에 머물러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또 황후가 된 이후로 돌아오셨어요. 이 시기를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십니다.”
“그래, 알겠다. 그럼 황후를 데리고 관저전으로, 아니, 자녕궁의 편전으로 가 쉬게 하거라. 모후께서 괜찮아지시면 짐이 보러 갈 테니.”
“예.”
청아는 샘솟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황후와 함께 측문으로 나갔다.
황후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청령진인이 정미를 데리고 급히 들어왔다.
청령진인은 태후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가 부술로 독소가 퍼지는 걸 멈췄다.
“국사, 어떻소?”
청령진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독이 태후마마의 심장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방금 부술을 이용해 강제로 멈추긴 했지만, 오늘 안에 무슨 독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살릴 방법은 없습니다.”
창경제의 얼굴이 몹시 어두워졌다.
“주홍희, 이 태의가 도착했다고 들었네만 가서 그 무능한 것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
주홍희는 얼른 밖으로 달려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도 연구 중이라 하옵니다…….”
“쓸모없는 것들!”
창경제가 발걸음을 뗐다.
“짐이 직접 가보마!”
“황상―”
주홍희가 창경제를 멈춰 세우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황상께서 가시면, 태의들이 더욱 긴장할 것입니다―”
창경제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더니 손을 내저었다.
“주홍희, 네가 가서 살펴보거라. 무슨 일이 생기면 속히 보고하고!”
주홍희가 급히 밖으로 나갔고, 창경제는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청령진인을 쳐다봤다.
“국사, 무슨 독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오?”
청령진인이 정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시선을 거두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없습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태후를 살리는 방법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방법 중 하나는 특별한 피가 흐르는 사람의 정혈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청령진인의 제자인 정미가 바로 그 ‘특별한 피’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재 태후의 상태를 봐선, 정미의 피로 독을 막게 되면 정미의 원기도 크게 손상되어 스물을 넘기지 못할 게 뻔했다.
황실의 복잡한 사정은 외부인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청령진인은 제 제자를 황실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창경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태후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온몸을 경련했다. 정미는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창경제에게 말했다.
“황상, 제가 안마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데, 태후마마의 몸을 안마하여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을까요?”
창경제는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해 보거라.”
정미는 태후 곁에 앉아 태후의 손을 잡고 손가락부터 천천히 안마하기 시작했다.
청령진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볼 수 있지. 현미는 안마법 같은 건 알지 못한다. 그저 부술을 손끝으로 주입해 태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지. 저 어린 나이에 이런 방법을 알고 활용하기까지 하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인재로군.’
청령진인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현미의 운명이 아니었다면, 내 의발(*衣鉢: 스승으로부터 전하는 교법이나 깊은 가르침)을 전수해주었을 텐데.’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었고, 정미는 한시도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 태후는 이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창경제는 이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발소리가 들려오고, 주홍희가 걸어들어왔다.
“어찌 되었는가?”
창경제는 주홍희 뒤에 서 있는 이 태의를 보고 순간 기뻐했다.
“알아내었는가?”
이 태의가 급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절을 올렸다.
“예, 알아냈사옵니다. 태후마마께선 협죽도의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협죽도?”
창경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협죽도가 있는 곳이 번쩍 떠올랐다.
장춘궁!
장춘궁의 협죽도는 사계절 내내 푸르렀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었다. 랑국에서 온 아름다운 꽃을 보며 장춘궁과 걸맞다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독을 품고 있다니? 장춘궁이라면―’
창경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이 태의, 국사를 도와 해독하고 있게!”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주홍희가 얼른 창경제의 뒤를 따라갔다.
“화 귀비를 불러오라.”
창경제가 응접실에 앉아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
* * *
화 귀비는 황제의 부름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연회에서 태후마마께 이런 일이 생겼으니, 황상께서 당연히 나를 추궁하시겠지. 하지만 지금 부르시는 것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어. 하나는 태후마마의 상태가 호전되어 이제 막 조사를 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후마마께서 이미―’
화 귀비는 제가 무슨 결과를 바라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태후가 살아난다면 황상께서 화는 덜 내시겠지만, 태후가 떠났다면 황상의 노여움을 잠깐 견뎌내기만 하면 평생 편안해지겠지.’
화 귀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겐 태자가 있으니, 미래는 전혀 두렵지 않아.’
“주 공공, 태후마마는 어찌 되셨습니까?”
“소인은 잘 알지 못합니다. 소인이 마마를 모시러 나섰을 때, 태의와 국사께서 해독을 시작하셨습니다.”
화 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녕궁 안으로 들어가자, 창경제가 굳은 표정으로 응접실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상.”
화 귀비가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마마께선 어찌 되셨습니까? 신첩이 계속 걱정이 되어―”
창경제가 차가운 눈빛으로 화 귀비를 쏘아봤다. 화 귀비는 그 칼처럼 날카로운 눈빛에 말을 잇지 못했다.
“화 귀비,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화 귀비는 깜짝 놀랐다.
“황상, 무슨 말씀이신지―”
창경제가 벌떡 일어났다.
“협죽도의 독에 중독되었다더군. 이제 네 죄를 알겠느냐?”
“협죽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