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단 노부인의 계획
도 씨가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이 다 모이자, 단 노부인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오늘 무슨 일로 너희를 불렀는지 잘 알고 있겠지.”
그러고는 위국공 부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위국공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도 씨는 얼굴이 달아올라 이 창피함을 참기 어려웠다.
둘째 부인 류 씨는 늘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았기에, 조용히 앉아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넷째 부인 조 씨는 한 씨와 어떤 눈빛을 교환했다.
단 노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손자며느리가 저지른 일은 나에게도 몹시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아이는 이미 국공부의 며느리이고, 우리 한씨 가문에서도 그 아이를 무정하게 내쫓을 순 없다. 게다가 그 애와 한지의 혼사는 황상의 어명이기도 하니, 내쫓고 싶어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게다. 하지만 그런 성품으로는 적자와 적녀를 양육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지.”
단 노부인이 도 씨와 조 씨를 쳐다봤다.
“이렇게 하지. 나중에 평이의 적자 중, 차남을 한지가 양사자로 들일 수 있게 하자꾸나. 아이가 어릴 땐 내 슬하에서 키우겠다.”
이 말에 조 씨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고, 도 씨는 크게 소리쳤다.
“노부인, 절대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말이냐?”
단 노부인이 눈을 흘겼다.
도 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노부인, 그 애가 저지른 잘못을 저희 아들에게 책임을 씌우다니요.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희 아들에겐 서장자 석이가 있지 않습니까. 며느리가 아이를 못 낳게 하더라도, 평이의 적자를 데려올 필요는…….”
단 노부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네 말은, 우리 국공부에 넘치는 적자 적손을 두고, 통방이 낳은 서자에게 작위를 주잔 말이냐?”
도 씨는 말문이 막혔다. 단 노부인이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노위국공이 나중에 조상님들을 어떻게 뵌단 말이냐! 한지가 들인 아내이니, 이건 그 애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이거늘. 너는 왜 불공평하다 여기는 것이냐? 애당초 지에게 용모와 성품 모두 훌륭한 아가씨를 골라주지 않은 것도 아니고, 억지로 맹 씨와 혼인하게 한 것도 아닌데?”
줄곧 안채의 일에 관심 없던 단 노부인이 매섭게 쏘아붙이자, 도 씨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위국공을 쳐다봤다.
단 노부인이 위국공을 한 번 흘겨보더니 손에 든 지팡이를 꽉 쥐었다.
“첫째야, 넌 어찌 생각하느냐?”
위국공이 도 씨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면 곧바로 지팡이를 내던질 생각이었다.
위국공은 왠지 소름이 돋아 급히 대답했다.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도 씨가 비틀거렸다.
“국공야―”
위국공이 도 씨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르신들의 말은 늘 틀린 게 없지 않소. 우리보다 더욱 넓게 보시는 분들이니.”
대량의 어떤 율법들은 벌써 붕괴되어 규율에서 벗어난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중 전 황조 때부터는 가업을 서자에게 물려주느니 차라리 양자로 들인 조카에게 물려준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적자가 첩이나 통방, 혹은 서자에게 음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위국공이 옳은 말을 하자, 단 노부인은 기분이 꽤 풀려 넷째 나리와 조 씨를 쳐다봤다.
“너희 부부는 어찌 생각하느냐?”
넷째 나리와 조 씨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동시에 대답했다.
“당연히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씀대로 해야지요.”
그들에겐 아들이 많았고 나중엔 손주도 많이 생길 테니, 어느 방면에서 생각하든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손자가 있는 건 좋은 일이었기에,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 평이의 혼사를 최대한 빨리 정하자꾸나. 내일 바로 사가에 물어보겠다. 마침 정월이니, 얼른 정해서 정혼하면 딱 좋겠구나.”
두 집안에선 이미 한평과 사효를 이어줄 생각이 있었지만, 아직 두 아이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서두르지는 않고 있었다.
조 씨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가는 학자 가문이었고 가풍이 깨끗한 집안이었다. 사효는 명랑하며 예의 바른 아이이니, 조 씨는 이 혼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도 씨는 기분이 언짢아진 채 가까스로 방에 들어와 침상 위에 쓰러졌다.
* * *
형무원 안, 정미는 무릎 위에 올라온 반어를 쫓아내며 웃었다.
“외조모님께서 정말 사가에 혼담을 꺼내려 하신다고요?”
한 씨가 웃었다.
“그래. 네 큰외숙모의 안색을 봤어야 했는데. 친모가 죽은 것마냥 어둡더구나.”
정미가 턱을 괴며 비웃었다.
“사실 그렇게 억울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죠. 어차피 그 ‘사촌 올케언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니까요.”
한 씨의 눈빛이 굳더니 정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미야, 그게 정말이니?”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독이 몸에 뱄으니 부인과의 명인을 찾아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몸조리해야 그나마 희망이 있을 거예요. 이대로 놔두면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고요. 어머니, 왜 그러세요?”
한 씨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미야,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 것까지 알아볼 수 있다니! 지금 당장 네 외조모님께 말씀드리러 가마.”
한 씨가 급히 떠나자, 남은 정미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가 저렇게 급하신 거람?”
그때 반어가 다시 정미의 무릎에 뛰어올라 통통한 얼굴을 들고 야옹하고 울었다.
정미가 손을 뻗어 반어의 얼굴을 조몰락거리며 경고했다.
“명심해. 앞으로 다신 내게서 오라버니를 뺏으려 하면 안 돼. 오라버니의 넓은 가슴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고!”
“야옹―”
반어는 꼬리로 정미의 뺨을 훑더니 다시 뛰어 내려가 위풍당당하게 떠나갔다.
* * *
황궁 안, 창경제는 시회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고 참고 참다가 화 귀비에게 말했다.
“귀비, 그대의 수양딸 말이오. 아무래도 앞으론 궁에 잘 들이지 않는 게 좋겠소.”
화 귀비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창경제가 떠난 뒤, 화 귀비는 곧바로 걸상을 걷어차며 노발대발했다.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되는구나!”
‘원래는 수양딸을 들여 태자에게 도움이 되게 할 생각이었거늘. 하지만 태자의 추문이 돈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양딸이 또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황상께서 내게 자식을 키우는 능력이 없다 여기시면 어쩌지?’
화 귀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만약 정요가 눈앞에 있었다면 따귀를 내려쳐야만 이 화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밖으로 나온 창경제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미소를 지었다.
‘국공부는 정말 재미있는 곳이군. 미워할 만하면 이런 즐거운 일을 터뜨려주니.’
창경제 뒤를 따르던 주홍희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황상께선 다 좋은데 표정이 너무 풍부하셔서 탈이야!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군!’
* * *
소순궁 안, 숙비는 깜짝 놀랐다.
“진아, 어쩐 일이냐?”
평왕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모비, 궁녀들을 내보내 주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숙비가 손을 내저어 궁녀들을 내보내자, 방 안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말해 보거라.”
“모비, 늘 아들에게 잘해주려 하신 게 맞습니까?”
숙비는 마음이 아파 와 가까스로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넌 내가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었던 아들이다. 모비가 너 말고 누굴 위한단 말이냐?”
숙비는 아들이 황위를 위해 서로를 물고 뜯지 않았으면 했다. 그저 어느 날 황상의 허락을 받고 궁에서 나와 아들과 함께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평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아들은 정가의 셋째 소저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숙비는 살짝 놀랐지만 곧바로 표정을 되찾았다.
아들이 정가의 셋째 여식에게 남다르게 군다는 건 벌써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반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왕야가 왕비를 고르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니, 네 부황께서 동의하셔야 한다.”
평왕이 웃었다.
“모비께서 부황께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그래, 바쁜 시기가 지나면 곧바로 황상을 찾아뵈마.”
“오늘 바로 말씀드릴 순 없습니까?”
숙비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평왕이 설명했다.
“혼기가 찬 여식이니, 당연히 혼담이 많이 들어올 테지요. 일을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네 부황께선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시단다. 운수 공주가 떠나니 서강이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북쪽에선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 패전하기까지 했으니 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닌 것 같구나.”
평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숙비에게 읍을 했다.
“그러니 모비께서 부황께 잘 말씀해 주십시오. 아들도 벌써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었는데, 아직도 왕비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지 않습니까.”
숙비가 평왕의 표정을 살피며 잠시 망설이더니 물었다.
“진아, 정가 셋째 소저가 그리도 좋으냐?”
평왕이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입꼬리를 올렸다.
“예, 처음으로 아내로 맞고 싶어진 아가씨입니다.”
‘정가의 셋째는 내 다리를 고칠 수도 있는 인물인데, 혼례보다 빠르고 편하게 그녀를 들일 수 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평왕의 눈에 자신만만함이 스쳤다.
“그럼 모비, 부황께 넌지시 말씀드려주십시오.”
사실 숙비는 아들이 혼인할 의사를 밝히자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더 이상 황위에 집착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처럼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어서재(御書齋) 안, 주홍희가 들어와 보고했다.
“황상, 숙비마마께서 만나 뵙길 청하셨습니다.”
“숙비가?”
창경제가 반쯤 고친 상주문을 내려놓고 말했다.
“들라 하라.”
잠시 후, 소박한 차림의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창경제는 숙비를 보자 잠시 멍해졌다.
소순궁에서만 지내던 숙비를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창경제는 숙비의 분위기를 아주 꺼려했다.
옅은 단향목 향에, 새까맣게 빛나는 염주, 그리고 변함없는 표정까지. 숙비 앞에 서면 왠지 저도 늙은티가 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소박한 차림은 여전했지만, 새까만 머리에 꽂은 청록색 비녀에는 연분홍색 매화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화사해 보여 숙비 특유의 단향목 향도 지워버리는 듯했고, 그녀의 우아하고 침착한 표정과 아주 잘 어울렸다.
창경제는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숙비, 무슨 일로 짐을 찾았소?”
숙비가 단정하게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진이의 일로 황상을 찾아뵈었습니다.”
“진이?”
“예, 진이가 이 나이 되도록 왕비를 맞지 못했으니, 신첩이 진이의 혼사를 논의하러 찾아뵌 것입니다.”
창경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왕부에 왕비가 필요하긴 하지. 숙비가 마음에 둔 아가씨는 있소?”
“황상, 정가의 셋째 여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가의 셋째 소저? 노위국공의 외손녀 말이오?”
“예.”
창경제가 웃었다.
“당연히 좋지. 하지만 그 아이라면 짐이 사혼을 내릴 수 없소.”
“예?”
창경제가 설명했다.
“그 애는 국사의 제자 아니오. 국사께서 어찌 생각하실진 몰라도, 사혼을 내리는 건 적절치 않은 일이오. 차라리 다른 평범한 집안들처럼 국공부에 중매인을 보내는 것으로 하지.”
숙비가 나간 후, 창경제는 고개를 젖히고 흔들의자에 앉아 눈살을 찌푸렸다가 또 미소를 지었다가 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홍희에게 물었다.
“주홍희, 위국공부에서 이 혼사를 승낙할 것 같은가?”
주홍희가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황자의 혼사에 중매인을 보내는 일은 주홍희가 입궁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가씨의 신분은 평범치 않았고 평왕의 소문도 그리 좋지 않으니, 승낙을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지금 황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당연하지요’라고 대답했다가 혹시라도 국공부에서 거절하면 괜히 약점을 잡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모를 줄 알았다. 나가거라.”
창경제가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주홍희가 나간 후, 창경제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설마 황제의 아들을 거절하겠는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