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92화 (292/375)

292화. 까발리다

“도 형, 도 형, 무슨 일인가?”

도약연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네.”

“그럼 여섯 번째 시인가, 아니면 열다섯 번째 시인가?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겐가?”

“조금 더 보겠네.”

도약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만약 내가 회성에서 그 책을 보지 못했다면……. 하지만 이 두 시는 분명 그 책에 적혀 있던 시잖아!’

도약연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반 시진 정도 지나자 시 열 수의 순위가 정해지고, 병풍 앞에 있는 시녀들의 쟁반엔 대부분 매화 가지가 매우 적었지만, 여섯 번째와 열다섯 번째 병풍 앞에 서 있는 시녀는 쟁반에 매화 가지가 다 담기지 않아 바구니에 담겨있었다.

집계가 끝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여섯 번째 시와 열다섯 번째 시가 얻은 매화 가지의 수가 각 408개로 똑같았던 것이다.

“이건―”

누군가 제의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드니, 공동 1위로 하지요.”

사람들이 맞장구쳤다.

“그래, 그럽시다. 두 시 모두 1위에 걸맞은 시이니,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 없지요. 어느 집안의 재녀가 지은 시인지 어서 봅시다.”

“붉은 비단을 들어내 보거라.”

사람들 중 신분이 가장 높은 남안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녀가 병풍으로 다가가더니, 희고 매끈한 손으로 붉은 비단을 벗겼다.

두 병풍의 왼쪽 아래 적힌 낙관이 드러나자 정적이 흘렀다.

<위국공부 맹씨>

사람들은 숨을 들이켜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다가 위국공 세자 한지를 쳐다봤다.

‘두 시 모두, 위국공 세자 부인이 지은 시라고?’

‘이 얼마나 놀라운 재주인가. 병풍 뒤 휘장 때문에 그 재녀의 풍채를 볼 수 없는 게 아쉽군!’

시선이 쏠리는 느낌이 들자, 한지는 애써 태연한 모습을 지어냈다. 하지만 마음속은 이미 휘장 너머로 날아가 있었다.

‘역시 두 시 모두 정요가 지은 시일 줄 알았지. 수도의 여인 중, 정요를 제외하면 누가 이런 시를 지을 수 있겠어?’

1위가 정해지자, 위국공 세자는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찬양과 아첨이 끊이질 않았다. 술잔이 넘나들며 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랐지만, 그중 두세 사람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병풍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결과가 나왔습니까?”

여자 손님들은 기대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남자 손님들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휘장 너머로 느껴졌다.

남자 손님 쪽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여선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두 시가 공동 1위를 했는데, 두 시 모두 한 사람이 쓴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때 공동 1위를 차지한 두 병풍이 이쪽으로 옮겨져 왔고 모두의 눈에 두 시가 들어왔다.

“역참 밖 끊어진 다리 옆, 매화가 조용히 피어있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네…….”

“몰아치는 비바람도 봄을 막을 수 없듯, 휘날리는 눈도 봄을 맞이하는 것일 뿐…….”

사람들은 두 시에 완전히 빠져 중얼거리며 읊었고 한참 곱씹더니 마침내 낙관이 적힌 곳을 쳐다봤다.

“위국공부 맹씨.”

사람들은 고개를 휙 돌려 단정히 앉아 있는 정요를 쳐다봤다.

어떤 시에 깊이 빠져든 여인이 감격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예전엔 ‘수도 제일 재녀’라는 호칭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시야가 좁았구나.”

장 재상의 어린 딸이었다.

옆에 있던 그녀의 친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로 시집오기 전엔 우리와 같은 무리도 아니었고, 서녀이기도 해서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거든. 이렇게 재주가 넘치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때 친목을 다져둘 걸 그랬어. 아휴, 아쉬워라. 아쉬워!”

수도의 귀녀들은 각기 어울리는 무리가 달랐다. 황제의 친척이 한 무리, 또 훈귀 가문이 한 무리, 그리고 명문 세가(世家)가 한 무리, 마지막으로 장군 가문이 한 무리를 이루었다.

연회와 사교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무리라고 하더라도 교집합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뚜렷한 선을 지키며 제 무리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소녀들이 정요가 지은 시에 충격을 받아 미리 정요와 친분을 다져놓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을 때, 부인들은 위국공 부인 도 씨를 둘러싸고 연이어 감탄했다.

“역시 도 부인의 며느리군요. 며느리를 아주 잘 고르셨습니다, 부인. 나중에 손자가 생기면, 조모와 모친이 모두 재화가 출중하니 장원랑이 되겠군요.”

도 씨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이 부인. 시와 노래는 그저 인격도야(*人格陶冶: 인격을 마치 질그릇을 굽고 쇠를 풀무질하듯 닦고 가다듬음.)일뿐, 과거 시험과는 다르지요. 하지만 오늘 며느리가 1위를 차지하여 장병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으니, 무척 기쁩니다.”

“세자 부인은 재화도 출중하고, 마음도 고우시군요. 이번 시회도 세자 부인이 제의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부인이 뒤처질세라 칭찬했다.

“여태 저희가 열었던 시회는 그저 유흥을 위한 것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세자 부인은 시회와 장병들을 연결해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도움을 주었지요. 이런 생각을 하다니, 세자 부인은 정말 총명하고 선량하군요. 도 부인,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 씨는 얼굴을 붉히며 기쁜 기색을 숨기질 못했지만 애써 담담한 모습을 지어냈다.

“겸손이 아닙니다. 아직 어린아이이니, 그리 떠받들어주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도 씨를 보던 서 부인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병풍만 쳐다보고 있는 딸 서가복을 조용히 꼬집으며 작게 말했다.

“이 녀석아, 그만 정신 차리거라. 평소에 내가 그렇게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고 얘기했거늘, 절대 듣지 않더니! 다 큰 아가씨가 종일 무기나 갖고 놀고, 재주는 기르지 않고 말이다. 다 내 말을 듣지 않은 탓이다. 저 두 시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렇게 한참 쳐다보면 웃음거리가 될 게다!”

서 부인은 말할수록 화가 나 더욱 세게 서가복을 꼬집었다.

서가복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서 부인은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딸을 매섭게 노려봤다.

어떤 아가씨가 피식 웃더니 친우와 작게 이야기했다.

“저 아가씨가 바로 그 서 아가씨인가 보다. 스무 살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시집을 못 갔다나. 싸움과 나무에 오르는 걸 잘한대. 근데 글재주는…….”

서가복이 어떤 사람이던가? 어려서부터 부형에게 무술을 배웠기에 평범한 여인들보다 귀가 훨씬 밝았다. 아가씨들의 말을 똑똑히 들은 서가복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 부인이 깜짝 놀라 딸을 붙잡았다.

“가복아, 뭐 하는 거니?”

‘세상에, 내 딸이 또 사고를 치려 하는구나.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워서 힘이 어찌나 센지, 한번 싸움이 일면 절대 못 막는다고!’

서가복은 서 부인이 붙잡든 말든 사람들을 빙 둘러보고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차갑게 웃었다.

“글재주요? 그래요. 나 서가복에겐 글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 짓기에도 감히 참여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제가 아무리 재주가 없다고 해도, 다른 이의 시를 표절하는 짓은 절대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표절?”

사람들이 멍해졌고 현장에 정적이 흘렀다.

서 부인이 다급하게 서가복을 붙잡았다.

“가복아,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얼른 앉거라!”

서가복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머니, 말은 다 마치게 해주세요. 이대로 앉으면 다들 제가 정말로 허튼소리를 하는 줄 알걸요.”

서가복이 또다시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더니 손가락으로 병풍을 가리켰다.

“참으로 좋은 시지요. 시를 잘 모르는 제가 봐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서가복이 고개를 돌려 굳은 안색의 정요를 한 번 노려보더니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위국공부의 맹씨가 재녀라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며 수군거렸다.

“서 아가씨,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닐까?”

“혹시 모르지.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 위국공 세자 부인에게 화풀이를 하는 걸지도? 방금 나도 어머니께 눈총을 실컷 받고 왔다고. 저 시보다 훌륭한 시를 못 내어서 말이야.”

이 사람들 중, 어떤 청초한 외모의 아가씨가 한 명 있었는데, 수도의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지 않아 낯선 얼굴이었다. 그녀는 바로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서(嶺西) 총독(總督)의 여식, 지(池)씨 가문의 의련(依蓮)이었다. 지의련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음미하듯 웃고 있었다.

정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아가씨, 무슨 오해가 있나 본데 이따 이야기하며 풀도록 하지요. 제가 예전에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지금 바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요의 말에 사람들은 서가복이 세자 부인을 질투하는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정요는 잊고 있었다. 서가복은 보통 아가씨와 달랐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하는 시선 속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은 채,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크게 외쳤다.

“내가 당신을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하고 있는 거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요의 표정이 구겨졌다.

서가복이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병풍 앞으로 걸어가더니, 병풍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잘 보세요. 이 시는 훌륭한 시지만, 위국공 세자 부인께서 직접 지은 시가 아닙니다!”

“뭐라고!?”

현장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서가복은 창백해진 얼굴의 정요를 한 번 훑어보더니 크게 외쳤다.

“저는 두 달 전 회성의 친척 집에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때 우연히 어떤 책을 보게 되었는데, 작자가 고서에서 우연히 발견한 절묘한 시들을 옮겨놓은 책이었습니다. 시는 백 수 남짓으로, 그중에 이 두 시도 있었지요. 세자 부인께 여쭙겠습니다. 이 시가 세자 부인께서 쓴 시라면 어찌 잡서에 기록되어있던 겁니까?”

“잡서? 무슨 잡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요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철없는 아이를 대하듯 말했다.

“서 아가씨, 저는 혼인하기 전에도 시를 짓곤 했으니, 그 시들이 퍼져나가 누군가 옮겨 적었을지도 모릅니―”

서가복이 차갑게 웃으며 정요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오늘 세자 부인께서 즉흥으로 지어낸 시가 왜 그 책에도 수록되어 있던 겁니까? 정말 재밌는 일이군요. 오래전부터 유통되던 책에 수록된 시가, 세자 부인께서 예전에 지어낸 시가 퍼져나간 거라고요? 차라리 세상 좋은 시 모두가 세자 부인께서 지은 시라 말씀하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사람을 보내 저희 집에서 그 책을 가져오라 할 테니.”

이때, 누군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마침 제가 가지고 있으니.”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왠지 천둥처럼 크게 들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청초한 외모를 가진 영서 총독의 여식, 지의련이었다.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지의련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모두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어느 집 아가씨지?”

“모르겠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그중 눈썰미가 좋은 소녀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저 옷 좀 봐. 눈에 띄지 않는 옷이지만, 여러 가지 색이 섞인 비단이잖아. 우리 어머니가 상자 아래 보관해놓은 옷감 중에도 저게 있는데, 내가 시집갈 때 만들 옷감이라면서 절대 건들지 못하게 하셔.”

옆에 있던 소녀가 급히 말했다.

“머리에 꽂은 구슬 좀 봐. 상청주(上淸珠)잖아. 서강(西薑)의 공물이라고.”

소녀의 차림새만 봐도 보통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엄청난 부자거나, 귀한 신분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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