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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304화 (304/375)

304화. 알현

“희맥?”

창경제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덕소 장공주를 쳐다봤다.

늘 씩씩하고 쾌활하던 덕소 장공주도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형, 들으셨습니까?”

‘그럼 꿈은 아니구나!’

창경제가 태의들을 쳐다보더니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정말 희맥이더냐?”

황상의 말투에 기쁨이 가득 묻어나오자, 태의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벌벌 떨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맥이 뚜렷하지 않아 완전히 확신할 순 없사옵니다.”

창경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확히 말하라!”

태의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그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황상, 소신들은 도저히 확진할 수 없습니다. 1개월 뒤 다시 장공주 전하의 맥을 짚는 게 어떨까 싶사옵니다.”

“황매, 이를 어찌―”

창경제가 덕소 장공주를 쳐다봤다.

그런데 덕소 장공주는 초점 나간 눈으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말했다.

“황형, 지금 당장 미를 불러와야 합니다!”

창경제는 덕소 장공주의 흐트러진 모습에 깜짝 놀라며 급히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어서 앉거라. 홑몸도 아닌데 조심해야지. 이 부분은 너보다 짐이 겪은 바가 더 많으니.”

주홍희가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황상, 언제 회임을 겪어보셨단 말입니까?’

그러고는 눈을 돌려 태의들을 쳐다보자 태의들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덕소 장공주는 창경제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고 말했다.

“그래, 그렇지요. 황형은 여러 번 겪어보셨지요. 어서 미를 궁으로 불러주세요.”

“미?”

창경제는 장공주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국사의 제자, 현미 도장 말입니다!”

덕소 장공주는 정미를 정식 제자로 받지도 않았고, 선 태자비 정아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고모’라 부르라 했기에, 사제 간의 정은 당연히 없었다. 때문에 평소에도 정미를 도호로 부르지는 않았다.

“이게 현미 도장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창경제는 점점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덕소 장공주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채였고, 창경제를 붙잡은 손은 벌벌 떨고 있었다.

“최근 그 애가 계속 제 몸을 관리해주고 있었단 말입니다!”

창경제는 깜짝 놀랐다.

귀를 바짝 세우고 있던 태의들도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현미 도장이 덕소 장공주의 불임증까지 치료했단 말인가? 장공주의 회임이 천운이 아닌 의술의 도움 덕분이라면 기적이나 다름없다!’

“주홍희, 어서 현미 도장을 모셔오거라.”

“예.”

“네가 직접 모셔오거라!”

주홍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러났다.

창경제가 태의들을 훑어보며 손을 내저었다.

“너흰 이만 당직하러 돌아가거라.”

그러나 태의들은 발에 뿌리라도 돋은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응?”

창경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의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황상, 소신들도 여기 남아 현미 도장께서 장공주 전하께 진단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다른 태의도 말했다.

“황상, 노신은 예전에 장공주 전하께 진료를 봐 드렸던 태의 중 하나입니다. 당시 장공주 전하껜 회임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노신이 여기 남아 현미 도장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태의들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자, 창경제는 윤허해주지 않으면 제가 악독한 황제라도 될 것 같을 느낌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 남도록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창경제는 몰래 입을 삐죽였다.

‘윤허해주면 성은이 망극하고, 해주지 않으면 무정한 황제인가? 비위 맞추기도 정말 짜증 나는군!’

* * *

정미는 평왕의 일을 해결한 뒤, 곧바로 짐을 챙겨 현청관으로 돌아가 지내고 있었다.

현청관에서 지내는 동안은 정미 스스로가 속세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면 그 누구도 속세의 일로 정미를 찾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황가의 일은 달랐다.

“황상께서요? 공공, 잠시 기다려주세요.”

잠시 후, 정미가 새것 같은 청색 도포를 입고 나와 주홍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주홍희는 침착한 정미의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덕소 장공주께서 궁에 오셔서 황상의 기분이 좋습니다.”

정미는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가 이내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 웃으며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공.”

“도장께서 감사하실 일이 아닙니다.”

주홍희는 마땅히 존중해야 할 사람에겐 절대 자존심을 부리지 않았다. 이것이 창경제 곁에서 오랫동안 신임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현청관의 부지는 꽤 컸기에, 그 안을 다닐 때도 마차나 가마를 타곤 했다. 두 사람은 반 시진이나 걷고 나서야 현청관 대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정미는 그곳에서 단정한 차림새의 소진 도장을 마주쳤다.

“소진 사질, 어디 가는가?”

정미가 차갑게 물었다.

정식으로 청령진인의 제자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기에 현청관의 사람들 모두가 소진 도장에 대한 정미의 차가운 태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참견할 수 없었다.

소진은 정미를 보고 몰래 이를 갈았다.

정미가 현청관에 들어온 이후로, 소진은 스승님의 명령 때문에 억지로 현청관에 틀어박혀 수련하고 있었다. 근 1년 동안 외출하지 못한 건 다 눈앞의 정미 탓이었다. 어렵사리 다시 자유를 되찾았는데, 또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었다.

“사숙을 뵙습니다. 소진은 귀비마마께 경전을 읽어드리러 궁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소진이 아무리 정미를 싫어하더라도 결국 공손한 태도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길이었군. 동행하겠는가?”

소진 도사가 급히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귀비마마께서 보내신 가마가 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나중에 만나지.”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북명 사형이 왜 또 저것을 풀어주셨지? 기회를 봐서 현청관에서 쫓아내 버려야겠어!’

* * *

궁에 도착한 정미가 창경제에게 절을 올리려 하자, 창경제가 막았다.

“현미 도장, 어서 장공주의 진료를 봐주게!”

“예.”

정미가 공수하고는 덕소 장공주 곁으로 다가갔다.

“흠…….”

정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덕소 장공주는 왠지 불안해져 차마 입을 열지도 못했다.

장공주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남들과 다름없이, 한 줄기 희망이 생기면 잃을까 불안해하는구나.’

그때 정미가 인상을 피며 미소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덕소 장공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 말은―”

“회임하신 지 보름 정도 되셨습니다. 어서 앉으세요, 전하. 전하의 연세와 몸 상태를 고려하면 주의해야 할 게 아주 많습니다. 회임 기간 동안 특별히 신경 쓰셔야 할 겁니다.”

정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태의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도장,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도장, 맥도 짚지 않으시는 겁니까?”

“도장―”

창경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두 썩 나가거라!”

순식간에 쫓겨난 태의들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구경하게 해준다며?’

‘인자한 황제는 어디 가고?’

‘황상,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현미, 보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알아본 겐가?”

태의들을 쫓아낸 뒤, 창경제가 곧바로 다가와 물었다.

정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부의는 평범한 의술과 다릅니다. 저희는 맥을 짚지 않고 사람의 얼굴 곳곳에 나타난 세세한 변화를 봅니다.”

창경제가 눈을 끔뻑였다.

‘전혀 못 알아듣겠군. 역시 국사의 제자는 달라.’

“황매, 현미가 이리 말하니 잘 쉬고 있으시오. 앉을 수 있는 상황엔 서 있지 말고, 누울 수 있는 상황엔 앉아있지 말고.”

충격과 기쁨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덕소 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황형, 너무 과합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정미가 끼어들었다.

“전하, 황상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전하의 연세에 첫 아이이고, 아직 자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걸 고려하면, 언제든 하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누워계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누워있으라고?”

“예, 필요한 활동 외에는 침상에 누워 계세요. 최소한 3개월은 누워계셔야 합니다.”

덕소 장공주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먹고 싸는 것 외에는 시체처럼 침상에 누워있으란 말 아닌가.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부마도 곧 수도를 떠나야 하는데, 나와 장기를 둬줄 사람도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덕소 장공주는 눈앞이 캄캄해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창경제는 장공주의 심경을 눈치챈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황매, 이런 상황이라면 역시 부마는 수도에 남는 게 좋겠군. 배 속의 아이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니.”

덕소 장공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창경제가 수염을 매만졌다.

“아직 명도 내리지 않았는데 뭐가 정해진 일이란 말이냐? 걱정 말거라. 조정의 문무백관 중에 적당한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 같으냐? 지금 네 배 속의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다. 부마와 네 혈맥이 이어지는 걸 볼 수 있다면, 짐은 그 무엇보다도 기쁠 것이다.”

덕소 장공주가 뭔가 말하려고 하자, 창경제가 이어서 말했다.

“그럼 짐이 곧바로 부마를 궁에 불러올 테니, 그의 의견을 듣도록 하지.”

잠시 후 궁에 도착한 고 선생은 급히 창경제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바람처럼 덕소 장공주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으려다가, 혹시라도 배 속의 아이가 부서질까 봐 멈칫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운조, 그게 정말입니까?”

“예.”

덕소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얼굴에 수줍은 기색이 스쳤다.

“잘 됐군, 정말 잘 됐어! 그대라면 해낼 줄 알았습니다!”

“큼큼!”

덕소 장공주가 새빨개진 얼굴로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고 선생은 제 말실수를 깨닫고, 급히 창경제와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 정미 덕분이지요.”

덕소 장공주는 몸조리를 하고 있었단 사실을 숨겨왔기에 그제야 고 선생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고 선생은 덕소 장공주의 이야기를 들은 뒤, 정미 앞으로 걸어가 갑자기 큰절을 올리려 했다. 정미는 깜짝 놀라 옆으로 숨어버렸다.

“둘째 오라버니가 알면 저를 꾸짖을 겁니다. 그러지 마세요.”

고 선생이 웃었다.

“그 일과는 다르다. 우리 부부에게 아이를 선물해주었는데, 내 절을 받아 마땅하지.”

고 선생이 창경제를 쳐다봤다.

“황상, 저희 같은 상황에 운조에게 아이가 생겼으니, 소신이 이번엔 욕심을 부려야겠습니다.”

창경제가 뿌듯한 눈빛으로 덕소 장공주를 쳐다봤다.

“부마와 짐의 의견이 같을 줄 알았네.”

덕소 장공주가 저를 구하려다 불임의 몸이 된 이후, 창경제는 늘 자책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이렇게 아이가 찾아왔으니 창경제에게도 몹시 기쁜 일이었다.

“부마, 그럼 위무행을 보조할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흠…….”

고 선생이 잠시 고민하더니 몇 사람을 추천하고는 말했다.

“소신은 이자들이 적합한 것 같습니다. 이 중 누굴 선출하실지는 황상과 대신들께서 결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창경제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나쁘지 않군.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상의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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