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99화 (299/375)

299화. 함정

태후는 어쩌다 오해가 생긴 건지, 누가 연관되었는지는 당연히 조금도 말하지 않은 채, 놀란 눈빛의 정미를 보며 이어서 말했다.

“심궁엔 여인이 많고 그만큼 원한과 원망도 깊지요. 이런 일이 처음인 것도 아닙니다. 황상께선 일국의 황제로서 당연히 이를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간의 정을 봐서 황후를 처형하진 않고 유폐한 뒤 다신 만나보지 않았지요.”

“그래서 발병하신 겁니까?”

태후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발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저전에 유금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정신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지요. 현미 도장께선 이해할 수 없겠지만, 누구도 찾지 않는 궁전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그 누가 멀쩡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특히 그 사람이 황후라면요. 그런 오해를 받고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태후마마께선 누군가 황후마마께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믿으시는 겁니까?”

태후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당연하지요. 황후는 애가의 친조카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풍씨 집안의 여식은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럼 황상께선―”

태후가 따뜻한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현미 도장, 그대는 아직 어리니 남녀지간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겁니다. 황상과 황후의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을 때, 보잘것없는 후궁의 일보다도 훨씬 격노하셨지요. 황후를 유폐한 뒤, 시간이 지나 그 결정을 조금은 의심했을지 몰라도 황제의 존엄이 있으니 돌이킬 순 없을 겁니다.”

태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만나지 않은지도 벌써 20년이 넘었군요.”

“그렇군요.”

정미는 황후에게 깊은 동정심이 일었다.

“걱정 마세요, 태후마마. 전심전력으로 황후마마를 치료하겠습니다. 우선 지금 단계의 치료는 일단락되었으니, 앞으로 황후마마의 병세를 잘 유지하다가 봄이 되면 조제한 약을 들고 다시 궁으로 와 다음 단계의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외쳤다.

“교 유모, 현미 도장을 배웅해드리거라.”

교 유모가 다가왔다.

“태후마마, 소순궁에서 사람을 보내왔는데 숙비마마의 지병이 재발했다고 합니다. 현미 도장께서 여기 계신다고 들어, 괜찮다면 모셔가고 싶다 전하셨습니다.”

“음?”

태후가 정미를 쳐다보았다.

정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숙비의 병은 오래전 완치했다. 재발할 리 없어. 근데 왜 이 이유를 대고 나를 부르는 거지? 설마, 평왕의 함정인가?’

정미가 태후에게 말했다.

“궁에서 큰언니를 모실 때, 숙비마마의 진료를 봐 드린 적 있습니다.”

“그럼 애가는 교 유모에게 배웅하라 할 테니 소순궁에 갈지 가지 않을지는 도장께서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정미는 자녕궁의 손님이니, 다른 사람에게 진료를 보러 가는 데 태후가 개입할 수 없고, 정미가 소순궁으로 가겠다 해도 태후가 개의치 않겠다는 의미였다.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예전에 진료를 봐 드린 적 있으니 다른 의원들보다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태후에게 작별 인사를 올린 뒤, 자신을 모시러 온 대궁녀 명정(明淨)을 따라 소순궁으로 향했다.

* * *

정미가 자리에 앉은 뒤, 숙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마마,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숙비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사실 지병이 재발한 게 아니라 요즘 계속 가슴이 아픕니다. 태의도 문제를 찾지 못해 도장을 모셔봤습니다.”

“그렇군요.”

정미가 숙비를 열심히 살펴보다가 아쉬운 듯 말했다.

“아쉽게도 저는 대방맥과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해 마마께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도장께서 제 오랜 병을 치료해주셨는데, 줄곧 감사를 표하지 못했지요. 괜찮으시다면 여기 남아 식사를 들고 가시지요.”

숙비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잠시 망설였다가 숙비의 제안을 승낙했다.

차를 한 잔 마신 뒤, 궁녀가 보고를 올렸다.

“마마, 평왕께서 오셨습니다.”

숙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발이 걷히더니 평왕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날씨가 정말 춥군요. 또 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모비, 따뜻한 차를 내어주시지요.”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오, 정가 셋째 소저도 있었군. 본왕이 무례했네.”

정미는 기가 찼지만 전혀 티 내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숙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어찌 어미를 보러 왔느냐?”

평왕이 손에 든 물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얼마 전 여우를 두 마리 잡았는데, 왕부의 사부님께 손질을 부탁드려 피풍을 만들어왔습니다.”

“고맙구나.”

궁녀가 따뜻한 차를 올리고 물러나자, 방 안의 하인은 숙비의 심복 하인밖에 남지 않았다. 평왕은 갑자기 정미를 쳐다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여기서 정가 셋째 소저를 마주칠 줄은 몰랐군. 마침 본왕이 그대에게 물어볼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평왕이 숙비를 쳐다봤다.

“아들이 정가 셋째 소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정가 셋째 소저는 이제 국사의 제자이시니, 무례하게 굴어선 안 된다. 모비 앞에서 할 수는 없는 말이냐?”

평왕이 웃었다.

“아들이 어찌 감히 현미 도장에게 무례하게 굴겠습니까.”

숙비가 난처한 얼굴로 정미를 쳐다봤다.

“현미 도장―”

정미는 두 사람의 기막힌 호흡에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여쭈실 게 있다고 하니, 당연히 알고 있는 바를 다 말씀드려야지요.”

곧 정미와 평왕 두 사람은 칸막이 방으로 가 마주 보고 앉았다.

“왕야께서 무슨 일이실까요?”

정미가 먼저 말문을 열었으나, 평왕은 아무 말 없이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정미는 조금 짜증이 났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아. 평왕 같은 사람은 다리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가 더 심하니,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좋다고. 하지만 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평왕이야말로 가짜 태자를 끌어내릴 수 있겠지.’

평왕이 갑자기 정미에게 다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위국공의 손, 그대가 치료한 게지?”

정미가 뒤로 물러나며 정색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평왕이 손을 들어 정미의 아래턱을 잡았다.

“잡아뗄 줄 알았다!”

정미가 그를 걷어차려 하자, 평왕이 정미를 꽉 눌렀다.

“가만히 있어라. 본왕의 다리가 성치 않다고 해도 무술은 게을리하지 않았니. 다치고 싶으면 더 발버둥쳐 보거라.”

정미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왕야, 제 사부님이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평왕이 차갑게 웃었다.

“어린 계집 같으니.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희망이 생겼다가, 그 희망이 다시 물거품이 되는 기분을 영원히 모를 테지. 그래, 모른 척해도 된다. 그럼 나와 함께 죽자꾸나. 절름발이로 사는 것도 이제 질렸으니!”

‘이 미친놈!’

정미가 피식 웃었다.

“그럼 숙비마마는요?”

평왕은 잠시 멈칫했다가 정미를 노려봤다.

“나와 그게 무슨 상관이지?”

‘쯧, 꼴에 자존심은 세 가지고.’

정미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한참 뒤에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찌 알게 되신 겁니까?”

평왕이 손을 놓았다.

“직감이라 하면 믿겠느냐.”

“하하.”

평왕은 정미가 비웃든 말든 이어서 물었다.

“그럼, 본왕의 다리를 고쳐줄 텐가?”

“그러지요.”

뜻밖에도 정미는 평왕의 제안을 깔끔히 승낙했다.

평왕은 잠시 멍해졌다가 오히려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소녀가 단정히 앉아 턱을 살짝 치켜들고 말했다.

“왕야께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시면, 다리를 치료해드리지요.”

평왕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본인이 잘못 들었냐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입을 꾹 다문 채 확고한 표정으로 평왕을 쳐다봤다.

평왕은 정미에게 어디 아픈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제 다리를 생각해 겨우 말을 삼키고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본왕에게 농을 치는 건가?”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방금 제게 같이 죽자고 하신 말씀은 농담이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정미가 턱을 더 높이 치켜들고 도발했다.

“그럼 제 말도 당연히 농담이 아니지요!”

‘이것도 봐준 거라고. 최소한 개 울음소리를 내라곤 안 했으니.’

울컥해서 뱉은 말로 보였지만, 이는 평왕의 기세를 꺾어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너, 이 계집―”

그 포악하던 평왕도 순간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정미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싫으시면 여유롭고 부유한 왕야 생활을 포기하고 저와 함께 죽어버리시면 되지요. 숙비마마께서 왕야와 함께 순장되시겠군요.”

정미는 문득 국사의 제자라는 신분이 아주 유용하다는 걸 느꼈다.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평왕은 정미와 같이 죽을 필요도 없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여 조용히 그녀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정미를 위협하려면 제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숙비도 함께 끌어들여야 했다.

정미는 복잡한 표정의 평왕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고작 그런 말들로 나를 겁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다…… 다른 조건으로 바꿀 순 없나?”

평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녀가 턱을 받치고 지루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듣고 싶은걸요. 너무 오래 밖에 나와 있었더니 집에 있는 고양이가 보고 싶어요.”

평왕은 화가 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미는 평왕을 쳐다보지도 않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제 다리를 고칠 수 있는 내가 위에 있다는 걸, 이 망나니 왕야에게 반드시 가르쳐주겠어!’

“……야옹.”

작은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정미가 평왕을 흘끗 쳐다봤다.

평왕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갈며 물었다.

“되었느냐?”

“뭐가요?”

정미는 못 들은 척했다.

자포자기한 건지, 너무 화가 나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평왕은 갑자기 정미에게로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크게 외쳤다.

“야옹, 야옹!”

그 후, 표정은 어두웠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귀 끝은 숨기지 못한 평왕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물었다.

“들렸느냐?”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 하지만 저희 집 고양이 울음소리만큼 좋진 않네요.”

“그럼 뭐 어찌할 셈이지?”

평왕의 안색은 먹물처럼 어두웠다.

‘치욕이다. 아주 크나큰 치욕이야! 이 계집이 감히 또 다른 요구를 하면 그냥 같이 죽어버리겠다!’

정미는 적당한 시기에 그만둬야 한다는 도리를 알고 있었기에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제 왕야의 다리를 치료해드리지요.”

“정말이냐?”

평왕이 흥분한 나머지 정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소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손목을 쳐다보자, 평왕은 급히 손을 놓았다.

‘이 계집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 폭력을 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큼큼…….’

“왕야께서 고양이 울음소리까지 내셨는걸요. 뭐, 그리 듣기 좋진 않았지만 약조는 지켜야지요. 하지만 왕야의 다리는 하루 만에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어디서 치료할지는 생각해두셨습니까?”

평왕이 평소의 표정을 되찾고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본왕이 그대에게 사람을 보내 데려올 테니.”

“그렇게 하시지요.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왕야께서 숙비마마를 뵈러 오셨으니, 식사는 할 수 없겠군요.”

그렇게 정미가 떠난 뒤, 숙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아, 셋째 소저와 무슨 말을 한 게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 아들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혼담을 거절했는지 물었을 뿐입니다.”

평왕이 옅게 웃었다.

숙비는 의아한 듯 평왕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들이 이렇게 편하게 웃는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정가 셋째 소저가 도대체 뭐라 대답한 건지. 역시, 그 아가씨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 고수가 분명하구나.’

“아, 방금 안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린 것 같던데?”

평왕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잘못 들으셨겠지요.”

“그럴 리가. 꽤 큰 소리였거든. 별로 좋은 소리도 아니었고.”

“어디서 들어온 들고양이인가 봅니다! 아들은 해야 할 일이 떠올라 이만 출궁하겠습니다.”

평왕이 차갑게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숙비는 평왕을 막지도 못하고 그저 중얼거릴 뿐이었다.

“방금까진 괜찮아 보이더니, 왜 또 기분이 상했을까? 어휴, 이 깊은 궁에 누가 감히 고양이를 키우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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