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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97화 (297/375)

297화. 퇴짜

평왕은 숙비에게서 혼사가 거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음험한 표정을 지었다.

숙비는 그 표정에 깜짝 놀라 평왕을 달랬다.

“진아, 익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딴 열매는 달지 않듯, 억지로 맺는 혼사도 행복하지 않을 게다. 국공부에서 네 부황이 보낸 혼담도 거절하였는데,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말거라. 봄이 되면 모비가 정가의 셋째 소저만큼 좋은 명문가 여식을 찾아볼 테니.”

“정가의 셋째보다 좋을 리가요!”

평왕이 이를 갈았다.

숙비는 잠시 깜짝 놀랐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정가 셋째 소저의 외모는 수도에서 손에 꼽을 만큼 아리땁지. 하지만 왕비는 외모만 봐선 안 된다. 진아, 그렇지 않으냐?”

평왕이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뜨고 말했다.

“모비의 말씀이 맞습니다. 봄이 되면 알아봐 주십시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도 출신이 훌륭해야 하고, 왕부를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절름발이 왕야였기에, 조심스럽고 소심한 여인이 아닌 명문가 출신의 왕비가 필요했다. 나중에 조력이 될 수 있도록.

‘외모라면…… 하하, 정가의 셋째를 들이려던 것도 외모 때문이 아니었으니!’

숙비가 안도의 한숨을 쉬자, 평왕이 말했다.

“그럼 기회를 잡아 정가 셋째 소저를 궁으로 불러주십시오.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숙비의 안색이 굳었다.

“진아―”

평왕이 차갑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그저 순수하게 정가 셋째 소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니. 다른 뜻은 없습니다.”

숙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들은 괴팍한 성정을 가졌기에 그의 말에 따라주지 않으면 어떤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평왕이 만족하며 떠나가자, 숙비는 그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아들이 괴팍한 성정으로 자란 걸 보면 그래도 속상하고 답답하구나.’

* * *

경왕부 안.

용흔은 혼담이 거절됐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히 멍해졌다.

“흔아, 괜찮으냐?”

경왕세자비 증 씨는 깜짝 놀랐다.

‘무법천지에다 온종일 난리를 치던 내 아들이 이렇게 조용해지다니.’

용흔이 손을 들어 눈을 슥슥 비볐다.

“가서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용흔은 곧바로 달려나가다가 들어오던 용남과 어깨를 부딪쳤다.

용남이 아픈 어깨를 매만지며 증 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또 무슨 일이에요?”

“국공부에서 네 오라버니의 혼담을 거절했다는구나. 그래서 찾아가서 직접 물어보겠단다.”

증 씨가 멍하니 대답했다.

‘내 아들이 눈물을 흘리다니. 설마 정가의 셋째에 대한 마음이 그 정도로 깊었던 건가? 언제부터 자식들이 벌써 이렇게 크고, 내가 늙어가기 시작한 거지?’

증 씨는 뺨을 어루만지며 십여 년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겨울이었다. 사이좋은 소녀들끼리 정자에 모여 사슴고기를 구워 먹으며 눈 구경을 하던 날이었다.

증 씨는 한옥주의 눈처럼 뽀얀 피부와 절륜한 미모를 칭찬했다. 한옥주는 잘 구워진 사슴 다리를 들고 방긋 웃었다.

“미모는 그저 한순간일 뿐. 몇십 년 뒤면 우리 모두 비슷한 모습일걸.”

하지만 한옥주가 틀렸다. 십여 년 뒤에 다른 소녀들은 모두 모습이 변했지만, 한옥주만은 영원히 기억 속 그 아리따운 모습 그대로였다.

“모비―”

용남이 증 씨를 불렀다.

“밖에 먹구름이 자욱한 걸 보니, 곧 날씨가 안 좋아질 것 같아요. 두꺼운 외투를 들고 오라버니를 쫓아가야겠어요.”

아들은 어디에 꽂히면 아무도 막지 못하는 성정이었고 오직 딸인 용남만이 그나마 조금 말릴 수 있었기에, 증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렴. 호위를 몇 명 데리고 가고.”

* * *

단숨에 위국공부로 달려간 용흔은 정미가 정철에게 갔다는 걸 전해 듣고는 두말없이 정철의 저택으로 향했다.

“공자께선 어느―”

“꺼져!”

용흔은 문지기를 발로 걷어찬 뒤 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마당에서 크게 외쳤다.

“정미, 여기 있느냐?”

용흔이 계단을 오르자, 환안이 나와 그를 막았다.

“세손, 아가씨께서 돌아가시라고 전하셨습니다.”

용흔은 잠시 멈칫했다가 크게 성냈다.

“정미가 나를 안 만나겠다 했다고?”

환안은 작은 패왕의 분노에 전혀 말려들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이미 똑똑히 얘기하고 끝난 일인데 세손께서 이렇게 노발대발하며 찾아오시니, 친우의 신분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면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용흔은 화가 나 환안을 밀어냈다.

“비켜!”

그때 방 안에서 소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흔, 소란을 그만 좀 피울 순 없습니까? 예전처럼 친우로라도 남아있고 싶다면 진정하세요.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때 저를 다시 찾아오시지요. 만약 오늘 억지로 안에 들어오려 한다면 앞으론 당신을 낯선 사람으로 대할 겁니다.”

용흔은 잠시 멍해졌다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정미, 어째서냐?”

“이유는 그날 똑똑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용흔, 당신이 저를 중요시하는 것에 대해선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거절할 권리가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용흔이 멍하니 정미의 말을 듣다가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환안은 그 틈을 타 방문을 닫았다.

하늘에 가득 끼인 먹구름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용흔은 마당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눈비를 맞고 있었다.

“……어째서?”

용흔이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어. 난 못난 계집을 아주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러니 이제부터 못난 계집에게 아주 잘해줄 거야. 절대 한지처럼 못난 계집을 오해하지도, 의심하고 싫어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는 일도 없을 거야. 절대 못난 계집을 속상하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어째서, 못난 계집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용흔이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방 안에서 나온 사람을 보고는 곧바로 실망했다.

환안이 하늘색 우산을 들고 다가와 용흔의 머리 위를 가렸다.

“세손, 아가씨께서 추위에 병이라도 나면 안 되니 일찍 돌아가라 전하셨습니다.”

환안이 우산을 용흔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그러고는 손에 든 모피 피풍을 용흔에게 둘러주고 뒤돌아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용흔은 우산을 꽉 쥐며 방문을 빤히 쳐다봤다.

‘못난 계집이 나를 걱정하고 있어. 진눈깨비가 내리니까 우산도 보내줬다고. 이렇게 계속 서 있으면, 언젠간 만나주지 않을까?’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다. 눈과 비가 땅을 축축하게 적셨다.

차라리 눈이 쌓이는 게 덜 추울 날씨였다.

정미가 창가에 서서 조용히 그를 지켜보다가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자랐기에 당연히 정미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용흔의 굳은 마음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단호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용흔을 잘 알고 있었다. 용흔의 성정이라면, 정미가 조금이라도 마음 약하게 굴었다간 앞으로 거리를 두는 것조차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혼사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한 번 꽂힌 일엔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작은 패왕의 성정에 그의 말에 따라준다면 그 누구에게도 유해무익한 일이리라.

“환안, 이러다 세손께 병이라도 나는 거 아냐?”

소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으나 환안은 침착한 표정이었다.

정미가 막으라고 했으니 어찌 되었든 간에 막으면 되었고, 세손에게 우산을 전해주라 했으니 전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 외에 다른 건 고작 여종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건 모르지. 세손의 몸이 튼튼한지 아닌지에 달린 일이니.”

소매가 이마를 짚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셋째 아가씨 곁에서 모시는 시종이면서, 아가씨께 세손을 복도에서 비를 피하게 하자고 말이라도 꺼낼 수 있잖아. 복도엔 화로라도 놓을 수 있으니까!’

소매는 정미처럼 대담하지 않았다. 밖에서 눈비를 맞고 있는 자는 무려 경왕세손이었다. 만약 병이라도 나면, 제가 모시는 공자께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침 이때 입구에서 기척이 들려와 소매가 급히 달려나갔다. 그녀는 그자가 팔근임을 알아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팔근, 드디어 왔구나.”

팔근이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오늘 날씨가 춥길래, 양고기로 전골을 끓여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소매가 바구니를 건네받으려 하자, 팔근이 피했다.

“너무 추워서 고기에 살얼음이 끼었어. 만지지 마.”

소매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가 곧바로 눈치를 주며 팔근에게 작게 말했다.

“경왕세손께서 마당에 서 계셔. 셋째 아가씨를 만나 뵙고 싶으신데, 아가씨께선 안 만나실 거래. 벌써 한 시진이 넘었다고. 네가 가서 말려봐. 이러다 병이라도 나면 공자님께서 왕부의 미움을 받게 될지 몰라.”

팔근이 머리를 기웃대더니, 등을 진 채 마당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경왕세손을 바라보았다.

팔근은 난처한 듯 혀를 찼다.

‘공자님을 따라다니며 자주 봐서 아는데, 경왕세손은 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소매의 부탁이니까, 큼큼, 한번 해봐야지.’

팔근이 큰맘 먹고 다가가 말했다.

“세손, 소인은 팔근입니다. 둘째 공자님의 사동이지요. 이렇게 추운 날에 어찌 여기 서 계십니까. 우산이 있다고 해도 벌써 몸이 젖고 계십니다. 안에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시지요.”

용흔의 얼굴은 발갛게 얼어있었고 마치 새하얀 눈 위에 떨어진 매화 꽃잎처럼 쓸쓸해 보였다.

팔근의 목소리가 들리자, 용흔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팔근이 든 바구니에 시선을 두었다.

“저녁에 끓여 먹으려고?”

팔근은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양고기인가?”

팔근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 썰려있지요. 이따 끓는 육수에 넣어 먹기만 하면 됩니다.”

용흔이 시선을 옮겨 굳게 닫힌 방문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팔근이 든 양고기를 봤다.

“양고기보단 사슴고기 전골이 더 맛있지. 그리고 너무 두껍게 썰었어. 2년 전 정가 둘째 형님이 직접 썰어준 사슴고기는 눈꽃처럼 얇아서 입에 넣으면 살살 녹았다고…….”

용흔은 말끝을 흐리며 빨간 코를 훌쩍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정미는 창가에 서서 용흔의 말을 듣고 있었다. 2년 전 온천마을에서 오라버니와 화서, 그리고 용흔과 함께 사슴고기를 끓여 먹었던 상황이 떠오르자, 갑자기 조금 괴로워졌다.

그날처럼 늘 화기애애하게 지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정철을 마음에 둔 이상, 다른 사람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그들이 더 좋은 아가씨를 만날 수 있도록 축복해줄 수밖에.

한편 마당 안, 팔근은 가슴이 쿵쾅 뛰었다.

‘오늘 경왕세손께서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양고기를 너무 두껍게 썰었다고 날 때리는 건 아니겠지?’

“세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공자님께서 돌아오시면 술상을 차려드리겠습니다.”

용흔은 눈을 내리깔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안 들어간다. 정미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

팔근이 방문을 흘끔 쳐다보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손,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계속 여기 서 계시면 큰일 납니다.”

‘잠시만 서 있어도 바구니를 든 손이 꽝꽝 어는 것만 같고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을 지경인데, 한 시진이나 서 계시다니.’

용흔은 팔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빤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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