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06화 (305/375)

306화. 네가 아니면

화 귀비는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황상의 의심을 사게 된다면, 태자비가 태자에게 부정했다고 말해야겠다! 그래, 어차피 태자비는 이미 죽었어.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심지어 태자비의 죽음을 수치심으로 인한 자살이라 말하고, 나는 황실의 명성을 위해 이 추한 일을 숨겨왔다고 밝히면 돼.’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자, 화 귀비의 안색이 점점 풀렸다.

정미는 계속 화 귀비의 태도를 신경 쓰고 있었기에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화 귀비는 감정 회복이 빠른 편이구나. 역시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더뎌지기 마련인가 보군.’

잠시 후, 정동이 황손을 안고 안으로 들어와 일일이 인사를 올리고 정미와 마주 봤다.

정미는 깜짝 놀랐다.

‘저번보다 훨씬 말랐잖아. 역시 황궁은 무서운 곳이구나.’

정동은 급히 시선을 피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경제가 물었다.

“소진 도장, 준비는 끝났는가.”

“예, 황상. 왼쪽 손가락을 뻗어주십시오.”

소진 도사가 창경제와 황손의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을 뽑아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적을 그릴 땐 아무런 방해도 받아선 안 됐지만, 소진 도장은 일국의 황제는 물론 사숙인 정미를 피할 수 없어 그들의 앞에서 부적을 그려야만 했다.

다행히 모두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숨죽이고 부적을 다 그릴 때까지 기다렸다.

소진 도사는 힘겹게 몇 획을 그리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잠시 멈췄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고여덟 번을 반복하자, 소진 도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 이상해. 황상의 피는 약인(藥引)이어야 하는데, 왜 조금의 힘도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느낌이지? 이런 상황은 보통…… 황상과 황손이 혈연관계가 아닐 경우인데!’

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소진 도사는 속으로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화 귀비를 흘끗 쳐다봤다.

‘이건 저번에 태자의 심혈로 시도했을 때 실패한 것과는 달라. 태자 때는 부적을 그리는 건 성공했어. 그저 효과가 없었을 뿐! 적혈고혼법의 부적을 그리려면, 우선 약인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태자의 심혈로는 부적을 그릴 수 있었는데, 황상의 심혈로는 한 획 그리는 것조차 어렵다니……. 그럼 이 상황의 의미는…… 태자는 황손의 친부지만, 황상은 황손의 친조부가 아니라는 뜻이잖아!’

소진 도사는 이 놀라운 발견에 깜짝 놀라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고, 저도 모르게 화 귀비를 쳐다본 걸 후회했다.

‘큰일 났다. 귀비가 내가 알아선 안 되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걸 눈치챘어. 절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소진 도사는 창경제를 쳐다봤다. 그 순간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황상께 이 비밀을 알려봤자, 내 목숨만 달아나겠지.’

창경제는 소진 도사의 안색이 시시때때로 변하자 걱정하며 물었다.

“소진 도장, 어찌 되었는가?”

소진 도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오랜만에 부수를 제조한 탓에 조금 낯설었습니다.”

“음, 우리가 계속 쳐다보고 있어 소진 도장에게 방해가 된 건 아닌가?”

창경제가 내시에게 소진 도사를 칸막이 방으로 안내하라 명했다.

잠시 후, 소진 도사가 부수를 한 잔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와 황손에게 먹였다.

한참 동안 황손을 살펴보던 소진 도사가 공수하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황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창경제는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했네, 도장.”

소진 도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차마 화 귀비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핑계를 대며 현청관으로 돌아갔다.

정미는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속으론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앞으로 화 귀비가 소진 도사를 어떻게 대할지 기대되는데? 아쉽게도 소진이 겁이 나 황상께 비밀을 알리진 않았지만.’

정미는 화 귀비를 보자 더욱 아쉬워졌다.

‘만약 소진이 이 일을 들춰내고 화 귀비가 허튼짓을 하면, 내가 자연스럽게 친자 검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꺼내면 될 텐데. 음, 역시 됐어. 난 큰언니의 복수도 갚아야 하고, 나중에 오라버니와 별 탈 없이 부부가 되어야 하니까. 지금 화 귀비를 해치려다가 되레 내가 손해를 볼 순 없지. 복수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차근차근 나아가겠어. 화 귀비와 태자가 절대 벗어날 수 없게끔!’

화 귀비는 장춘궁으로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태자를 불러와 소진 도사를 제거할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하지만 소진 도사 또한 우둔한 자가 아니었기에, 현청관에 돌아오자마자 폐관수련을 알리고 방문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 * *

정미는 궁에서 나온 뒤 궁문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꾸벅꾸벅 졸 때쯤 입구로 다가오는 정철의 모습을 보았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맞이했다.

“오라버니, 드디어 나왔구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라고.”

정철이 빙긋 웃었다.

“그래, 백미재로 가자.”

그들이 백미재의 아실로 들어가자, 곧바로 반찬이 상에 차려졌으나 정미는 손도 대지 않고 물었다.

“오라버니, 아무 아내나 맞을 수 없다고 한 말, 사실이야?”

정철이 일부러 정미를 놀리려 대답했다.

“사실이야.”

정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정철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그럼 우린 어떡해?”

정철이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털어놓으려는데, 정미가 이어서 물었다.

“정식 부부가 아니더라도, 우리끼리 부부로 지내는 것도 안 되나?”

정철은 하마터면 찻잔을 엎을 뻔했다. 그가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미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앞으로 그런 말은 다신 하면 안 돼!”

‘미미와 혼인하려는 사람이 나여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미만 손해 보는 상황이잖아!’

정미가 시무룩해 있자, 정철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 아내나 맞을 수 없는 건 사실이야. 미미 너하고만 혼인할 수 있거든.”

정미는 잠시 멍해지더니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나 소리쳤다.

“날 놀린 거였구나!”

‘너무하잖아! 그런 말까지 했는데!’

정미가 정철의 팔을 꼬집으려 손을 뻗자, 정철이 그 손을 붙잡아 제 가슴에 얹으며 작게 말했다.

“사실이야. 다른 사람과 혼인하면, 여기 이곳이 고목처럼 말라버린다고.”

정미는 여태 들은 말 중 가장 감동하여 당장이라도 반어가 되어 정철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오라버니가 곧 출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다시 울적해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정말 전쟁터에 갈 거야?”

‘오라버니는 총명하니까, 가고 싶지 않다면 분명 가지 않을 방법이 있을 텐데.’

정철이 정미를 잡아당겼다.

“미미, 이리 와봐.”

정철이 정미를 창가로 데리고 가 밖을 보여주었다.

3월의 수도 거리는 아주 번화했다. 오가는 백성들의 차림새도 단정하고 깨끗해 어느 다른 곳의 백성들보다 당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는 황제의 비호 아래 사는 백성들 특유의 느낌이었다. 허영이나 교만함이라 여길 수 있지만, 어쨌든 이곳의 백성들은 이유 없이 생기가 돌았다.

마침 꽃을 파는 소녀가 창 아래로 지나가다가, 고개를 들어 창가에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방긋 웃으며 손에 든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공자님, 옆에 계신 아가씨께 꽃 좀 선물하시겠어요?”

정철이 크게 웃었다.

“그럼 붉은 장미를 몇 송이 부탁하지.”

소녀는 ‘예’하고 대답하더니 예쁘게 핀 장미를 세심히 고른 뒤, 부드러운 풀로 엮었다.

“제가 올라가서 전해드릴까요, 아니면 던져드릴까요?”

“던지시오.”

“그럼 잘 받으셔야 합니다.”

소녀는 익숙한 듯 손을 높이 들더니 정확히 정철에게로 장미를 던지곤 웃으며 외쳤다.

“15문전(文錢)입니다.”

정철이 장미를 건네받은 뒤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은조각들이 소녀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정철이 꽃을 정미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정미가 붉은 장미를 건네받고 배시시 웃었다.

“가시가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꽃이야. 고마워, 오라버니.”

정철이 창에 기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미, 봐. 지금 수도가 얼마나 번화하고 안정적인지. 하지만 변방에선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쪽 백성들은 겁에 질려있을 거야. 수도의 안전은 변방 장병들의 피와 땀으로 맞바꾼 것이지.”

정미는 끊임없이 흐르는 인파를 보며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미미, ‘둥지가 부서지면 알이 성할 리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지? 국가가 무너지면 백성들도 존재할 수 없어.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대량을 위해서라도, 오라버니는 출정해야만 해. 이해할 수 있어?”

정미가 눈을 떨궜다. 정철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전쟁터에선 생사를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아파 와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정에 무장이 그렇게나 많은데―”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겠지.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남에게 미루다 보면 대량이 위험해질 거야. 미미, 난 네 오라버니이자 연인이기도 하지만, 대량의 아들이기도 해. 스승님과 노위국공께서 가르쳐 주신 걸, 내가 공명과 출세를 위해 악용하는 건 원치 않으실 거야. 그렇지?”

정미가 눈을 들어 정철을 쳐다봤다.

“오라버니도 그러고 싶지 않은 거지?”

정철이 따뜻하게 웃었다.

“응. 오라버니는 더욱 그러고 싶지 않아. 내가 배운 걸 대량을 위해서, 대량의 백성들을 위해서 최대한 펼쳐보고 싶어. 그리고 그렇게 세운 공훈으로 광명정대하게 너와 혼인하고 싶고.”

“알겠어. 어쨌든 대량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고 싶다는 거지?”

정미가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어쨌든 간에, 난 계속 오라버니를 기다릴 거야. 절대 오라버니를 방해하지 않을게.”

“걱정 마. 돌아올 자신 있으니까. 안심하고 기다리면 돼.”

* * *

그렇게 사흘 뒤, 정철은 참의(參議)의 신분으로 수도를 떠나게 되었다.

정철을 보내는 날, 정미는 밤을 꼬박 새워 만든 호신부(*護身符: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몸에 지니는 부적)를 정철에게 쥐여주며 웃었다.

“오라버니, 돌아오면 사슴고기 전골을 해 먹자.”

“응. 약속할게.”

정철은 말에 올라 고개를 돌려 가족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3월 말의 이른 아침은 아직 쌀쌀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화서가 피풍을 여미며 정미 곁으로 다가갔다.

“돌아가자.”

“응.”

정미는 조금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한 씨는 그런 정미의 모습을 보고 마차에서 꾸짖었다.

“이 독한 녀석, 네 둘째 오라버니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것 같구나.”

정미가 빙긋 웃었다.

“오라버니가 출정했으니 서강의 오랑캐들쯤이야, 식은 죽 먹기죠. 돌아가서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마실 술이나 직접 담그려고요.”

‘언제 어디에 있든, 결국 오라버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술을 담글 줄도 아니?”

한 씨가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큼큼, 곧 있으면 매실을 수확할 때잖아요. 그때쯤 주점에 가서 좋은 술을 사온 뒤, 매실만 넣으면 되죠.”

‘그런 잔머리를 쓴다고?’

한 씨는 갑자기 이런 딸을 시집보내기엔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철이 곁에 없는 나날은 정미에겐 억겁의 시간과도 같았다.

낮엔 부법 연구에 몰두했지만, 밤에 잘 때가 되면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