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은 5냥과 맞바꾼 기회
태후의 눈빛이 갑자기 굳었다.
연주 풍씨 가문이 바로 그녀의 친가였기 때문이다.
“말해 보거라!”
태후가 무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등안은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선 내시 특유의 가녀림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부드러웠다.
“당시 어머니께서 중병으로 몸져누우시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소인을 데리고 아침 일찍부터 종일 강가에서 얼음을 깨 생선을 잡아 팔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미끄러져 얼음구멍에 빠지셨고, 소인이 아버지를 구했을 땐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셨습니다. 생선을 판 돈으로 부모님의 약값을 대고 나니 돈은 빠르게 떨어졌고, 아버지는 얼마 뒤 돌아가셨지요. 소인은 차마 아버지를 거적에 싼 채 보내드릴 수 없어 제 몸을 팔아 장례를 치러드리려 했습니다.”
등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당시 소인은 아직 어려 세상 물정을 몰랐지요. 몸을 파는 곳이 따로 있을 줄은요. 길가에 한참 무릎을 꿇고 앉아있어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더군요. 심지어 지나가던 아이가 제게 눈덩이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소인이 절망에 빠질 때쯤, 마침 대부호 가문의 마차가 지나가더니 안에서 여종이 내려와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께서 주신 거라며, 소인에게 은 5냥을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마차에 올라 떠났고, 소인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더군요. 다만, 마차에 쓰여 있는 ‘풍’이란 글자는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태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등안이 이어서 말했다.
“소인은 은 2냥으로 관을 사 아버지를 묻어드렸고, 남은 돈으로 얼마 뒤 세상을 떠난 어머니도 묻어드렸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습니다. 보름 내내 눈이 내렸고 주변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동사해버렸지요. 소인은 조금 남은 돈으로 동생들과 함께 겨우 그 폭설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고향엔 친척이 아무도 남지 않았기에, 이듬해 봄이 되자마자 동생들을 데리고 수도로 왔지요. 하지만 수도는 남들 말처럼 그리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소인은 도저히 동생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황궁에서 내시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악물고 궁으로 들어왔지요.”
등안은 눈가가 촉촉해진 채 태후를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날 때까지도 소인은 여전히 잊지 못합니다. 풍씨라는 성을 가진 아가씨가 건넨 은 5냥 덕분에 저희 여섯 식구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바로 황후란 말이냐?”
태후가 묻자, 등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어찌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단 말이냐!”
등안이 바닥에 엎드렸다.
“처음엔 소인도 몰랐습니다. 소인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화 귀비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고, 글자를 조금 알고 밖에서 고생한 경험 덕분에 다른 태감보다 훨씬 눈치가 빨랐지요. 그렇게 점점 화 귀비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화 귀비의 말을 잘 들어야만 제 동생들도 잘 지낼 수 있었지요…….
그리고 황후마마의 공주 전하께서 세상을 떠난 그해, 상심한 황후마마를 위해서 승은백 부인께서 특별히 수도로 와 황후마마를 뵈러 오셨습니다. 어떤 젊은 부인도 함께 데리고 오셨는데, 소인은 우연히 그 부인과 마주치자마자 당시 소인에게 은냥을 주었던 여종이라는 걸 알아챘지요. 몰래 알아보고 나서야 그 부인이 황후마마의 시종이었는데, 나이가 많아 궁에 따라 들어오지 않고 연주에 남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소인은 그제야 귀비마마께서 가장 쓰러뜨리고 싶어 하시는 사람이 바로 소인의 은인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태후가 등안을 빤히 쳐다봤다.
“그럼 황후가 황상의 오해를 받았을 때, 화 귀비가 네게 무슨 명령을 내렸느냐?”
등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일에는 소인이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귀비마마께선 대태감 양강(楊江)을 더 신뢰하셨고 비밀스러운 임무는 모두 양강에게 맡기셨습니다. 귀비마마께선 황후마마께서 유폐된 후에야 소인에게 관저궁을 잘 감시하라는 명을 내리셨고요. 그리고 얼마 뒤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떻게든 숨기려고 노력해봤지만 황자 전하께서 태어나신 뒤로는 결국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인은 귀비마마께서 분명 양강을 보내 황자 전하를 처리하실 거라 확신했습니다.”
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애가의 기억으로는, 화 귀비 곁에 있던 대태감 양강은 갑자기 급병에 걸려 죽었다던데?”
“예.”
등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귀비마마께서 가장 신임하는 내시는 양강을 제외하면 소인뿐이었습니다. 양강이 죽으면, 귀비마마께선 분명히 소인을 보내 황자 전하를 처리하게 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내시만큼 황궁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자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소인은 양강과 귀비마마 곁의 대궁녀가 내통한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그 대궁녀는 귀비의 창고 관리를 맡았는데, 양강이 그 궁녀를 통해 귀비가 잘 쓰지 않는 물건을 궁 밖으로 가져나가 팔곤 했습니다. 이 일이 드러나자, 귀비마마께서 대로하시며 그 둘을 장형(*杖刑: 곤장으로 때려죽이는 형벌)으로 죽여버리셨고 바깥에는 급사했다고 알렸지요. 그리고 황자 전하의 일은 당연히 소인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 천한 것이 네게 뭐라 명했느냐?”
등안이 망설이자, 태후가 호통쳤다.
“말하거라!”
등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황자 전하를 관저궁에서 데리고 나가 질식사시킨 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리라 하셨습니다.”
태후가 낮은 평상 위에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소인은 황자 전하를 데리고 나온 후 나무통 안에 넣어 몰래 강에 흘려보냈습니다. 성 근처의 강은 흐름이 거세지 않고, 당시 계절에 나무통이 이강(離江)까지 흘러갔을 리도 없습니다. 운 좋게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지금까지 살아계실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소인이 황후마마께 조금이라도 빚을 갚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등안이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태후마마, 소인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소인의 동생들만큼은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낮은 평상 위에 단정히 앉은 태후는 잠이라도 든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안은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태후는 마침내 눈을 뜨고 놀랍도록 반짝이는 눈으로 등안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의 목숨은 필요 없네.”
“마마?”
“안심하게. 자네 동생들도 일단은 아무 일 없을 테니. 애가가 자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그 일만 잘 처리한다면 최소한 네 동생들의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지.”
등안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받들겠습니다.”
태후가 갑자기 웃더니 얇은 휘장이 걸린 창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맘때쯤이면, 장춘궁 화원의 협죽도가 한창일 테지?”
등안은 깜짝 놀랐다.
“마마, 그 꽃은―”
“그래, 독이 있지?”
태후가 피식 웃었다.
“애가는 풍씨 가문의 적장녀다. 내가 금기서화만 할 줄 알았느냐?”
“황송하옵니다, 마마. 소인의 뜻은, 귀비마마께선 아주 조심스러운 분이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시종에게 먹여본 후 드시곤 합니다.”
태후가 비웃었다.
“내가 화 귀비에게 먹인다고 했던가?”
“그, 그럼―”
“애가가 먹겠다!”
등안은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화 귀비는 장춘궁에 들어가 협죽도를 심은 뒤, 하인들을 장형으로 죽이는 일은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다만 처리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심복에게 협죽도의 즙을 내라 명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렸다.
장춘궁의 내시와 궁녀들은 그 이유를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 귀비를 더욱 존경하며 고분고분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태후마마, 협죽도는 랑국(朗國)에서 들여온 나무로, 그 수가 아주 적어 독극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절대 마마께서 드셔선 안 됩니다!”
태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등안, 이리 와보거라.”
등안이 다가가자, 태후가 등안에게 작게 귓속말을 건넸다. 등안은 들을수록 얼굴에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마지막엔 그간 조용히 지냈던 태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적에게 독하게 구는 사람보다 저 자신에게 독하게 구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 역시 태후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다르군. 그러니까 내 동생과 가족들의 목숨으로 위협하는 것도 그저 나를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지…….’
등안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등안, 애가의 말을 이해했느냐?”
태후가 담담히 묻자 등안이 급히 대답했다.
“예, 이해했습니다.”
“그럼 됐다. 이제 가보거라. 화 귀비가 애가에게 얼마나 즐거운 연회를 준비할는지, 기대하고 있으마!”
태후의 표정은 몹시 무서웠다.
등안은 허리를 숙여 방에서 나간 후, 그제야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몰래 닦아냈다. 그리고 자녕궁 대문을 나설 때쯤에는 이미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태후마마, 너무 위험합니다.”
자녕궁 안, 교 유모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이 일을 당장 황상께 알려, 황상께서 화 귀비를 벌하길 원하신다 해도 마마의 안위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태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교 유모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교 유모는 태후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애가의 계획이, 화 귀비의 처벌을 위한 것임은 맞네.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냐.”
교 유모가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내자, 태후가 또박또박 말했다.
“황상이 황후를 만나게 할 것이다!”
“마마?”
태후가 일어나 창가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작게 말했다.
“등안의 말, 너도 들었겠지? 황자가 아직 살아 있는진 몰라도, 애가는 우선 황상이 당시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겠다. 황상이 여전히 황후를 탓하고 있다면, 두 번 다신 이 일을 꺼내지 않겠다. 하지만 황상이 당시 황후를 오해했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래서 그간 후회해왔다면, 애가는 화 귀비가 한 짓을 들춰낼 셈이다. 그 사갈 같은 천한 것에게 응당한 벌을 내릴 것이야!”
태후의 얼굴에 마침내 분노가 드러났다. 태후는 손을 들어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애가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손에 한 방울의 피도 묻히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건든 적은 없다! 화려군(華麗君) 그 천한 것이 감히 등안을 시켜 갓 태어난 황자를 죽이려 하다니! 그 작은 생명이 소리소문없이 차가운 강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프구나.”
교 유모도 마음이 아파 태후를 위로했다.
“마마, 용과 봉황의 기운이 황자 전하를 지켜주었을 겁니다. 선한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않습니까. 지금쯤 훤칠한 사내가 되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다면 애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넌 내일 사당에 돈을 기부한다는 핑계로 외출하거라. 우선 수도에 있는 22살 정도의 사내를 모조리 찾아봐야겠다!”
“예.”
“아, 용모가 못난 자는 조사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풍씨 가문의 여식들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하고 황상도 풍채가 훌륭하니, 못생긴 아이를 낳았을 리 없다.”
교 유모는 어이가 없었다. 이리도 자신만만하시다니!
“하지만 마마께서 직접 독을 복용하시다니요. 소인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태후가 손을 내저었다.
“애가도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말거라. 등안도 제 분수를 잘 알 테고. 후후, 교 유모, 등안에게 애가가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나날을 보내는 늙은이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자가 얌전히 애가의 말을 들었겠느냐?”
교 유모는 그제야 납득하며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