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지나간 일
태후는 정미를 붙잡은 손을 내려놓고 천천히 진정을 되찾았다.
“황후가 유폐되기 전, 화 귀비는 아직 첩여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관저궁에 황후와 청아밖에 없다고 말한 걸 보니, 유폐된 이후의 기억인 게 분명하군요.”
그러곤 교 유모를 보며 명을 내렸다.
“교 유모, 가서 청아를 데려오거라. 애가가 물어볼 것이 있으니.”
교 유모가 입구에서 ‘예’하고 대답했다.
정미는 왠지 겁이 나 그녀를 나지막이 불렀다.
“태후마마―”
태후가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이렇게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셨으니, 남아서 들으셔도 됩니다. 황후의 치료에 도움이 될 테니.”
정미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였다.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라는 뜻 아냐? 절대 좋은 의미는 아니군!’
잠시 뒤, 청아가 들어와 바닥에 엎드렸다.
“태후마마―”
“청아, 일어나서 대답하거라.”
“예.”
청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 옆의 정미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애가 옆의 아가씨를 아느냐?”
청아가 시선을 거두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모릅니다.”
“청아, 네가 황후를 따른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지?”
“예, 당시 소인은 나이가 어려 잘못을 저지른 뒤 궁녀에게 체벌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모습을 황후마마께서 보시고 저를 구해주셨고, 그때부터 황후마마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럼, 황후에게 충성한다고 볼 수 있겠지?”
청아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예, 소인은 황후마마께 당연히 충성하고 있습니다.”
태후가 탁자를 탕 내리치며 고함쳤다.
“그럼 황후가 유폐된 후 황자를 낳은 일을, 어찌 애가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자가 황자를 해치게 둔 것이냐!”
청아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충격받은 표정으로 태후를 쳐다봤다.
“태, 태후마마, 다, 다 알게 되신 겁니까?”
태후는 그제야 정미의 말을 믿게 되었고 손가의 찻잔을 들어 청아에게로 던졌다.
“어서 당시의 일을 자세히 말하지 않고!”
청아는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태후마마, 황후마마께서 절대 남에게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마마도 달리 방도가 없으셨단 말입니다.”
청아가 회상에 잠겼다.
“마마께선 관저궁에 유폐 당하신 뒤에야, 그 일이 자매처럼 여겼던 화 귀비의 짓이라는 걸 깨닫게 되셨습니다. 화도 나고 원망도 하셨으며, 심지어 차라리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회임 사실을 아시고 마마께선 기쁘면서도 두려워하셨습니다. 피붙이가 생긴 것에 기뻐하시며 아무도 찾지 않는 차가운 궁에서 잘 지낼 수 있는, 삶의 동력이 되었지요. 하지만 황상, 혹은 화 귀비께서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죽일 것이 분명하여 몹시 두려워하셨습니다.”
태후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황상은―”
하지만 태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황상은 황후가 다른 사내와 사통했다고 오해하고 있었으니, 황상이 당연히 황후 배 속의 아이가 제 아이라 믿었을 리 없지. 나도 태후라는 지위를 가졌지만, 그 당시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황상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 나서볼 셈이었으니.’
하지만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관저궁에서는 황후가 미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청아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마마를 믿지 않으시니, 당연히 배 속의 아이도 황자가 아니라 의심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태후마마께 도움을 구한다고 해도 황상께서 아이의 존재를 아시는 순간 소용없을뿐더러, 태후마마까지 연루될 거라 하셨지요. 하지만 아무리 꽁꽁 숨겨도 황자 전하께서 태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화 귀비가 알게 되었고, 화 귀비는 등안을 보내 황손을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마의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고요. 태후마마, 저희 마마께서 그간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네 말은, 황후가 냉궁에서 황자를 낳았단 뜻이냐?”
태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청아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녀가 아닌 황자 전하셨습니다. 소인이 직접 탯줄을 잘랐습니다.”
“그럼 황자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태후는 가슴이 아파 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등안…….’
태후는 마음속으로 계속 등안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다 손을 내저어 청아를 내보낸 뒤, 정미에게 말했다.
“현미 도장, 오늘 일은 이곳을 나가자마자 잊으세요.”
“걱정 마세요, 태후마마. 저는 부의입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일 외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지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습니다.”
태후는 피곤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 * *
자녕궁에서 있었던 일은 마치 호수 위에 부는 바람처럼 흔적 없이 지나가 궁은 평소처럼 조용하고 평온했다.
눈 깜짝할 새 4월의 반이 지나고, 북제, 서강 두 곳의 전투도 점점 치열해져 긴장감이 흘렀다.
어느 날, 창경제가 장춘궁으로 와 화 귀비에게 말했다.
“올해는 모후께서 예전보다 사람을 많이 만나시더군. 한 달 뒤면 모후의 환갑이신데, 올해는 예전처럼 조용히 넘기고 싶지 않소. 귀비가 후궁을 관리하고 있으니, 이 일은 귀비에게 맡기겠소. 모후의 마음에 들게 잘 처리해주시오.”
화 귀비는 흔쾌히 승낙하고는 등안에게 자녕궁으로 가 태후께 인사를 드리라 명했다.
등안이 자녕궁을 찾은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등안에겐 지난 생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태후는 오랫동안 황궁을 관리하지 않은 채 자녕궁에 틀어박혀 지냈지만, 자녕궁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벽돌과 기와 하나하나 모두 여전히 깔끔하게 관리되어있었다. 특히 오랫동안 화 귀비를 따르느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익숙해진 등안은 자녕궁의 모란꽃 화단 속 녹색 모란 한 그루를 몇 번이고 눈여겨보았다.
대량인들은 모란꽃을 좋아했는데, 그중 개화가 어려운 녹색 모란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자녕궁의 화원에 있는 녹색 모란은 아주 깨끗한 녹색이라, 그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등 공공?”
등안이 따라오지 않자, 길을 안내하던 내시가 그를 불렀다.
등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갑시다.”
‘태후는 황상의 친모도 아니고 거의 만나지도 않지만, 그래도 황상께선 태후마마께 마음을 쓰고 계시는구나.’
전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열린 문과 창문 때문에 겹겹이 쌓인 휘장이 천천히 흔들리며 옅은 훈향(熏香)을 전해왔다.
등안은 문득 태후와 황후 모두 훈향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겹겹이 쌓여 안개처럼 뿌옇게 보이는 휘장과 은은한 훈향에 등안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져 발걸음을 느리게 했다.
“등 공공, 태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궁녀가 그를 맞이하며 천천히 길을 안내했다.
등안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궁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태후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귀한 신분이라도 예순 살 정도의 나이에 이토록 오랫동안 궁 안에 칩거한다면, 나이 든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태후는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반짝이는 눈빛이 마치 모진 비와 바람을 맞아도 늘 푸르른 고송(古松)처럼 느껴졌다.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등안을 자세히 살펴봤다.
마흔 정도의 나이였지만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아, 늘 가녀리고 작은 몸을 숙이고 다니는 평범한 내시와는 달라 보였다.
밖에서 만난다면 그 누구도 등안을 내시라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시위(侍衛)라고 하는 게 더 그럴싸했다.
‘그래서 화 귀비의 심복이 되어 그런 천인공노할 비밀에 가담하고서도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인가?’
태후는 이런 생각이 괜한 화풀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눈에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
태후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아도 등안은 침착하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참 뒤, 태후가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가 바로 화 귀비 곁의 총관(總管)인가? 애가의 기억으로는, 화 귀비가 첩여일 적부터 귀비를 따랐다던데?”
등안이 공손히 대답했다.
“예, 태후마마. 소인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귀비마마를 따랐습니다.”
“궁에 들어오자마자?”
태후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언제 궁에 들어왔는가?”
“태평 원년(元年)에 궁에 들어왔습니다, 마마.”
“태평 원년? 그땐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텐데? 그 나이에 궁에 들어오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말이다.”
등안은 태후의 속셈을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태후의 자리에 앉은 여인이 내시 따위와 쓸데없는 잡담을 할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건 잘 알았다.
속으로 어떻게 추측하든 간에, 등안은 고분고분하게 태후의 말에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소인은 그때 열네 살이었습니다.”
“열네 살?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태후가 담담하게 물었다.
등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소인이 궁에 들어오기 전, 아버지께선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선 중병으로 몸져누우셨습니다. 집엔 어린 동생들도 있었는데, 당시 살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와중에 마침 궁에서 내시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렇게 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태후는 등안을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씨익 웃었다.
“그래, 애가도 알고 있다. 자네에겐 남동생이 셋, 여동생이 둘이나 있지. 여동생 둘은 시집간 지도 꽤 되었지? 하나는 교외의 부잣집으로 시집갔고, 다른 하나는 황궁의 시위에게 시집을 갔다지. 아, 그 시위, 지금은 시위장이 되었다던데?”
“태후마마?”
등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으나 태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자네의 남동생들도 앞날이 창창하더군. 셋 중 하나는 관직에 올랐다던데. 호부의 주사(主事)를 맡고 있다지?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좋은 자리야. 등안, 동생들을 아주 잘 챙겼군.”
등안이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 옷을 적시고 있었다.
궁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등안이 태후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심지어 황상께서 갑자기 그간 조용히 지내던 태후의 생신을 축하하자고 하고 귀비마마께서 자연스럽게 그 업무를 받은 것도, 태후가 자연스럽게 나를 보기 위해서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 태후마마께서 나를 부르는 것보다, 귀비마마께서 이쪽으로 나를 보내는 것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일이었을 테니.’
등안은 겁이 나 저도 모르게 태후를 흘끔 쳐다봤다.
태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등안의 위치에서 올려다보니 팔자주름이 보여 그제야 나이 든 티가 조금 났다.
‘태후에게 이런 위압감이 있을 줄이야.’
태후가 천천히 웃었다.
“등 공공은 총명한 편이군. 하지만 이렇게 총명한 자가 어찌 제 동생들의 처지와 다른 집안 아이의 안위를 맞바꾸었을까?”
태후가 제 가족을 언급했을 때부터 등안은 이미 이 결과를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등안은 화 귀비의 심복이었기에 이런 일을 마주해도 침착하게 상황판단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두 손을 내밀고 이마를 땅에 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마마, 소인이 잘못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고 있는 바는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태후가 만족한 듯 웃었다.
“그래. 애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을 좋아하지. 그럼 말해보게, 등 공공. 22년 전, 자네가 관저궁에서 데려간 황자는 어떻게 되었나?”
등안은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들고 태후를 빤히 쳐다봤다.
“태, 태후마마―”
“황자의 행방을 말하거라!”
태후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대량의 적황자가 분명했던 어린아이는 이미 죽고 없다는 걸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등안의 입으로 직접 듣고 확인해야만 했다.
등안은 잠시 침묵했다.
“말해!”
태후가 탁자를 탕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등안은 깨달았다. 잠들어 있는 맹수도 결국엔 맹수라는 사실을.
“소, 소인은……, 모르옵니다…….”
“모른다?”
태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등안, 애가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게. 미친 사람도, 죽은 사람도 이미 되돌릴 수 없네. 그러니 당장이라도 네 입을 찢어버릴 수 있음에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등안이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대답했다.
“태후마마, 소인은 정말 황자 전하의 생사를 모릅니다. 당시 소인이 관저궁에서 황자 전하를 안고 나온 뒤, 곧바로 나무통에 넣어 몰래 강에 던졌습니다.”
태후는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황궁의 여인이 누군갈 처리할 때, 화근을 남겨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등안, 네 주인이 그런 선심을 베풀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네만.”
등안이 고개를 들고 작게 말했다.
“태후마마, 소인은 연주(燕州) 출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