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트집
경왕부 안.
용흔은 세자비 증 씨의 팔을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 중매인을 보내주시기로 약조하셨지 않습니까. 어찌 아직도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증 씨가 용흔을 노려봤다.
“그리 급할 필요 없다. 어차피 네 것이 될 터이니.”
“누가 그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사발 안의 고기도 배에 들어가기 전까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어머니,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하고 계신 겁니까? 이 아들은 정미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을 거라고요!”
‘하하, 한지도 이 뻔뻔하고 고집스러운 방법으로 정요를 얻었지. 아니, 퉤퉷! 지금 누구로 예를 들은 거야. 못난 계집은 정요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증 씨는 아들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허락하도록 하자. 정미와 그 사람의 얼굴이 닮긴 했지만, 신분은 크게 달라졌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야.’
* * *
그렇게 정미는 정철이 말한 ‘성가신 일’이 뭔지 깨닫게 되었다.
대량에는 ‘정월에는 혼례를 치르지 않고, 섣달에는 정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시회가 끝난 후, 국공부에 중매인을 보내는 집안이 끊이질 않았다.
한 씨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야, 일만 냥을 기부한 건 아주 잘한 일이었구나. 요 이틀 동안 국공부의 문턱이 다 닳을 지경이다.”
‘예전엔 딸이 시집가지 못할까 봐 어찌나 걱정했는데, 많고 많은 후보 중에 사위를 고를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정미는 책상 위에 엎드려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부하지 않았을 텐데.”
‘오라버니가 일부러 내게 알려주지 않았구나! 국공부에서 혼사를 정해버리면 어쩌려고? 걱정도 안 되나 봐!’
정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당장 정철을 불러와 힘껏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부인, 부인! 또 오셨습니다!”
설란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한 씨의 눈이 반짝였다.
“어느 집안에서 왔느냐?”
“그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세 사람이 동시에 와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과연 응접실 안엔 중매인이 셋이나 앉아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 녹색 옷을 입은 사람,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소박한 남색 옷을 입고 있었다.
세 사람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살펴봤다.
붉은 옷의 중매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누군가 했더니, 두 분이셨군요. 정가의 셋째 아가씨를 찾아오신 겁니까? 너무 애쓰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녹색 옷의 중매인이 입을 삐죽였다.
“왜, 그쪽이 있으면 우린 말도 못 한단 말입니까? 어느 집안에서 온 건지 말씀해보시지요. 얼마나 대단한지 들어나 봅시다.”
붉은 옷의 중매인이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저는 태부사의 황 소경부에서 왔습니다. 그 집의 장녀가 내각 재상가의 며느리라지요.”
“아이고, 무서워죽겠네.”
녹색 옷의 중매인이 비웃었다.
“그쪽은요?”
녹색 옷의 중매인이 득의만만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경왕세자비께서 보내셨지요.”
두 사람이 동시에 남색 옷의 중매인을 쳐다봤다.
남색 옷의 중매인은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황상께서 보내셨습니다.”
두 중매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농을 치시다니요?”
남색 옷의 중매인이 자신만만한 듯 웃었다.
“제가 고작 농담에 목숨을 걸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응접실 안 화로엔 고급 은사탄이 조용히 타고 있어 타는 냄새 하나 없이 봄날처럼 따뜻했다.
두 중매인은 왠지 방 안이 더운 것 같아 이마를 스윽 닦았다.
“그럼, 그 말이 사실입니까?”
남색 옷의 중매인이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거짓일 리가요.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서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저희가 찾아온 아가씨는 위국공부의 사촌 아가씨일 뿐만 아니라, 국사의 제자이니까요.”
“그래, 그렇지요.”
두 중매인은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장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그들 모두 손에 꼽는 유명한 중매인들이었기에 이렇게 시도도 해보지 않고 도망치면 앞으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게 뻔했다.
두 사람은 의자에 왠지 가시방석이라도 깔린 듯 가만히 앉아 있기가 불편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부인께서 곧 오실 겁니다.”
설란이 차갑게 식은 차를 버리고 따뜻한 차를 새로 따라주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며칠 동안 찾아온 중매인은 모두 귀한 집안에서 보낸 사람들이었기에 괜히 미움을 샀다가 부인과 셋째 아가씨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었다.
곧 한 씨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들어와서는 중매인들을 둘러보았다. 둘은 초조한 표정에, 나머지 하나는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고는 호기심이 일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어느 집안에서 보냈는가?”
붉은 옷의 중매인이 힘없이 대답했다.
“태부사의 황 소경 댁에서 차남의 혼담을 부탁받아 왔습니다.”
녹색 옷의 중매인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저는 경왕세손의 혼담을 부탁받았습니다.”
한 씨는 어리둥절해졌다.
‘왜 이렇게 풀이 죽은 모습이지. 직업 정신이라곤 전혀 없군! 나도 곧바로 혼담에 대답해줄 생각은 없지만, 이런 태도로 나오다니.’
“그럼 이쪽은―”
한 씨가 아무 말 없는 남색 중매인에게 물었다.
남색 옷을 입은 중매인이 가볍게 기침하더니 여유롭게 대답했다.
“황가의 부탁을 받아 왔습니다. 평왕비를 모시러요.”
한 씨는 손을 파들파들 떨어 하마터면 차를 바닥에 떨어트릴 뻔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평왕? 황가의 부탁이라고?”
‘누가 와서 나 좀 꼬집어 봐. 이건 꿈일 거야!’
남색 옷의 중매인은 한 씨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 웃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한 씨가 벌떡 일어났다.
“노부인과 상의해보고 올 테니, 잠시 앉아 있게.”
“예, 당연하지요.”
남색 옷의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곁다리 역할만 하면 되겠구나. 괜히 말을 꺼냈다가 오히려 굴욕을 당할 수 있으니.’
* * *
한 씨는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정미에게로 달려갔다.
정미의 눈이 커졌다.
“세 중매인 중, 황상께서 보내신 분이 있다고요? 평왕이 저를 왕비로 맞겠다고 하셨나요?”
“그래!”
한 씨가 펄펄 뛰었다.
“어떡하면 좋니. 난 그 절름발이에게 널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
정미는 어리둥절하며 한 씨를 쳐다봤다.
‘어머니가 바로 그 중매인에게 물건을 던졌을 줄 알았는데.’
한 씨가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네가 모르나 본데, 평왕 같은 신분의 사람은 성정이 분명 이상할 거다. 절름발이인 건 무섭지 않지만, 마음의 병이 있을까 무섭구나. 이런 사람은 평소엔 멀쩡해 보여서 네가 시집가고 난 뒤에 발견하면 늦어. 오늘 온 세 가문 중에선 나는 황 소경의 차남만 고려해 볼만 하다고 생각되는구나.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황가와 경왕부의 미움을 살 테지.”
정미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져 웃으며 말했다.
“뭐 하러 고민하세요. 다 거절하시면 되는걸.”
한 씨의 눈이 커졌다.
“모두 거절하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가에서 보낸 사람은 어쩐단 말이니?”
정미는 담담했다.
“어머니, 어쩔 땐 당사자보다 제삼자의 눈이 더 정확한 법이지요. 황상께서 직접적으로 사혼을 내리지 않고 굳이 중매인을 보내셨잖아요. 당연히 거절당할 것도 염두에 두고 계실 겁니다. 제가 국사의 제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움에 정진하고 싶으니, 잠시간은 혼사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세요.”
“그래, 그러마.”
한 씨는 문 입구까지 걸어갔다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고 정미에게 눈을 부라렸다.
“뭐가 제삼자라는 거니, 당사자는 너인데!”
정미가 하하 웃으며 재촉했다.
“어서 가보세요. 더 늦으면 그 세 분께 식사를 대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한 씨는 마음을 가다듬고 응접실로 향했다.
* * *
한 씨가 응접실에 도착하자 중매인들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남색 옷의 중매인은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부인과 노부인께서 어떻게 상의를 마치셨을까요?”
한 씨가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딸이 근 2년간은 배움에 정진하고자 하니, 잠시 동안은 혼사를 고려하지 않기로 했네. 돌아가게.”
세 사람은 동시에 멍해졌고 국공부의 대문을 나올 때까지도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거절당했어. 거절당했다고! 위국공부가 황가의 혼담도 거절했다고!’
“어, 저,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황 소경부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실 테니.”
“저도 가보겠습니다. 경왕세자비께서 얼른 갔다가 얼른 돌아오라고 하셨거든요.”
남색 옷의 중매인은 굳은 표정으로 가마에 탔고, 밖에서 들려오는 길거리 행상들의 고함소리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황상께서 부탁한 혼사를 이렇게 실패하다니, 나도 끝장이다!’
충격에 빠진 남색 옷의 중매인이 궁으로 돌아가 복명(*復命: 명령 받은 일을 집행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함)하자, 창경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가슴을 부여잡았다가 정철을 괴롭히려 남서재로 향했다.
‘뭐? 괜히 남에게 화풀이하는 거라고? 황제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선 안 된다고? 이 황상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제멋대로 굴면 뭐 어때서?’
정철은 창밖에서 몰래 강서를 엿듣고 있던 황상을 발견하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황상을 뵙습니다.”
창경제가 괜히 트집을 잡았다.
“정 수찬, 요즘 육황자의 성장이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도 글자가 삐뚤빼뚤하니 차마 볼 수가 없는 지경이더군.”
정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황상, 신은 육황자의 글씨가 아니라 강서를 맡았습니다.”
“그래? 짐이 헷갈렸나 보군.”
창경제가 책상 옆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정 수찬의 글씨가 아주 훌륭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짐은 해서체, 소전(小篆)체 중 초서(草書)체를 더 좋아하네. 정 수찬, 쓸 줄 아는가?”
정철이 겸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쓸 줄 압니다.”
“그럼 정 수찬이 초서체로 시를 한 수 써보게나.”
정철이 붓을 들고 시를 쓴 뒤 한쪽으로 물러났다.
“소신이 부끄러운 솜씨나마 보여드리겠습니다.”
창경제는 정철의 선풍 같은 필체를 보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정철이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는데, 창경제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정 수찬이 무술도 할 줄 안다고 하던데?”
“예전에 노위국공께 창법을 며칠 배운 적 있습니다.”
“양호(楊虎), 와서 정 수찬과 겨뤄보게나. 정 수찬이 문무를 겸비한 장원랑인지, 짐이 확인해 보고 싶군.”
육황자는 싸움 소식에 두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양호, 적당히 겨뤄야 할 것이네.”
창경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다재다능한 자식을 돼지머리처럼 두들겨 패버리거라. 짐이 상을 내릴 테니!’
그렇게 반주향 뒤, 정철은 돼지머리처럼 두들겨 맞은 양호에게 포권했다.
“양 형,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창경제는 짜증이 났다.
‘역시 다른 집의 자식들이 가장 밉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