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원인
팔근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방으로 달려가 물건을 내려놓은 뒤, 손을 비비며 나와 소매에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셋째 아가씨께서 세손이 저러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시다니?”
소매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왕세손께선 아가씨가 왕부의 혼담을 거절한 걸 책문하기 위해 오신 거야. 그래서 아가씨께서 문전박대를 하신 거고.”
“아, 이것 참―”
팔근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공자님을 모셔올게.”
꽤 늦은 시간이었고, 거리로 달려나간 팔근은 관아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던 정철을 발견했다.
“공자님, 어서 돌아갑시다. 경왕세손께서 한 시진도 넘게 마당에 서 계세요. 이러다 큰일 나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팔근이 다급히 상황을 설명하자, 정철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용흔은 벌써 두 다리가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고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용흔은 마침내 시선을 거두고 발 위에 얇게 쌓인 눈을 멍하니 쳐다봤다.
‘정가 형님이 그때 썰어주었던 사슴고기도 이렇게 얇았는데. 음미하기도 전에 살살 녹았지. 못난 계집이 계속 나와 다투면서 정말 맛있게 먹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늘 정미를 못난 계집이라 불러서 그런가? 아니면 자주 괴롭혀서? 정미가 싫어하는 거면, 뭐든 다 고칠 수 있는데.’
작은 패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닥에 쌓인 눈보다 마음이 더 차갑게 시려오는 듯했다.
‘왜 내겐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걸까?’
이때, 용흔의 발치에 검정 신발이 나타나더니 청색 관포가 눈에 들어왔다.
“정가 형님―”
작은 패왕은 순간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정철이 그의 어깨에 쌓인 눈을 쓸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날이 춥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용흔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안 들어가. 못난 계집이 날 보고 싶지 않대.”
정철이 용흔을 쳐다봤다. 붉은 뺨을 제외하면 드러난 살갗들은 모두 하얗게 질려있었다.
“세손, 이렇게 고집부리면 미미에게 당신은 그저 짓궂은 어린 벗으로 남을 뿐입니다.”
용흔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형님, 그럼 만약 내가 성숙해지고 진중해지면, 그, 그러니까 형님처럼 된다면 일이야. 그럼 못난 계집이 나를 좋아하게 될까?”
정철의 표정이 복잡해지더니 한참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미에게 마음에 둔 사람이 없다면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사람의 마음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용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못난 계집이 그랬는걸.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면 평생 시집을 가지 않을 거고, 그 누구도 필요 없다고 했어. 형님, 난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 한지가 나보다 성숙하고 진중한 사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아? 최소한 보는 눈은 나보다 없잖아?”
용흔이 고개를 들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정철이 보였다.
“형님―”
정철이 정신이 들어 미묘한 말투로 물었다.
“미미가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응.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철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과 설렘이 차올랐지만, 차마 용흔 앞에서 티 낼 수 없어 복잡한 표정이었다.
정철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미미가 마음에 둔 사람은, 한지가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그건 미미가 직접 알려야지요. 세손, 미미의 성정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미미가 한 번 결심한 일은 세손이 이렇게 고집만 부린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용흔은 정철의 마지막 한마디에 정곡을 찔려 억울함이 북받쳤고 얼어버린 콧물을 스윽 닦은 뒤 정철의 손등에 비비며 말했다.
“형님, 같이 전골을 먹고 싶어. 형님이 직접 썬 고기로!”
* * *
“드시지요. 왕부엔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정철이 공용젓가락으로 동글게 말린 양고기 한 점을 집어 용흔의 접시에 놓아준 뒤, 다정하게 땅콩 가루를 뿌려주었다.
용흔은 고맙다고 대답한 뒤 아무 말 없는 정미를 흘끗 쳐다보고는 뭔가 떠오른 듯 공용젓가락을 집더니, 정철이 했던 것처럼 양고기 한 점을 집어 정미의 접시에 놓고는 땅콩 가루를 뿌려주었다.
정미가 정철을 쳐다봤다.
정철은 어이가 없었다.
‘이래서 적을 동정하면 안 되는 거구나!’
정철은 뿌듯한 모습의 용흔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서 드시지요, 식으면 맛이 없으니.”
전골이 보글보글 끓으며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세 사람은 반 시진이 지나서야 식사를 마쳤다.
역시 젊은 청년이라 그런지,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나니 용흔의 코끝에 땀이 맺히며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용흔은 입가심을 하고 손을 씻은 뒤, 단정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는 정미를 몰래 흘끔 쳐다봤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아까 마당에서 저를 내버려 뒀던 일이 떠오르자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정철이 기침하고는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돌아가시지요, 세손.”
“어―”
용흔은 도저히 가기 아쉬워 정철을 빤히 쳐다봤다.
정철은 용흔의 마음에 따라줄 생각이 없었기에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지. 팔근이 왕부에서 돌아와 말하길, 남 군주가 세손을 찾아오던 도중 어디 부딪혔다던데―”
용흔이 벌떡 일어났다.
“가볼게!”
작은 패왕이 쏜살같이 떠나갔다.
남은 정철과 정미는 서로를 쳐다봤다.
“남 군주, 별일 없는 거지?”
한참 뒤, 정미가 물었다.
“그리 큰일은 아냐. 용흔이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울까 봐 말했어.”
정미가 정철을 흘겨봤다.
“오라버니는 참 다정하다니까.”
정철이 정미의 코끝을 콕 눌렀다.
“그럼 미미는 모질기라도 해?”
정미는 왠지 뜨끔해 욱하며 말했다.
“그냥 용흔에게 날 넘겨주지 그래.”
그러자 정철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차갑게 굳으며 아무 말 없이 정미를 쳐다봤다.
“왜 그래?”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정철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정미를 껴안고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닥쳐온 입맞춤에 정미는 깜짝 놀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더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한참 뒤, 정철은 늘 서리처럼 차가운 얼굴에 홍조를 띠며 작게 말했다.
“가자, 국공부로 데려다줄게.”
“……응.”
국공부로 돌아가는 길, 정미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오라버니, 오늘 좀 평소와 다른 것 같은데…….”
‘여태껏 내가 좀 다가가려 해도 피했으면서,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정철이 정미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오늘 용흔의 말을 듣고 깨달은 게 있어서.”
“뭔데?”
“난 이미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걸 가졌으니, 매일 아껴줘야겠다고 다짐했어.”
정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용흔이 또 거침없이 말했나 보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아무 돌이나 툭툭 차버리며 정철의 손을 꼭 잡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좁고 긴 골목의 집들은 처마 밑 등을 밝혔다. 노란 불빛이 두 사람 위를 비추니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마치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자, 골목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 * *
며칠 뒤, 위국공이 명을 받아 북제에 출정하게 되었다. 도 씨는 아직도 시회에서 있었던 일로 침상에서 일어나질 못했고, 위국공부에선 연말의 즐거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미는 태후의 부름으로 궁에 들어가게 됐다.
정미는 태후에게 경전을 읽어준다는 핑계로 주기적으로 궁을 드나들었지만, 사실은 황후의 병증을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궁엔 시종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었기에, 정미는 치장을 마친 뒤 데리러 온 내시를 따라 밖으로 나가던 도중 화원에서 한지와 마주쳤다.
고작 며칠 사이 한지는 눈에 띄게 야위어있었다. 말에서 떨어졌을 때보다도 초췌해 보이는 모습이었고, 눈빛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지 오라버니.”
정미가 몸을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한지를 스쳐 지나갔다.
“정미―”
정미가 어두운 눈빛으로 한지를 쳐다보자, 한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우스워 보이지?”
정미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한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됐어.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 살펴 가.”
정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정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 * *
자녕궁 안, 태후는 황후를 검사하는 정미를 보며 꽤나 긴장한 모습이었다. 검사가 끝난 뒤 물었다.
“현미 도장, 황후는 좀 어떻습니까?”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병세가 안정되었습니다. 봄이 되면 다음 치료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습니다.”
태후가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거 참 다행입니다. 최근 황후의 발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더군요. 밤에도 아주 조용해졌고요. 다 현미 도장 덕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태후마마.”
정미의 얼굴에 망설임이 묻어나오자, 태후가 눈치채고 물었다.
“현미 도장,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정미가 황후를 흘끗 쳐다봤다.
태후가 말했다.
“황후를 다시 돌려보내거라. 너희도 물러나 있고.”
그렇게 방 안엔 순식간에 태후와 정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태후의 심복 하인인 교 유모조차도 밖으로 나갔다.
정미는 자신에 대한 태후의 신뢰가 한층 더 두터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태후 정도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쉽게 외부인과 독대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미는 잡념을 거두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 제 스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하고, 원인을 찾아야 치료할 수 있습니다. 다음 치료단계에서 효과를 보려면 일단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황후마마의 병이 발병한 원인입니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태후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정미는 차분한 표정으로 태후를 쳐다봤다.
태후는 엉망이 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현미 도장, 이 일은 황가의 기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외부인에게 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미는 여전히 확고한 모습이었기에, 태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꼭 그 원인을 알아야만 황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정미가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후마마의 병은 한두 해 된 병이 아닙니다. 병인을 알아내는 건 치료과정의 첫걸음일 뿐이지요. 스승님께서도 이 부분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국사는 속세를 벗어난 고인(高人)이었기에 당연히 궁궐의 비밀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태후는 총명한 사람이었기에 빠르게 이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쉬더니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정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급한 일은 아니니 심사숙고해주십시오.”
겉으론 일말의 호기심도 없는 듯 굴었지만, 마음속으론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말했어. 태자의 출신에 황후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과연 태후가 황후의 병인을 말해줄까? 황후는 어쩌다 발병하게 된 걸까?’
“현미 도장, 잠깐만요.”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몇 바퀴나 천천히 돌아다니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외부에선 늘 황후가 갑자기 유폐된 이유를 추측해왔지요. 사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연의 일치로, 황상께서 황후가 다른 이와 밀회했다고 오해하셨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