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본왕은 고통이 두렵지 않아
정미가 멀리 떠나갈 때까지도 임랑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정철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탁상을 쿵쿵 두드렸다.
“석근, 뭘 보나?”
임랑은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정색한 친우의 얼굴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
“예전엔 아무 욕구도 감정도 없어 보이더니, 이런 질투쟁이일 줄이야. 난 그냥 방금 네 동생이 말한 ‘조 언니’가 누군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아까 술을 돌릴 때 자세히 봐둘 걸 그랬네.”
정철이 임랑을 흘끗 흘겨보며 생각했다.
‘그때 그렇게 음흉하게 쳐다봤으면, 지금 미미가 굳이 찾아오지도 않았을걸.’
정철은 정미가 찾아온 이유를 대략 짐작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공부(工部) 조 시랑부의 다섯째 아가씨야.”
“어쩐지. 공부 집안이라 그렇구나.”
임랑이 다가와 헤죽 웃었다.
“청겸, 몰래 눈짓해줘. 도대체 누군데? 그런 장난감을 만들 수 있는 여인이라니, 궁금해서 그래.”
정철이 밖을 내다보더니 작게 말했다.
“저기, 동백꽃밭 옆에 노란 치마를 입은 아가씨 보여? 저 아가씨야.”
붉은 동백꽃 사이로 노란 치마를 입은 여리여리한 몸매의 소녀가 보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옆의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의 용모는 아름다웠고 웃는 얼굴은 상큼해 보이면서도 열아홉 남짓한 아가씨 특유의 침착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임랑은 왠지 가슴이 뛰어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어때?”
임랑이 정철을 황망히 쳐다봤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어떻긴 뭘. 호기심에 쳐다본 것뿐이야. 큼큼, 계속 아가씨 얘기만 하는 것도 좀 그렇군. 차나 마시자고.”
정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녀석, 불억루의 기생을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 *
정미는 조청공에게 들은 정보를 알려주기도 전에 다섯째 공주에게 붙잡혔다.
“고모님의 말씀으로는 대량과 서강의 전쟁이 일어나면 고모부님이 군사(軍師)로 출정하셔야 한대.”
다섯째 공주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했다.
“고모님이 우시는 걸 몰래 봤는데, 마음이 아파.”
“장공주께서 우셨다고요?”
정미는 깜짝 놀랐다.
정미의 기억 속 덕소 장공주는 굳세고 시원한 성정이라 이런 일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공주의 둥근 얼굴이 구겨졌다.
“아이를 낳지 않은 걸 아쉬워하셨어. 내가 부황께 나를 고모님의 양녀로 보내 달라 부탁하는 게 어떨까?”
정미가 이마를 짚었다.
“그리 좋진 않은 것 같아요.”
“응?”
“보통은 아들을 양자로 들이지, 여자아이를 양녀로 들이는 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요. 게다가 전하는 공주잖아요.”
다섯째 공주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어쨌든 내겐 모비도 없고 대부분 고모님께 무술을 배우며 자랐는걸. 고모님께 딸이라도 있으면 덜 괴로우실까 해서.”
“장공주께서 아쉬워하시는 이유는 아마 고 선생의 혈맥을 잇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정미는 문득 뭔가 떠올라 공주에게 물었다.
“제가 장공주 전하의 안색을 봤을 땐, 회임이 불가능한 몸이 아니었는데 왜 아이가 없었을까요?”
다섯째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차마 물어보진 못했는데, 젊은 시절 부황을 구하려다 다치셨다고 들었어.”
‘그럼 칼에 자궁을 다친 건가?’
“제가 내일 현청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장공주 전하를 뵈러 가는 건 어떨까요?”
정미의 제의에 다섯째 공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국사의 제자가 된 이후로, 대부분 현청관에서 지내느라 고모님께 무술을 배운 지도 오래되었잖아.”
그렇게 다음 날, 정미는 장공주부의 화원에 있는 정자에서 덕소 장공주를 만났다.
장공주는 마침 고 선생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 생기발랄한 그 모습에선 다섯째 공주가 말한 아쉬움과 괴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음, 잘못 둔 것 같군요. 다시 두겠어요.”
고 선생은 장공주의 장기 실력에 이미 적응된 듯 조용히 장기말을 거둬들였다.
장공주가 다시 장기말을 내려놓더니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됐습니다.”
고 선생이 아무렇지 않게 다음 수를 놓았다.
장공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상대방의 장(將)을 먹는 것 외에는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장공주는 잠시 장기판을 노려보다가 눈을 반짝이더니 옆에 있던 사(士)를 집어 고 선생의 장을 먹었다.
“이겼다!”
고 선생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운조, 그대가 든 사는 내 장기말입니다. 내 장기말로 내 장을 먹다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부마가 정미의 앞에서 무정하게 저를 비판하자, 장공주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잠입시킨 장기말입니다!”
고 선생은 어이가 없었다.
덕소 장공주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오래 기다렸지. 내가 쾌도난마(快刀亂麻)하게 부마를 이겨서 다행이야. 가자, 연무장에서 한 바퀴 달려보자꾸나. 네 승마가 여전한지 봐야겠다.”
정자에 남은 고 선생은 생각했다.
‘쾌도난마라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연무장으로 가는 길, 정미는 시녀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걸 보고는 덕소 장공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작게 말했다.
“고모님, 제가 부의에 입문했잖습니까. 저는 그중 태산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거든요. 최근 불임에 대해서도 깨우쳤는데, 한 번 봐 드리는 건 어떨는지요?”
덕소 장공주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꼼짝 않고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담담하게 그녀와 마주 보았다.
덕소 장공주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차분함을 되찾았다.
“우선 한 바퀴 달리고 나서 얘기하자꾸나.”
정미는 덕소 장공주도 함께 승마를 겨룰 줄은 몰랐다.
정미의 흑마가 숨넘어갈 듯 달려도 장공주가 종점에 다다른 지 한참 뒤에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다섯째 공주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고모님의 승마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훌륭하십니다.”
덕소 장공주가 웃었다.
“면면이 네가 바로 청출어람의 좋은 예지. 헌데 정미는―”
정미가 멋쩍게 웃었다.
“가자, 승마의 요점을 좀 알려줘야겠구나. 면면, 넌 계속 연습하고 있거라.”
방 안으로 들어온 뒤, 덕소 장공주가 시녀를 내보내더니 정색하며 물었다.
“미야, 아까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
정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고모님, 저는 사실 쌍둥이였답니다. 어머니께선 저와 제 쌍둥이 형제를 낳을 때 난산을 겪어 다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셨고요. 제가 부의를 배운 뒤, 늘 어머니를 치료해드릴 수 있길 바라왔지요. 어머니의 여한을 풀어드리는 셈으로요.”
“그럼, 한 부인을 치료한 게냐?”
“아니요. 어머니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욕을 얻어먹고 쫓겨났습니다. 이혼까지 했는데 치료할 필요가 어디 있냐고요.”
덕소 장공주가 웃었다.
“그럼 네 말은, 나를 실험대상으로 쓰겠단 뜻이냐?”
정미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불임 치료는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장공주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미에겐 확신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는 태산과만큼은 조금만 연구해도 쉽게 통달할 수 있었다. 치료해본 적이 없더라도 각 단계의 효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해보거라.”
덕소 장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밝은 유리창 너머의 해당화 나무 위에서 지지배배 거리는 새 한 쌍을 쳐다봤다.
“되든 안 되든 상관없으니, 이 일은 비밀로 해주거라.”
“그건 당연하지요. 그럼 바로 진료를 보겠습니다.”
망진한 후, 정미가 장공주에게 상의를 걷어 올려 젊은 시절의 상처를 보여 달라 눈짓했다.
장공주는 잠시 망설이더니 옷을 걷어 올렸다. 옥처럼 매끈한 복부에 지네만한 흉터가 남아있었다.
정미가 손을 뻗어 흉터를 살짝 건드리고는 장공주를 쳐다봤다.
장공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베였을 때 내장까지 흘러나왔었는데 내가 다시 집어넣었지. 명줄이 길었던 게지.”
“정말 명줄도 길고 복도 많으십니다. 앞으로도 행운이 있을 거예요.”
정미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덕소 장공주 같은 여인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와 같은 아가씨들이 규각에서 시를 읽고 자수를 놓을 때, 덕소 장공주는 전쟁터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으며 백성의 안위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장공주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했다. 자궁이 유착되어있었고 심지어 위축되어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미가 손을 뻗어 꾹꾹 눌러보았다.
“아프십니까? 뭔가 빠지는 느낌은 없으시고요?”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미가 다시 물었다.
“달거리가 일정하지 않지요?”
장공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가 손을 내려놓고 장공주에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라 눈짓했다.
정미의 표정이 무겁자, 장공주가 물었다.
“할 수 있겠느냐?”
정미가 솔직히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단 복잡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가장 좋은 효과를 보진 못하더라도 지금보단 나아질 겁니다.”
덕소 장공주가 웃었다.
“그럼 마음껏 해보거라. 네 말대로 지금보다 나빠지진 않을 테니.”
장공주가 흔쾌히 대답하자, 정미는 부담감이 덜어져 우선 부수 한 잔을 만들어 장공주에게 바쳤고 며칠 뒤 효과를 보기로 했다.
* * *
어느 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가마가 위국공부의 후문 담 모퉁이에 멈춰 서있었다. 정미는 몰래 그 가마에 올라탔다.
가마는 이곳저곳을 누비더니 마침내 평범한 민가 옆에 멈춰 섰다.
그곳은 바로 정미가 평왕의 다리를 치료해줄 장소였다.
“바지를 걷어보십시오.”
소녀가 낮은 평상 옆의 작은 걸상에 앉아 무표정으로 말했다.
평왕은 얌전히 바지를 걷어 올려 길고 고운 다리를 드러냈다.
겉으로만 보면 발목에 있는 연한 흉터들 외에는 절름발이인 것이 전혀 티 나지 않았다.
정미는 특수한 안마법으로 평왕의 발목을 주물렀다.
종아리에서 따뜻함이 전해져오더니 땡땡해지는 느낌이 났다.
평왕이 결국 참지 못하고 정미를 쳐다봤다.
확실히 다리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걸을 때처럼 무거운 돌이 달려있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 계집, 정말 꽤 능력이 있었군. 그렇담 나중에 황제가 됐을 때, 어찌 이 아이를 밖에만 둘 수 있겠는가!’
정미는 평왕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오늘 유난히 얌전하자 손을 내려놓은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이제 가서 왕야께 드릴 부수를 조제 해오지요.”
정미가 칸막이 방으로 들어간 뒤, 평왕은 칸막이 방의 문발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정미는 반 시진 뒤에야 방에서 나왔다.
“오늘은 좀 오래 걸리는군.”
평왕이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부수이니, 당연히 이전의 것보다 조금 다르지요.”
정미의 설명에 평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걸 마시면 내 다리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냐?”
정미가 몰래 입을 삐죽였다.
‘정말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니까. 덕소 장공주께선 나빠져봤자 현 상태이니, 마음껏 치료하라고 하셨는데. 평왕은 치료할 수 없다는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아.’
“확실치 않습니다. 만약 이 부수를 드시고도 완전히 좋아지지 않으면 앞선 단계들을 다시 시도해야 합니다. 어쨌든 점점 나아질 겁니다.”
“음.”
평왕이 잔을 건네받았다.
“아, 이번 부수를 드시면 복사뼈 쪽의 경맥이 끊어졌다가 다시 붙을 겁니다. 꽤 아플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잔을 쥔 평왕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릴 적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정미가 입을 삐죽였다.
‘평왕은 남들에게나 포악하지, 사실은 약한 사람이구나. 마시기도 전에 겁을 내다니.’
평왕이 눈을 뜨자, 정미의 눈빛을 눈치채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거라. 본왕은 고통 따위 두렵지 않으니!”
‘내가 두려운 건 어릴 적의 내가 울고 불며 발버둥 쳐도 무표정으로 내 발목을 그어버리던 모비지.’
“어서 드세요.”
소녀가 무성의하게 말하자 평왕이 이를 갈았다.
“정말 두렵지 않다고!”
“예, 예. 믿을게요. 이제 드실 거예요?”
‘역시, 어떻게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꼭 있다니까!’
평왕은 잔을 들고 끝까지 들이킨 뒤 일부러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차분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그때 평왕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떨었다.
정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이 클수록 효과도 좋은 법이지. 평왕과 실랑이하던 나날들도 드디어 끝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