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세월에 가려진 비밀
어느 날, 정미는 채비를 마친 뒤 마차에 올라탔다.
황후에게 다음 단계의 치료를 시작하러 자녕궁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정미는 마차 안의 공기가 답답해 창발을 걷고 밖을 쳐다봤다가 깜짝 놀랐다.
‘이건 황궁으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이 길은…… 평왕의 다리를 치료해줬던 민가로 가는 길인 것 같은데!’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리를 다 치료해준 뒤에도 몇 번이고 나와 약속을 잡으려고 하더니, 거절하니까 이런 못된 술수를 써? 날 위협하려는 건가?’
정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평왕은 그저 날 겁주려는 것일 뿐,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닐 테지. 하지만 이렇게 당하는 기분은 정말 참을 수 없군.’
마차는 이리저리 돌아가더니 민가의 숨겨진 후문에 멈춰 섰다.
평왕은 간절하게 정미를 만나보고 싶어 했기에 계속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마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부가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내리시지요.”
그러나 안에선 조금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부가 당황하며 평왕을 쳐다봤다.
평왕은 정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곧바로 성큼성큼 다가왔고, 마부는 이를 보고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다.
평왕은 꿈쩍도 하지 않는 문발을 쳐다보며 마음을 가다듬더니, 손을 뻗어 문발을 살짝 걷어 올리고 최대한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셋째 소―”
안에서 자수 신발 한 짝이 나타나더니 평왕의 얼굴을 때렸다.
“도대체 어디서 온 변태냐. 감히 이 몸을 납치하다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 사부님은 국사고, 내 외조부님은 노위국공이다. 내 외숙부님은 북제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고 계시고, 내 오라버니는 서강의 변방으로 향하고 있지. 내 가족과 사부님 모두 대량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계시거늘, 감히 이 몸을 납치하다니! 정말 후안무치한 놈이군!”
마차 안에서 나온 소녀가 신발을 든 채 두 눈을 꼭 감고 평왕을 때려댔다.
평왕은 신발을 피할 생각도 못한 채 계속 얻어맞다가, 급히 머리를 감싸고 도망가며 외쳤다.
“셋째 소저, 때리지 마시오. 때리지 마시오! 본왕이오!”
신발을 든 정미의 손이 허공에 멈추더니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왕야셨군요. 어찌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평왕은 얼굴에 남은 신발 자국을 닦아내며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평왕은 그제야 화를 꾹 참아내며 설명했다.
“본왕이 몇 번이나 그대를 불렀는데 매번 거절하더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수를 썼소. 용서하시오.”
정미는 평왕의 다리를 치료해준 뒤 그의 성정과 태도가 꽤 좋아졌다는 걸 깨달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오늘은 태후마마께서 저를 궁으로 부르시는 날입니다. 약속된 시간에 늦으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이따 본왕이 늦지 않게끔 돌려보내 줄 테니.”
평왕이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정미에게 건넸다.
“이런 상태의 맥은 무슨 의미인가?”
정미는 종이를 건네받아 읽어보았다. 누가 봐도 어디서 옮겨 쓴 듯한 글씨였다.
[뚜렷하지 않은 맥박……. 희맥이 어렴풋이 느껴지나, 너무 미약하여 확진할 수 없음…….]
정미가 종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평왕이 곤란한 듯 쳐다보자, 정미가 설명했다.
“저는 부의입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부법만 알지, 이런 건 잘 모릅니다. 차라리 실력 있는 의원을 찾아가 보시지요.”
평왕이 종이를 다시 소매 안으로 넣으며 멋쩍은 듯 웃었다.
“그대가 이런 것들도 다 아는 줄 알았지.”
종이에 쓰인 맥은 화 귀비가 태자를 회임했을 때의 진맥이었다.
‘나도 오랜 시간을 들여 구한 단서이고, 이 애에게 보여주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일 줄 알았지만,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군.’
창경제가 소진 도사의 부적으로 황손을 치료하려 했던 일은 평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게다가 당시 화 귀비가 심하게 반대했다고 하니, 분명 태자의 출신에 문제가 있는 것일 터였다.
태자를 끌어내릴 생각을 하니, 평왕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
‘단 한 번도, 태자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걸 받아들인 적 없다. 여인보다 예쁘장한 외모에, 문학적 재능도 무예도 모두 평범한 자가 정말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조상님들이 쌓아온 것들을 몇 년 안에 모두 무너뜨릴 게 분명하지.’
평왕은 속이 답답해져 곧바로 마부에게 정미를 돌려보내라 명했다.
정미는 평왕을 실컷 때린 데다가 도움을 줄 필요도 없게 되자, 기분이 아주 상쾌해져 마차에 오를 때는 마부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으나, 정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 * *
궁에 들어가 태후와 인사말을 나눈 정미는 황후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태후마마, 빛이 들지 않는 방을 하나 준비해주십시오. 저와 황후마마 둘만 들어가 있을 겁니다.”
태후는 방을 준비한 뒤 미리 진정제를 먹여 잠들어 있는 황후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암실엔 순식간에 정미와 잠든 황후만 남게 되었다.
정미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황후에게로 걸어갔다.
황후는 조용히 잠든 채였고,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빗겨있어 하얗고 아리따운 얼굴이 드러났다. 평온한 그 모습엔 미친 황후의 모습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정미가 손을 뻗어 부적을 그린 뒤 황후의 미간을 톡 건드렸다.
몇 초 후, 천천히 깨어난 황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진진.”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황후는 깜짝 놀랐다.
“진진―”
온화하고 농후한 목소리엔 탄식과 슬픔이 묻어나왔다.
황후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진진, 짐의 목소리를 잊은 것이오?”
황후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황상―”
정미는 기뻐했다. 이 방법은 익숙하면서도 어두운 방 안에서 환각을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황후처럼 판단력을 잃은 환자에게 가장 효과가 좋았다.
황후는 정미의 목소리를 창경제의 목소리로 착각한 것이다.
환각 속의 황후는 제법 정신이 또렷했다. 정미가 기회를 잘 봐서 황후의 마음속 응어리만 풀어준다면, 앞으로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진진, 짐이오. 그동안 그대를 억울하게 한 것을 이제야 알았소.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 짐이 그대를 오해한 거였군.”
황후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정미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우는 황후를 느낄 수 있었고, 손을 뻗어 황후의 손을 붙잡았다.
“진진, 짐을 용서해주시오. 앞으로 예전처럼 지냅시다. 어떻소?”
황후의 손이 멈칫하더니 정미를 세게 밀쳐버렸다.
정미는 곧바로 뒤로 넘어졌다. 어깨가 탁자 모퉁이에 부딪혀 심한 고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황후가 손을 휘저었다.
“가세요, 가세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요!”
정미는 깜짝 놀랐다.
‘태후의 말대로라면 황후의 응어리는 황상의 오해일 텐데, 왜 오히려 황후를 자극하게 된 거지?’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만둘 순 없었기에, 겨우 바닥에서 일어나 고통을 꾹 참고 황후의 손을 붙잡았다.
“진진, 당장 짐을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짐이 기다리겠소.”
“절대,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아이가 죽었어요. 우리 아이가 죽었다고요!”
황후의 손톱이 정미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정미는 아파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으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진진, 공주의 일로 그대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짐도 알고 있소. 짐도 상심이 크오. 하지만 공주도 분명 하늘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요.”
황후가 정미를 밀쳐내며 고함을 질렀다.
“공주가 아니라 황자 말입니다! 황상과 저의 황자요!”
정미는 깜짝 놀랐다.
‘태후의 말로는, 황후는 공주를 낳은 적이 있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죽었다던데. 이건 어머니께도 확인한 사실이야. 어머니께서 자주 궁에 드나들 때, 공주 전하를 본 적 있다고 하셨어. 공주가 병으로 죽었을 적 황후는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어 황상께서 아주 마음 아파 하셨다고 했는데.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않더라도 공주를 황자로 착각하고 있을 리는 없어.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과거의 일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법이니. 당장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해도, 몇십 년 전의 어느 날 뭘 먹었는지까지도 또렷이 기억한다고.’
“진진, 황자는 짐도 처음 들어보네만? 황자가 어디 아픈 거요? 그럼 곧바로 어의를 불러오겠소.”
황후가 갑자기 뒤로 물러나더니 낮은 평상 위에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제 아기를 데리고 가지 마세요. 황상, 살려주세요―”
정미가 급히 다가가 위로했다.
“짐은 여기 있소, 진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시오. 그래야 짐이 그대와…… 황자를 구할 수 있소.”
황후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정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등안입니다! 화 첩여(*婕妤: 궁중의 여자 벼슬 명칭 중 하나)가 등안을 보내 우리 황자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황상, 어서 등안을 막아주세요. 관저궁엔 저와 청아뿐입니다. 저희 둘이선 절대 등안을 막을 수 없어요―”
황후가 점점 격해지자, 정미는 재빨리 부적을 그려 황후의 미간을 톡 쳤다.
황후는 천천히 평상 위로 쓰러졌다.
* * *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마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느낌이 들었다.
태후는 엉망진창이 된 정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가 급히 황후를 쳐다봤다. 그녀는 평상 위에 조용히 누워있는 황후를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었다.
“현미 도장, 도대체 무슨―”
정미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태후는 정미의 몸에 긁힌 자국이 선명히 보이자, 미안한 듯 물었다.
“황후가 긁은 자국입니까? 정말 미안하군요. 황후가 종종 힘을 과하게 쓰곤 해서……. 그럼 오늘의 치료는…….”
정미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태후마마, 시종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마마께 단독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태후가 입을 열었다.
“현미 도장, 우선 치료부터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깨에 피가 나고 있습니다.”
정미는 대답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태후마마, 황후마마께 황자가 있었습니까?”
태후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황후는 입궁한 지 2년 만에 대량의 공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약하게 태어나 6개월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버렸지요. 황후는 이 일로 몇 년 동안이나 슬픔에 빠졌고,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 번도 회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는요?”
정미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으나, 태후는 정미의 물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정미가 황후가 했던 말을 전해주자, 태후는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화 첩여가 등안을 보내 황자를 데려갔고, 관저궁엔 황후와 청아밖에 없어 막을 수 없다 했다고요?”
한참 뒤, 태후가 갑자기 정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현미 도장, 황후가 정말 그리 말했습니까?”
정미는 황후 때문에 손목이 이미 파랗게 멍들어있었던 탓에 태후가 이렇게 붙잡자 통증이 몰려와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천천히 말했다.
“예. 황후마마가 했던 말 중, 단 한 자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원래 태후마마께서 알려주신 사실을 토대로 황후마마의 응어리를 풀어드리려 했는데, 오히려 더욱 격해지셨습니다. 황후의 응어리는 황상의 오해가 아닌 것 같더군요. 아니면 그보다 더욱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