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망신
서재로 돌아온 태자의 귓가엔, 창경제가 위무행과 정철을 칭찬하던 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태자는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옆에 있던 벼루를 던져 산산조각내고는 고함질렀다.
“중구(重九)!”
어떤 젊은이가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 명하십시오.”
태자가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본궁이 밀서를 한 통 쓸 테니, 네가 영서로 가져가 오월루(吳越樓)에게 전해라. 밀서를 다 본 후 확실히 없애는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
“예.”
태자는 붓을 들고 빠르게 밀서를 써내려 간 뒤 봉랍으로 봉하고 그것을 중구에게 건넸다.
“가거라.”
중구가 떠난 뒤, 태자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붓을 던져버렸다. 사방에 먹물이 튀었으나 태자는 차갑게 웃었다.
‘위무행은 일군의 주장이니, 건드렸다간 전세에 지장이 갈 수 있다. 하지만 정철은 고작 애송이 참의일 뿐.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정철, 억울해 말거라. 이게 다 부황이 본궁과 자네를 비교한 탓이니. 그 모래사장에서 네 목숨을 잃은 뒤에도 부황께서 너를 칭찬하시는지 꼭 봐야겠구나!’
태자는 정동에게 화풀이를 한 뒤 정철을 처리할 방법까지 떠오르자, 기분이 좋아져 동궁에서 마음에 드는 비빈들과 차례로 동침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태후의 생일이 다가왔다.
태후의 뜻에 따라 황실 사람들만 함께 모여 잔치를 즐기고, 예외로 국사와 국사의 제자인 정미를 손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6월은 한창 더울 때라, 화 귀비는 청량전(淸凉殿)에서 연회를 열었다.
청량전은 그리 넓은 장소가 아니었지만 구석에 얼음 분경을 가득 두어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창경제가 칭찬했다.
“귀비, 잘 준비했군.”
화 귀비는 뿌듯한 마음에 얌전히 대답했다.
“신첩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잠시 후 음악이 시작되었고 화려한 궁복을 입은 궁녀들이 쟁반을 들고 줄지어 들어와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화 귀비가 창경제 옆에서 말했다.
“날씨도 덥고, 태후마마께선 음식을 담백하게 드시는 편이니 큰 생선이나 고기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신선한 채소 위주로 준비했는데, 태후마마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네요.”
창경제가 더욱 따뜻하게 웃었다.
“귀비의 마음은 모후께서도 아실 거요. 짐은 모두 괜찮아 보이는군.”
상이 다 차려지자, 창경제가 술잔을 들었다.
“모후, 짐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창경제가 술을 올리니 귀비도 이어서 술을 올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본체만체했고,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귀비가 아무리 후궁을 휘어잡고 있든, 결국 황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황상을 뒤이어 술을 올리는 게 고까웠던 것이다.
태후가 과실주를 한입 마시고는 웃었다.
“애가가 듣기로는, 이번 연회는 모두 귀비가 준비한 거라던데. 정말 고생했군. 장소도 잘 골랐고, 음식도 훌륭하다. 게다가 애가를 위해 국사 대인까지 모셔오다니,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화 귀비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태후마마께서 만족하신다니, 신첩의 영광입니다.”
태후가 사방을 둘러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아, 애가가 알기로는 귀비에게 수양딸도 있다던데. 오늘 모인 사람들은 모두 황친과 국척이니, 그 아이도 있겠지. 애가에게 소개해주게.”
화 귀비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굳었고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가 했다.
“혹시 안 왔는가?”
태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
정미는 청령진인의 아랫자리에 앉아있었는데,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내가 동궁에 한 번 간 것만으로도 대추떡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태후인데, 정요의 사건을 모를 리 없지. 태후는 대놓고 화 귀비에게 망신을 주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태후의 존엄한 지위를 생각하면 화 귀비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겠지.’
화 귀비는 울화를 꾹 참으며 머쓱한 듯 설명했다.
“신첩도 못 본 지 한참 되었습니다. 몸이 안 좋아 외출하기가 어렵다더군요.”
이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몰래 비웃었다.
‘당연히 못 나오겠지. 그렇게 큰 창피를 당했는데, 위국공부에선 그 계집을 내쫓지도 않았다고. 외출할 체면이 남아 있는 게 이상하지. 위국공부는 정말 아량이 넓군. 음, 아닌가. 화 귀비의 수양딸이고 황상께서 사혼을 내리셨으니, 내쫓고 싶다고 내쫓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위국공부에서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꾹 참고 넘어갈 수밖에.’
태후와 화 귀비의 대화에 분위기가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화 귀비는 수치심에 정요가 더욱 미워졌다. 정미는 그 모습을 보자 몹시 통쾌해했다.
‘역시, 훔친 건 평생 제 것이 될 수 없고 결국 다 돌려받게 되어있어.’
정철이 전장에 나간 뒤, 정미는 위국공부를 거의 찾지 않았다. 하지만 한 씨가 종종 현청관으로 찾아왔기에 한지 부부의 일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반반이 또 회임하게 되었지만, 한지는 여전히 정요를 포기하지 못해 하루가 멀다 하고 정요의 방을 찾아간다고 했다.
정미는 한 씨가 왜 이 일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요의 명성은 이미 바닥이 되었고, 집안에선 한지 외에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걸 떠올리자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태후는 엉망이 된 화 귀비의 안색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내가 싫어하는 자의 불행은, 곧 나의 기쁨이지.’
태후의 표정이 더욱 인자해졌다.
“귀비, 아파서 궁에도 오지 못할 정도인데, 자주 사람을 보내 살펴봐야지. 네 수양딸 아니냐. 아프다고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애가가 듣기로는 그 아이가 네 목숨도 구해주었다던데?”
화 귀비는 완전히 무너졌다.
‘지금 이 말은, 내가 생명의 은인을 버렸다는 뜻인가? 이 노인네, 일부러 이러는 거지? 분명 고의일 게야! 내가 연회를 준비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국사를 모셔오려고 머리를 쥐어 짜냈다고. 그런데 이 노인네는 지금 사람들 앞에서 내게 망신을 줘?’
태후는 조용히 입을 삐쭉이며 창경제를 흘끗 쳐다봤다.
‘고의면 어쩔 텐가? 내가 황궁의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나 화 귀비와 다투지 않았던 건, 언젠간 태자가 황위에 오르기 때문이었다. 바보가 된 황후와 내 친가를 위해 몸을 사려야 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천한 것이 감히 우리 풍씨 가문을 풍비박산 냈으니, 그냥 둘 순 없지! 황상의 옥체가 건강할 때 끝장을 봐야겠다! 화 귀비뿐만 아니라, 태자도 마찬가지다. 가짜 손자 따위 필요 없어! 평왕은 절름발이이니 제쳐두고, 오황자와 육황자도 있지 않나? 내 몸도 아직 정정한데, 그 둘이 성인이 되는 모습도 거뜬히 지켜볼 수 있을 테지. 하늘의 뜻이 어떤지 보자. 나와 황상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화 귀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태자가 나서서 말했다.
“황조모님, 모비께서 얼마 전 제게 정 양제를 의매에게 보내라 하셨는데, 최근 정 양제의 몸이 좋지 않아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태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태자, 모비를 위해 나서주는구나. 귀비의 세심함은 애가도 잘 알고 있지. 그저 물어본 것뿐이다.”
태자는 기가 막혔다.
‘그저 물어본 것뿐이라니? 이게?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화가 난 태자가 이를 악무는데, 그 순간 길고 맑은소리가 전 안에 가득 울렸다.
태자는 처음엔 어리둥절하며 사방을 둘러봤다. 모든 사람이 이상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자, 그제야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구릿한 냄새가 풍겨오자, 태자는 완전히 멍해졌다.
‘나, 설마 방금―’
사람이 많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무렇지 않은 척 옆 사람과 마찬가지로 싫은 표정을 짓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터다.
태자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지만, 방금 화 귀비를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홀로 떨어져 있었기에, 그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태자, 어서 돌아가라!”
창경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꾸짖었다.
‘저게 정말 내 아들이란 말인가? 맙소사, 내가 황상으로서 얼마나 성실하고 신중하게 일해 왔던가? 이재민을 위해 비들이 연지 수분을 살 돈도 깎아버리기까지 했는데, 하늘은 왜 내게 멀쩡한 아들 하나 주지 않은 게지?’
창피를 당한 태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창경제의 혐오 가득한 눈빛은 태자의 마음을 칼처럼 베어버렸고, 태자는 억울하면서도 화가 났다.
그리고 화가 나자 속은 더욱 들끓었다.
태자는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뿍뿍 대는 소리를 내었고, 주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양옆으로 흩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황친과 국척이었기에, 웃음을 터뜨린 걸로 처벌을 받을 리는 없었다. 이에 그 웃음소리는 빠르게 전염되어 전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창경제는 이런 아들이 몹시 창피했고, 곧바로 노했다.
“태자, 속이 안 좋으면 동궁에 있지, 뭐 하러 나왔느냐?”
“저는―”
부끄럽고 화가 난 태자는 또 방귀를 뀌고 말았다.
태자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차라리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창경제도 당장 달려가 창피한 아들을 걷어차 죽이고 싶었기에 소매를 휙 뿌리치며 말했다.
“여봐라, 어서 태자를 모시고 가 쉬게 하라!”
태자는 왜 저도 모르게 방귀를 뀌게 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겁이 나 양옆에서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나갔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태자가 큰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으러 끌려나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태자가 떠나자, 태자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손 양제와 마 양제도 동시에 일어나 말했다.
“신첩은 태자 전하를 모시러 가겠습니다!”
두 양제는 거의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창경제는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자, 자. 다들 식사를 드시오. 귀비가 평소 잘 먹지 못하는 음식까지 많이 준비했으니.”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전 안 가득 이상한 냄새가 퍼졌는데, 누가 음식을 먹고 싶어 하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황상을 빤히 쳐다봤다.
‘황상께서 젓가락을 들면 우리 모두 끝장이다!’
창경제는 사람들을 쳐다봤다가 고개를 숙여 상 위의 음식들을 쳐다봤다. 조금의 식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창경제는 급히 화 귀비에게 눈치를 주었다.
‘다들 음식을 먹고 싶어 하지 않잖소. 어서 다른 요리를 내오라고!’
화 귀비는 창경제의 눈빛을 눈치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태후는 늘 조용하고 소박하게 지내왔기에, 화 귀비는 일부러 이번 연회를 간단하고 조촐하게 준비했다. 특히 요리들이 모두 귀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정성껏 조리했고, 식사 후 감칠맛을 남기기 위해 양도 많이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요리를 내오라니 말도 안 되지!’
화 귀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창경제의 눈썹이 올라갔다.
‘오늘 어미고 아들이고, 둘 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군!’
창경제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챈 화 귀비가 급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상, 신첩이 장수면을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지금 먹으면 딱 좋겠어요…….”
창경제는 기가 찼다.
‘식사를 얼마 하지도 못했는데 장수면을 먹자고? 참으로 희한한 연회로군!’
창경제는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태후를 쳐다봤다.
태후는 이해한다는 듯 창경제에게 웃어 보였다.
“조금 배고프구나. 장수면은 먹고 나서도 속이 편한 음식이지. 어서 내오거라.”
창경제는 안도의 한숨을 쉰 뒤 화 귀비를 흘겨봤다.
화 귀비는 뒤에 있던 내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