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임랑을 시험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연말이 가까워지자 국공부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선물을 준비하며 북쪽의 소식도 계속 염두에 두어야 했다.
승보(勝報)는 정월 초사흗날이 되어서야 수도에 전해졌다. 이번 승리는 떨어진 사기를 충분히 회복시켰다. 하지만 북제군은 흉포한 무리들이었기에 한두 번 물러나게 한 것으로 전쟁이 끝날 리는 없었다. 때문에 위국공은 여전히 북쪽에 머무르고 있었다.
창경제는 위국공부에 큰 포상을 내렸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올해의 세공(歲貢) 중, 서강이 보내온 것이 없었던 것이다. 서강의 사자가 말하길, 왕후를 잃은 뒤 서강왕이 몹시 상심해 다른 일을 처리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분명 서강이 까불기 시작한 거겠지.’
창경제의 예상대로, 정월 대보름이 되자 서강이 다시 사자를 보내와 공주와의 혼인을 요청했다.
온 조정이 떠들썩해지고 신하들은 또다시 시끌벅적하게 논쟁하기 시작했다.
한쪽은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북제와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서강과의 분쟁이 시작되면 대량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므로, 그들은 서강의 요구에 따라 공주를 보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대량의 안위를 연약한 여인에게 책임지게 할 순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량의 사내들은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닐 것이며, 우선 거절한 뒤 서강의 행동에 따라 대응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후자는 사람이 적어 기세도 약했고 심지어 몇몇 노신들이 뭣도 모르는 청년들이라 욕을 퍼붓자, 창경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보수파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정미는 다섯째 공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량의 공주 중, 적령기인 사람은 다섯째 공주뿐이었다.
하지만 다섯째 공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그날 창경제가 어서재로 중신들을 모아 이 일을 상의할 때, 다섯째 공주가 미리 허락을 구한 뒤, 동으로 만든 200근짜리 망치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정색하며 창경제에게 말했다.
“부황, 제 이빨을 보십시오. 혼인한다 한들, 서강왕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겠습니까? 분명 부황의 딸인 저를 냉대하겠지요. 그러다 저도 둘째 언니처럼 젊은 나이에 조용히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창경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제 딸을 쳐다보다가 딸이 든 망치를 조용히 쳐다봤다.
공주가 망치를 쿵 내려놓자 청옥 바닥에 진동이 느껴졌다. 늘 조용하고 과묵했던 공주가 뜻밖의 행동을 보이자, 그녀를 보는 눈빛이 모두 달라졌다.
창경제가 마른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면면아, 그럼 망치는 왜 들고 온 게냐?”
‘설마 내 서재를 부수려는 건 아닐 테고?’
공주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황, 제 생각에는 저를 혼인하라 보내시느니, 차라리 싸우라 보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창경제가 굳은 표정으로 중신을 바라보았다. 중신들은 암담한 느낌이 들어 식은땀을 닦았다.
‘이런 사람이 우리 대량의 공주라고?’
그렇게 다섯째 공주는 성공적으로 혼인을 막을 수 있었고, 이후 조정에서 눈치 없는 자가 공주의 혼인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 대신들이 크게 꾸짖었다.
누가 그런 공주를 타국에 보내려 하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망치를 들어 서강왕을 내리치기라도 하면 양국의 관계는 순식간에 끝장이었다.
창경제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도 속으로는 제 딸을 혼인시키고 싶지 않았다.
서강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다. 일 년 내내 목욕 한 번 하기도 어려운 곳으로 둘째 공주를 보낸 것만으로도 모자라, 또 다른 공주를 보낼 수 있겠는가?
‘흥, 그 식충이 같은 대신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다 쓸모없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창경제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내뱉을 수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필요할 때 혼인시키는 건 공주들에게 관례적인 일이었기에 황제라 해도 막을 구실이 없었다.
그러니 창경제는 딸의 지혜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창경제는 서강의 사자를 잘 달래준 뒤, 눈치 좋은 신하를 보내 그와 수도 곳곳을 놀러 다니게 했다.
수도는 아주 화려하고 떠들썩했다. 늘 가난한 서강인에겐 모두 신선한 모습이었고, 서강의 사자는 이 화려함에 빠져있다가, 다시 돌아가 보고를 올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정월이 지난 뒤였다.
서강과 대량의 거리를 생각하면, 서강의 사자가 돌아갔을 때 서강이 무슨 기미를 보이려면 최소한 3월은 되어야 했다. 창경제는 남쪽 변방을 지키던 대장 위무행(魏無行)을 수도로 소환해 만일을 대비했다.
수도엔 은근한 긴장감이 흘렀다. 정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16번째 생일을 지냈다.
급계례를 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16살 생일은 크게 치르지 않았고 친한 또래들만 위국공부로 초대했다.
국공부엔 한추화 등 사촌 자매들은 물론이고 다섯째 공주, 남 군주, 사효, 조청공 등이 모였다.
한평과 사효의 혼례는 6월로 정해졌는데, 이날은 두 사람이 정혼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기에 둘은 꽤 쑥스러워했다.
식사를 마친 뒤, 한평은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정미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늘 진중하던 평 오라버니도 이렇게 도망칠 때가 있다니.”
한추화가 정미를 꾸짖듯 노려봤다.
“너흰 너무 짓궂어. 늘 평이를 가지고 놀리고 말이야. 네 차례가 되면 각오해.”
정미는 강향황단목으로 만든 병풍을 쳐다봤다.
병풍은 응접실을 둘로 나누고 있었다. 한쪽은 정철과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까 잔을 돌린 이후로 그쪽에선 계속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청겸, 국공부의 빙탕(*冰糖: 얼음사탕) 모과는 훌륭하구나. 맛있다.”
정미는 그 목소리가 정철의 벗, 임랑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챘다. 이 말을 듣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정철이 떠오르자, 정미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나도 안 무서워. 난 낯짝이 두껍거든.”
‘만약 남들이 나와 오라버니를 가지고 놀리는 날이 온다면, 기뻐하기만 해도 모자랄 것 같으니.’
“으이구, 언제 철들래?”
한추화가 고개를 저으며 정미의 말을 어린 아가씨의 농담이라 여겼다.
그때 남 군주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병풍을 흘끗 쳐다보더니 작게 말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빙탕 모과를 좋아하는 사내는 처음 들어보네.”
조청공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제 셋째 오라버니도 좋아하는걸요. 음, 근데 뭔가 단 걸 좋아하는 사내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정미가 웃으며 설명했다.
“저자는 제 둘째 오라버니의 벗, 성은 임씨고, 이름은 랑이에요. 예전에 절 도와준 적 있어서 오늘 생일에 초대했어요.”
‘도움’은 임랑과 정철이 함께 절벽 아래에 떨어진 정미를 찾았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미가 실종된 일은 바깥으로 소문이 나지 않았기에 굳이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조청공이 멈칫했다.
“남안왕부에서 일하는?”
“응. 조 언니, 알아?”
조청공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셋째 오라버니가 말한 적 있어서.”
사람들은 조청공의 말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조청공은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속으론 조금 아쉬워했다.
‘그 사람인 줄 알았으면 방금 술을 돌릴 때 자세히 볼걸. 위국공 세자와의 정혼을 취소한 뒤로 부모님도 가족도 내게 마음을 많이 써주셨는데.’
하지만 한 번 퇴혼한 아가씨에게 선택의 여지는 예전처럼 많지 않았고, 가족들은 그리 높은 집안이 아닌 재능이 뛰어난 청년들을 후보군에 올렸다.
임랑은 그중 하나였고, 후보군 중 출신이 가장 좋지 않은 자였기에, 부모님도 그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듯했다. 셋째 오라버니가 넌지시 던진 ‘식견이 넓고, 정가 둘째 공자와 친해’라는 말 덕분에 그나마 기억에 남은 인물이었다.
‘만약 정말 식견이 넓은 자라면 출신은 상관없어. 난 부귀영화 따위 중요하지 않으니까.’
식사 후 화원에서 꽃을 구경할 때, 조청공이 몰래 정미에게 말했다.
“정미, 네가 도와줬음 하는 게 있는데…….”
정미는 눈을 반짝이며 조청공이 하는 얘기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지금 바로 가볼게.”
사람들은 둘 셋씩 모여 화원에서 산책을 했고, 정철과 임랑은 다른 소년들보다 나이가 꽤 많았기에 시원한 정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때 정미가 즐거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라버니, 오늘 엄청 재밌는 선물을 받았어.”
“무슨 선물이길래 그렇게 신났어?”
정미가 돌 탁자 옆에 앉아 손에 든 함을 내려놓고는 배시시 웃었다.
“열어봐.”
정철이 웃으며 열어보자 안엔 살아 숨 쉬는 듯한 강아지가 누워있었다. 그것은 사실 성인 손가락 정도의 크기인, 나무에 색을 입혀 만든 공예품이었다.
“재밌네.”
임랑이 다가와 보더니 정철보다 더 흥미로워하며 손으로 강아지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셋째 동생, 어디서 산 건지 물어 봐줄 수 있나? 나도 몇 개 사서 내 동생들에게 주어야겠군.”
‘셋째 동생?’
정미가 정철을 쳐다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친근해진 거지?’
정철은 정미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두 남매의 눈짓을 지켜보던 임랑은 몰래 눈을 부라렸다.
‘지금 셋째 동생이라 불러놓지 않으면, 곧 제수씨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흐윽, 이 잔인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구나.’
“이건 그 어디서도 살 수 없어요. 저와 친한 언니가 준 물건이거든요.”
정미가 설명을 마친 뒤, 강아지를 몇 번 비틀었다.
그러자 강아지가 고개를 흔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정철조차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조 아가씨가 그 음악상자를 연구한 뒤 만들어낸 거야?”
“응, 총명한 언니지?”
“그렇네.”
정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미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조 언니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걸 연구하는 데 쓰는 여인은 사내들이 아내로 맞고 싶어 하지 않겠지?”
“그렇진 않아.”
정철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정미가 고개를 살짝 돌려 임랑을 쳐다봤다.
임랑은 잠시 당황했다.
‘미래의 제수씨가 지금 내 의견을 묻는 건가? 큼큼, 이거 잘 대답해야겠군!’
임랑이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생각해봤는데, 우리 집안에선 별로 개의치 않을 것 같소. 우리 집은 식구도 적고 집안의 관례도 다 정해져 있으니. 조모가 그걸 다 정리하시느라 꽤 많은 시간을 쓰셨지. 큼큼, 게다가 우리 어머니도 아주 건강하시고. 예비 며느리가 그런 것들을 싫어한다고 하면, 향후 1~20년간은 윗세대들에게 맡겨놔도 돼. 뭐, 빨리 아이를 낳는다면 그때쯤이면 일할 필요도 없이 손자며느리에게 넘겨줘도 되고.”
“큼큼.”
정철이 가볍게 기침했다.
‘너무 솔직한 거 아냐. 젊은 아가씨 앞에서 며느리니 손자며느리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다니. 정미가 쑥스러워할 거라곤 생각 안 해?’
정철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봤으나, 정미는 태연한 표정으로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철은 오히려 더 걱정이 되었다.
‘조금도 쑥스러워하지 않다니.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정미는 임랑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어서 물었다.
“그럼, 집안 어른들 혹은 임랑 오라버니가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을까요? 온종일 이런 걸 연구하고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면?”
“왜?”
임랑이 고민 없이 말했다.
“세상에 집안을 관리할 수 있는 여인은 많겠지만, 이런 정교한 물건을 연구할 수 있는 여인은 몇이나 있겠나? 여인이 아니었다면 공부(工部)에서 일하고 있었을걸.”
정미는 물어봐야 할 것들을 다 물어보고 나자 나무 강아지를 잘 챙기고는 방긋 웃었다.
“그럼 난 이만 추화 언니랑 다른 애들한테도 보여주러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