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다리가 완치되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평왕은 하도 입술을 씹어 얇은 살이 다 터질 지경이었지만, 기어이 자존심을 세우려 결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정미가 잘 접은 새하얀 손수건을 건네자, 평왕이 멈칫했다.
“물고 계세요. 혀를 다치면 또 부수를 만들어야 하니.”
평왕은 손수건을 건네받고 입안에 쑤셔 넣었다.
정미는 다양하게 일그러지는 평왕의 표정을 가만히 감상했다.
반주향 뒤, 마침내 평왕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어떠세요?”
정미가 평왕의 발목을 주무르며 물었다.
평왕이 손수건을 뱉어내고 씁-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아프다.”
“반 시진 정도 냉찜질을 한 뒤 걸어보십시오.”
정미는 처치를 마친 뒤, 태사의에 앉아 눈을 감고 쉬었다.
평왕은 고개를 숙여 차가운 수건이 감싸진 발목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유독 흐르지 않는 것 같자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말 이걸로 된 것이냐?”
“이따 걸어보시지요.”
정미는 눈을 뜨고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눈을 감았다.
평왕은 입술을 떨다가 정미를 따라 눈을 감았다.
부법을 복습하다 보니 정미에게 반 시진이라는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정미는 다시 눈을 뜬 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있는 평왕을 보고 말했다.
“왕야, 걸어보시지요.”
평왕이 눈을 떴다. 아까의 다급한 모습은 어디 가고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미는 평왕의 비위를 맞춰주기도 귀찮다고 생각해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한편 평왕은 매우 복잡한 심정이었다. 완치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불안하고 두렵기만 한데, 옆에 있는 사람은 그를 달래주지도 않으니. 평왕은 정미를 몇 번이나 노려본 뒤 벌떡 일어나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눈에 기쁨이 차오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걸음 더 내딛어보았다. 그렇게 두 걸음 뒤, 가슴 속에 감격과 기쁨이 물밀 듯 차올라 방 안을 성큼성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미는 그 모습을 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평왕을 무사히 치료했으니, 앞으로 저자가 태자를 끌어내리는 일만 남았군.’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 정미가 고개를 들어보자, 평왕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 나았구나!”
“축하드립니다, 왕야.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미가 일어나 뒤돌아섰을 때, 평왕이 갑자기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한 바퀴 돌았다.
“다 나았구나, 다 나았어! 하하하―”
정미는 수치스럽고 화가 나 평왕의 무릎을 퍽 찼다.
평왕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고, 정미는 기회를 틈타 그의 손에서 벗어나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평왕은 똑바로 서서 조심스럽게 맞은 다리를 어루만지더니 정미를 노려봤다.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켜 신발창을 평왕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호의는 제가 베풀어드렸지요. 그럼 저는 이만!”
정미가 소매를 뿌리치고 나갔다. 평왕은 그녀를 쫓아가려다 참았다.
‘됐다. 이제 다리도 다 나았으니, 국사의 제자인 정가 셋째에게 신중히 대해야지.’
평왕이 웃음을 지었다.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지금의 날뛰는 기쁨을 넘어설 수 없었다. 나은 건 다리뿐인데 온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평왕은 아예 목욕까지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말끔한 모습으로 평왕부로 돌아갔다.
* * *
낮이었지만, 평왕부는 아주 조용했다.
그것은 주인의 변덕스러운 성정 때문에 자연스레 형성된 분위기였다.
평왕부의 사람들은 이미 이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했다지만, 평왕은 오히려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평왕은 귀신처럼 소리 없이 돌아다니는 여종들도 싫었고 늘 두려운 눈빛으로 몰래 그를 훔쳐보는 하인들도 싫었다.
그들은 평왕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평왕은 꾸짖기도 귀찮았을 뿐이었다.
심지어 나무 위에 앉은 새들도 다른 곳의 새보다 조심스럽게 지저귀는 것 같은 느낌에, 평왕은 집안이 더욱 쌀쌀하다고 느꼈다.
다리가 다 나았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평왕은 갑자기 그 고집스럽고 이상한 소녀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감정 표현이 솔직한 아이였다.
평왕은 언젠간 저도 그렇게 제멋대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집 안을 몇 바퀴나 돌아도 도저히 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표정도 관리해야 했고, 심지어 걸음걸이도 예전처럼 걸어야 했다.
평왕은 후원으로 향했다.
아직 혼인하지 않았기에 후원에도 시첩은 별로 없었다.
그는 여인과 동침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평왕은 그의 격한 마음을 진정시켜줄 여인이 필요했다.
사내에게 권력을 쟁탈할 자격이 생기면 여인을 정복하고픈 마음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평왕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왕은 그렇게 며칠 내내 화류계에 머물며 그간 쌓인 감정을 풀고 다녔고, 심지어 불억루까지 가 한창 인기 많은 아가씨를 선택해 애정 행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평왕의 손가에 평범한 보따리가 놓이게 되었다.
평왕은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표정을 굳히더니 옆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여인의 멱살을 쥐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이냐?”
여인이 눈을 뜨고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이걸 가져다 놓았냐 물었다.”
평왕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여인은 순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공자님, 놓아주세요.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 공자님의 물건 아닌가요?”
“정말 모른단 말이냐?”
평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을 빤히 쳐다봤다.
여인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켈록켈록, 소인은 정말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공자님, 어서 놓아주세요. 이러다 질식하겠습니다.”
평왕이 옅게 웃었다.
“모른다니 다행이군.”
평왕이 씨익 웃더니 갑자기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여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손발을 휘저으며 발버둥 치다가 점점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평왕은 손을 놓은 뒤 얇은 옷을 아무렇게나 여인 위에 던지고는 그제야 보따리에서 종이를 꺼내 입안에 넣고 삼켰다.
불억루의 아가씨가 죽었다는 소식에 동랑이 급히 쫓아와 평왕을 나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그러자 평왕은 품에서 은표를 꺼내 동랑의 손에 쥐여주었다.
동랑이 고개를 숙여보더니 순간 멈칫했다.
“그리 유명한 기생도 아니라고 하던데, 일만 냥이면 되겠지?”
평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랑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제 가도 되겠느냐?”
동랑이 한 걸음 다가가 평왕의 길을 막아섰다.
평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부족한 것이냐?”
동랑이 피식 웃었다.
“충분하지요. 어찌 부족하겠습니까. 그 아이의 하룻밤은 은 십 냥인데, 공자님의 일만 냥으로는 평생을 살 수 있지요.”
“그럼 왜 비키지 않는 것이냐? 나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너와 실랑이 할 시간 없어!”
동랑이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유는 말씀해 주셔야지요.”
“이유?”
평왕이 눈썹을 치켜뜨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시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 몸의 기분을 망쳤다. 이제 되었느냐?”
동랑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지만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관아에 사람을 보냈으니, 나리들이 이 상황을 정리해주실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시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무렇지 않게 불억루 아가씨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일이 지속되면 불억루도 장사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평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눈치 없는 기생이 있을 줄이야. 괜히 내게 시비를 걸다니!’
“이 청루의 주인은 누군가? 솔직히 말해보거라. 내 그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테니.”
평왕이 차갑게 말했다.
동랑은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부유하고 귀한 신분인지 눈치챘지만, 눈도 똑바로 감지 못하고 죽은 기생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럼 잠시 기다리시지요. 주인어른을 모셔오겠습니다.”
* * *
“그자는 방 안에 있는가?”
중년 사내가 급히 찾아와 동랑에게 물었다.
동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말했다.
“후야, 신분이 꽤 높은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분이 높더라도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러선 안 되지요. 이 일을 그냥 넘어가면, 불억루는 마음 놓고 손님들을 받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게 생각이 있으니 일단 만나보고 나서 얘기하마.”
중년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을 보고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중년 사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평―”
평왕이 경고하듯 노려보자 사내는 급히 말을 삼켰다.
“평 형이셨군요.”
평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누가 불억루의 주인인가 했더니, 성의후(誠意侯)였군. 불억루가 훌륭한 이유가 있어.”
“과찬이십니다.”
성의후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고 싶었지만 옆에 동랑이 있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동랑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곧 슬픔이 물밀듯 치밀어 올랐다.
‘내 생각보다 더 높은 신분인가 보구나. 후야의 굽실거리는 모습이란…….’
성의후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수도에서 평왕의 포악한 성정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기생 하나쯤이야, 조정의 관원을 때려죽인들 누가 그를 말릴 수 있을까. 귀족의 범법행위를 어찌 평민과 동일 선상에 둘 수 있단 말인가?’
평왕은 성의후의 눈치가 마음에 든 듯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아무 말 없는 동랑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후야, 그대의 불억루는 참 좋은 곳이오. 하지만 이 기생은 그리 영리하지 않은 것 같군.”
“예, 예. 제가 잘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평 형, 겨우 이런 기생과 상종하지 마십시오.”
평왕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두 걸음 걸어가더니 멈춰 서서 말했다.
“당연히 상종하지 않지. 하지만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했으니, 기분이 몹시 좋지 않군. 어찌할 텐가?”
평왕이 동랑을 훑어봤다.
성의후의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기가 차갑게 굳더니 평왕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왕야, 사실 남안왕께서 저희 불억루에 차를 드시러 올 때마다 동랑을 찾으시곤 합니다.”
평왕이 허리를 똑바로 펴고 의아한 눈빛으로 동랑을 쳐다봤다가 피식 웃었다.
“내 숙부님과 친한 여인이었군. 그럼 그냥 넘어가고 나는 우선 가보겠네.”
“감사합니다, 평 형. 감사합니다.”
성의후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왕은 발을 절뚝이며 밖으로 나가다가 동랑의 곁에 멈춰 서서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동랑은 성의후를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 공자님께서 저자의 숙부님이라고요?”
성의후가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래, 이 정도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구나. 동랑,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성질 좀 죽이라고. 그러다 큰일 나겠다.”
그러고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평왕을 쫓아갔다.
동랑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다가 낮게 탄식했다.
“이런 곳에서 성질마저 죽이고 살면 무슨 재미가 있다고.”
동랑의 머릿속에 남안왕의 따뜻한 웃음과 방금 그 사람의 험악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왠지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