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94화 (294/375)

294화. 후폭풍

정미가 지의련에게 뒤돌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지 아가씨, 책을 제게 빌려주실 수 있나요?”

《습진유록》은 모든 여인들의 손을 한 번씩 거쳐 다시 지의련의 손에 돌아온 상태였다.

지의련이 책을 건네며 웃었다.

“조심해주세요. 제가 아끼는 책이거든요. 아까 위국공 부인이 이걸로 사람을 때렸을 땐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걱정 마세요. 절대 이걸로 사람을 때리지 않고 소중히 다룰 테니.”

정미는 책을 건네받고 출간된 날짜를 보더니 한지 부부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지 오라버니, 사촌 올케언니. 우선 이 책의 출판 일자를 보셔야지요. 태평 18년, 그때 저는 겨우 7살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여자아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꾸민단 말입니까? 7살의 제가 사촌 올케언니의 대작을 책으로 엮은 걸까요, 아니면 9살의 사촌 올케언니가 이미 전무후무한 시의 천재였던 걸까요?”

한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고, 정요는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이 일자가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지의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의련은 작은 키에 연약해 보이는 몸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여유로웠고, 가슴 앞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말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지요. 이 책을 얻었을 때, 왠지 진귀한 보물을 발견한 것만 같아서 영서의 유명한 선생에게 감정을 받았답니다. 이 책의 종이는 몇 년 전의 종이가 확실하다고 하셨어요.”

지의련이 정미와 정요를 한 번 훑어보더니 방긋 웃었다.

“당신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서는 수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요. 그리고 이 책은 제가 영서에서 얻은 것이고요.”

지의련의 말은, 7살의 여자아이든 아니면 지금의 정미이든, 이런 책을 엮어서 그 멀리 떨어져 있는 영서까지 퍼트리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정요는 큰 충격을 받은 듯 계속 고개를 저었고, 한지는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미가 한지를 흘끗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지 오라버니, 큰외숙모께서 방금 기절하셨으니 숙모님을 뵈러 가는 게 더 중요한 일 같은데요.”

한지는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뗐다.

“세자―”

정요가 저도 모르게 한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한지는 고개를 돌려 복잡한 표정으로 정요를 쳐다보다가, 눈을 꾹 감더니 한숨을 쉬었다.

“우선 어머니를 보고 오마.”

그러고는 제 옷자락을 붙잡은 정요의 손을 하나씩 떼어내더니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구경거리가 끝나자, 남은 사람들도 속속히 떠나갔다.

정미는 그제야 정요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작게 말했다.

“사촌 올케언니. 저는 어려서부터 당신의 넘치는 재주를 존경했지요. 하지만 ‘남의 것은 영원히 남의 것이다’. 세 살짜리 아이도 아는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미가 떠나가자, 용흔이 그녀를 쫓아갔다.

“정미, 잠깐만.”

정미가 그를 쳐다봤다.

“어디 가는 게냐?”

정미가 냉담한 태도로 대답했다.

“큰외숙모를 뵈러 가려고요.”

용흔이 웃으며 말했다.

“같이 가자.”

정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 * *

방 입구에 도착하자 안에서 찻잔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 도 씨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나쁜 자식, 뻔뻔한 놈! 네가 아니었으면 그 천한 것이 우리 국공부에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

“어머니, 제 말을 들어보세요―”

“나가,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

도약연이 한지를 말렸다.

“한지, 고모님께서 많이 흥분하셨어.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으니, 우선 나가 있다가 조금 진정되면 다시 와.”

한지는 멍하니 도약연에게 이끌려 나왔고 나오자마자 정미와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한지는 결국 정미에게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처량한 모습으로 떠나갔다.

정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요가 시를 표절했다는 걸 까발렸으니, 국공부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거야. 이 때문에 정요뿐만 아니라 국공부 사람들 모두가 피해를 입은 셈이지. 특히 한지의 자식에게. 누가 이런 역겨운 성품을 가진 여인의 자식에게 혼담을 꺼내겠어? 하지만―’

정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정요는 한독(寒毒)이 있으니, 아이를 낳을 수 없잖아. 하지만 후회는 조금도 없어. 정요가 평생 국공부의 날개 아래 숨어서 재녀의 명성을 떨치며 살게 할 순 없잖아?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불결한 손자며느리라면, 외조모와 다른 어른들도 그 진짜 모습을 똑똑히 알고 싶어 할 거야. 그런 손자며느리가 후대를 망치게 둘 순 없으니.’

정미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 씨는 노랗게 질린 얼굴로 침상 위에 누워있다가 정미가 들어오자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세손과 정미가 왔구나.”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위국공이 한숨을 쉬었다.

“네 외숙모가 많이 피곤한 것 같으니, 우선 돌아가 보거라.”

정미는 무릎을 살짝 굽혀 절을 올리고는 용흔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정미, 너무 상심 말거라. 국공부는 이 정도 일로 흔들리지 않으니. 수도에 창피한 일이 없는 가문이 어디 있겠어.”

정미가 웃기다는 듯 용흔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속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쁜 일도 아니지요. 그렇지 않나요?”

‘작은 패왕은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모르겠네. 설마 또 무슨 속셈이 있는 건 아니겠지?’

“기다려보거라. 기쁜 일은 곧 생길 테니.”

용흔이 눈을 찡긋하더니 정미를 뿌리치고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정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휘휘 젓고는 형무원으로 돌아가 화미에게 정철을 불러오라 명했다.

* * *

기다림의 시간은 늘 애타는 법. 정미는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화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둘째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정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너희 모두 물러나 있거라.”

정철이 문 앞에 나타나자, 화미와 환안이 물러났다.

“미미―”

정철이 미소 지으며 정미를 쳐다봤다.

그러자 정미가 정철에게 달려들어 가느다란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문어처럼 들러붙었다.

정철은 순간 멍해졌다가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외쳤다.

“미미, 내려가!”

“싫어. 오랫동안 오라버니를 보지 못했잖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정미가 위쪽으로 조금씩 기어 올라가며 배시시 웃었다.

“오라버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부드럽고 향기 나는 여인이 품에 뛰어들자, 정철은 달콤하면서도 괴로워져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반어가 천천히 다가와 고개를 갸웃대며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폴짝 뛰어 정철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발톱을 세워 정철의 옷섶을 쥐었다.

“야옹―”

정미가 피식 웃었다.

“봐봐, 반어도 오라버니가 보고 싶었다잖아. 맨날 오라버니만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정철이 급히 침상으로 걸어가 정미를 내려놓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오라버니를 놀리면 안 되지.”

그러곤 그가 이어 말했다.

“오늘 재밌었어?”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오라버니, 그 《습진유록》말이야. 오라버니가 퍼트린 거야?”

“그럼 누가 퍼트렸겠어? 그때 다 얘기했잖아. 이 일은 오라버니가 처리하겠다고.”

“그럼 종이는 어떻게 한 거야? 몇 년 된 종이라던데.”

“서재를 운영하는 친우가 있는데, 마침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종이가 남아있대서.”

“서재를 운영하는 친우도 있다니, 그 사람은 한수 선생을 알아?”

“응. 안다고 하던데.”

정미는 곧바로 흥미가 일었다.

“한수 선생은 어떤 사람이래?”

정미가 신나하자, 정철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미는 한수 선생이 어떤 사람일 것 같은데?”

“한수 선생은―”

정미는 잠시 고민했다.

“아침에 나뭇가지를 들여다보니(*朝來試看靑枝上), 눈송이(*한수寒酥)가 아직도 피어있구나(*幾朶寒酥未肯消). ‘한수’는 눈송이를 의미하잖아. 한수 선생은 눈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 같아. 한수 선생의 화본은 주인공의 감정을 아주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규율을 벗어난 짓을 저질렀다가 두 사람이 이어지는 장면도 자주 나오고. 그러니까 한수 선생은 겉은 냉담해 보여도, 속마음은 아주 뜨겁고 문란한 사람일 것 같아.”

정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속마음이 뜨거운 건 알겠는데, 문란한 건 또 뭐람?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오라버니?”

정철이 목을 가다듬었다.

“됐어. 너와 상관없는 사람은 그리 관심 가지지 않아도 돼.”

‘절대 내가 한수 선생이라는 걸 미미가 알게 해선 안 돼!’

정미가 입을 삐죽였다.

“그럼 그 책이 어떻게 영서까지 간 거야? 수도에서 그렇게나 먼데.”

“그건 어떻게 한 건지 미미도 알고 있을걸.”

“응?”

정철이 정미를 쓰다듬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잖아.”

“아, 그렇지! 오늘 내가 일만 냥을 기부했을 때, 큰외숙모의 표정을 오라버니가 봤어야 했는데.”

그러고는 정철을 흘끗 쳐다보더니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오라버니, 내가 돈을 함부로 썼다고 꾸짖을 거야?”

정철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돈은 쓰려고 모으는 거잖아. 하지만 앞으론 조심하도록 하자. 괜히 성가신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성가신 일?”

정철이 한숨을 쉬었다.

“곧 알게 될 거야.”

* * *

형무원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한지와 정요의 분위기는 차가웠다.

“세자,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정요에게 이런 두려움은 난생처음이었다.

시회에서 망신을 당한 건 거리에서 옷이 발가벗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이 약한 자였다면 이미 목매달아 죽을 곳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요는 죽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얻은 신분과 지위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지 오라버니,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이제 제겐 당신뿐이잖아요.”

정요가 한지의 품에 뛰어들어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여린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체취와 촉감에 한지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정요를 휙 밀어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요, 난 줄곧 너를 연모해왔고 늘 네 생각만 해왔지. 하지만 그게 내가 바보란 뜻은 아니다!”

정요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지 오라버니―”

한지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생각을 좀 정리해보마. 혼자 있게 해줘.”

그러고는 뒤돌아나가다가, 입구에 멈춰 서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앞으로 서재 혹은 반반의 거처에서 지낼 테니, 날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정요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더니, 탁자 위의 찻잔을 다 쓸어버리고는 의자에 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당연히 단 노부인의 귀에도 들어갔고, 단 노부인은 곧바로 아들과 며느리들을 불러 모았다.

“맏며느리는 어디 있느냐?”

위국공이 대답했다.

“부인은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마신 뒤 누워있습니다.”

단 노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장자를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불러오거라. 걸을 수 없으면 여종들에게 들고 오라고 해. 이 일은 오늘 너희와 확실히 얘기해봐야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