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함 안의 물건
한편 위국공부 안, 정미는 정요가 연 시회가 이리 장중할 줄은 몰랐다.
시를 지어 기부하는 자리이니 각 가문의 부인과 아가씨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부군, 부형 등, 이날 시간이 비는 사람들은 모두 찾아와 성원해주었다.
상매연은 청설림에 긴 휘장을 둘러 여자 손님과 남자 손님을 나누었다.
시회의 규칙은 여자 손님 쪽에서 시를 지으면, 익명으로 휘장 맞은편의 남자 손님에게 보내고 시를 평가하여 은자를 기부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모인 은자는 모두 방한 물자를 구입해 장병들을 지원하는 데에 쓰일 예정이었다. 그리고 시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모인 은자를 상징하는 붉은 돈 봉투를 직접 출정하는 대장군에게 전달하여 장병들에 대한 수도 여인들의 마음을 표하게 했다.
시회는 정요가 개최한 것이었지만, 시회를 진행하는 사람은 위국공 부인 도 씨였다.
규칙을 설명한 뒤, 늘 허약했던 도 씨도 오늘은 혈기왕성하여 안색이 몹시 환했고 우연히 정요와 눈이 마주치자 보기 드물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치밀어 오르는 뿌듯함을 애써 꾹 눌렀다.
‘도 씨 같은 시어머니에 대응하려면, 걸맞은 대안을 써야지. 도 씨는 학자 가문 출신이었고, 스스로를 재녀라 자만하지. 이런 사람에게 장병들을 위한 기부 시회를 여는 것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게 있겠어?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수많은 칭송을 받았는데, 여기서 가장 뛰어난 시를 내놓으면 앞으로 도 씨가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할 리 없지.’
도 씨와 몇 번 다투고 난 후 정요는 깨달았다. 사내가 저를 아무리 은애한다 해도, 그의 아내가 된 후론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할 때 절대 항상 아내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금 시대에 시어머니가 일부러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건 아주 흔하고 쉬운 일이었다. 도 씨가 정요를 더 이상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노부인도 손자며느리인 정요에게 왈가왈부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의 으뜸은 당연히 정요의 것이 될 테니, 이 시회가 끝난 뒤 정요의 명성은 고작 여인들 사이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정미는 도포를 입지 않았고 너무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차림새였다.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니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용모가 너무 출중한 탓에 조용히 섞이려 할수록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었다.
이를 본 정요가 몰래 이를 갈며 다가갔다.
“미 동생, 왔구나. 어찌 여기 앉아 있어? 저쪽에 일부러 자리를 비워뒀는데.”
정미는 정요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정요는 내가 참 마음에 드나 보다. 우리 둘의 자리를 붙여두다니. 나중에 시를 지을 때, 내 초라한 시와 제 것을 비교하려는 속셈이겠지?’
정미가 일어나 무덤덤하게 말했다.
“사촌 올케언니께서 제 자리를 마련해두셨다니,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정요가 정미의 손을 잡았다.
“오늘 미 동생이 자리를 빛내주니 나도 아주 기뻐 안 올 줄 알았거든.”
정미가 망설임 없이 손을 빼며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정요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루 종일 도법과 부술을 연구하고 있으니, 이런 속세의 일엔 관심 없는 줄 알았지.”
정미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 말은 틀리지요. 장병들에게 기부하는 일은 절대 속세의 일이 아닙니다. 대량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특히 저희는 변방의 장병들 덕분에 호의호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고는 정요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자리로 가 앉았다.
그렇게 시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청설림을 가득 메운 매화나무는 이맘때 모두 꽃망울을 피워내며 은은한 꽃향기 퍼트렸고, 그 절경은 한눈에 담기도 벅찰 정도로 아름다웠다.
변방의 장병들을 위한 기부 시회라곤 하지만 보통 시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라곤 휘장으로 남녀를 나눈 것뿐이었다. 휘장 너머로 술을 마시며 매화를 감상하는 남자 손님들은 여자 손님들의 부형 혹은 부군이거나 마음에 둔 잘생긴 청년들이었기에, 여자 손님 쪽의 분위기가 조금 미묘해졌다.
모두가 최고의 시를 내놓을 순 없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재주를 최대한 뽐내야만 했다.
잡담을 나누고 매화를 감상한 뒤, 시를 짓는 시간이 다가왔다.
상매연에서 열린 시회이니, 시의 주제도 당연히 매화였다. 시 짓기에 참여한 여인들 앞에 화선지가 펼쳐지고 시종들이 먹과 붓을 바쳤다.
그때 장밋빛 배자를 입은 여종이 다가오더니 정미에게 종이를 펼쳐주고 먹을 갈았다.
“치우렴. 난 시 짓기에 참여하지 않을 테니.”
정미가 눈을 들어 여종에게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굳은 눈빛으로 여종이 손에 몰래 쥐여준 종이를 꽉 잡았다.
여종은 얌전히 ‘예’하고 대답하고는 먹과 붓을 치웠다.
정요가 정미를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
“어찌 붓과 먹을 치우는 거야?”
“저는 시를 지을 줄 몰라서요. 필요 없거든요.”
정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요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세자께서 말씀하시길, 미 동생은 금기서화 모두를 섭렵했다던데. 시를 지을 줄 모르다니?”
정미는 정요를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옮겨 그녀 앞의 화선지를 쳐다보며 웃었다.
“저는 늘 이렇답니다.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걸 택하지요. 사촌 올케언니, 시에 집중하세요. 시간이 모자라면 어쩌시려고요.”
정요는 미리 생각해둔 시가 있는 듯 조금도 조급해 보이지 않았고 난처한 듯 말했다.
“그 말은 동의할 수 없네. 이 시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한 사람뿐이야. 다들 미 동생의 말처럼 차라리 참여하지 않는다면, 누가 북방의 장병들을 도운단 말이야?”
정미가 귀찮다는 듯 하품했다.
“재밌는 말이네요. 제가 시를 짓지 않는다고 장병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정미가 손을 흔들자, 여종이 다가왔다.
“아가씨, 명령하실 게 있습니까?”
“이걸 위국공 부인께 전해드리며 말씀드리거라. 난 시를 지을 줄 모르고 보잘것없는 시를 내보이기도 창피하니, 미리 돈을 기부해 성의를 보이겠다고.”
정미가 평범한 작은 함을 시녀의 손에 쥐여주자 여종이 잠시 멈칫하더니, 절하며 대답했다.
“예.”
정요는 멀어져가는 여종의 뒷모습을 보며 몰래 비웃었다.
‘돈으로 해결하려고? 정미처럼 헤픈 계집이 얼마나 많은 돈을 낼 수 있다고. 10냥? 20냥? 아니면 100냥? 이 우아한 시회에 코 묻은 돈을 내다니, 정말 어리석구나. 돈을 쓰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계집이로군.’
정요는 계속 그 여종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도 씨는 며느리에 대한 칭찬과 아첨을 귀에 흘러넘치도록 들은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아 간식도 평소보다 몇 조각이나 더 먹고 있었다.
이때, 장밋빛 배자를 입은 여종이 다가와 절을 올렸다.
“부인, 사촌 아가씨께서 전달하라 명하신 물건입니다.”
도 씨가 평범하게 생긴 함을 흘끗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사촌 아가씨?”
“예, 사촌 아가씨께서 시 대신 먼저 돈을 기부해 성의를 표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도 씨의 웃음기가 차갑게 굳더니 멀리 앉아 있는 정미를 흘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역시 그 어미에 그 딸이로구나. 한 씨가 무학무능하니 딸도 마찬가지로군. 시를 짓지 못하더라도, 모양새만 내어도 되지 않은가. 이렇게 솔직하게 못 짓는다고 말하며 겨우 이런 함으로 메우려고 하다니. 정말이지 국공부의 망신이 따로 없군.’
도 씨는 생각할수록 창피함을 느꼈다. 정미 옆에 앉은 정요를 쳐다보자, 예전처럼 밉지 않았다.
‘맹 씨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이런 장소에선 절대 망신을 주지 않지. 그래, 앞으로 맹 씨가 얌전하게 굴면 나도 가만히 두도록 해야지. 아들이 그리도 좋아하는데.’
도 씨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말했다.
“사촌 아가씨? 국사의 제자가 된 그 사촌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그 부인은 장 재상의 아내였고, 자리에 있는 귀부인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쪽에 속했다. 원래 이런 시회엔 잘 참여하지 않았지만 변방의 장병들에게 기부한다는 명분이 있으니, 문관의 최고 자리에 있는 장 재상의 아내이기도 하고, 며느리의 불임을 치료해준 국사의 제자에게 호기심이 일기도 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도 씨는 왠지 창피해져 함을 뒤에 있는 여종에게 넘겨주었다.
다른 부인이 말했다.
“국사의 제자는 역시 보통 아가씨와 다르군요. 함엔 뭐가 담겨있을까요?”
또 다른 부인이 웃었다.
“보석이나 장신구라면 저희도 재미없지요. 아마 국사께서 사촌 아가씨께 하사한 보물 아닐까요? 국공 부인, 얼른 열어봅시다.”
“음―”
도 씨가 망설이며 속으로 정요를 실컷 욕했다.
‘조용히 넘어가려고 해도 안 되겠구나. 어린 계집이 고작 이런 함에 뭐 좋은 걸 담아뒀겠어? 몇백 냥 정도의 장신구라 해도 큰일 날 정도인데, 만약 평범한 장신구라면 큰 망신을 당하겠구나.’
도 씨가 망설이자, 부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함에 대한 호기심 외에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옆에 있던 한 씨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정미가 기부한 물건이니, 큰올케언니가 열어보시지요. 오늘은 기부를 위한 시회 아닙니까. 누가 시를 짓고 누가 얼마나 기부했는지, 어차피 다 기록할 것 아닌가요?”
‘나 한명주의 딸이 보잘것없는 물건을 냈을 리 없지!’
한 씨는 확신하고 있었다.
모두가 기대하고 또 한 씨가 직설적으로 요구하자, 도 씨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미가 뭘 보냈는지 한번 봅시다.”
도 씨는 그 평범한 재질의 함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빴기에, 옆에 있던 여종 청아에게 열라 명했다.
청아가 함을 열었고, 안에 은표가 접혀있는 걸 보고는 처음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곧바로 눈이 커지며 멍해졌다.
도 씨는 늘 진중하던 여종이 부인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청아―”
청아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함을 도 씨 앞에 받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함 안에 은표가 있습니다…….”
“음, 은표였구나. 그래서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군.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고 나중에 잘 기록 해두거라. 사촌 아가씨의 성의이니.”
도 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은표는 최소 5냥부터 시작하니, 함 안에 있는 돈은 몇백 냥 정돈되겠지. 국사께서 하사하신 물건보다는 아니지만, 장신구가 들어있는 것보단 낫군.’
“청아?”
여종이 꿈쩍도 하지 않자, 도 씨는 슬슬 짜증이 났다.
청아가 손을 떨며 함을 건넸다.
“부인, 이…… 일만 냥이나 들어있습니다!”
‘일만 냥이라니?’
대량의 정5품 관원이라 해도 연봉이 쌀 이백 석 정도밖에 안 되었고, 이를 환산하면 은 백 냥이었다. 장 재상 같은 고관들은 부가 수입도 있지만, 그래봤자 은 사백 냥 정도였다. 그러니까 일만 냥은 아주 큰 돈이라는 것이었다.
자리에 있던 귀부인들에게 일만 냥이 생소한 금액은 아니었지만, 이런 시회에서 어린 아가씨가 내는 돈치고는 너무 충격적인 액수였다.
한참 뒤, 장 부인이 감탄했다.
“역시 국사의 제자는 다르군요.”
‘내 딸과 나이도 비슷한데, 내 딸은 아직도 내게 연지를 사야 한다고 돈을 뜯어 가는걸.’
도 씨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한 씨를 쳐다봤다.
‘시누이가 부자인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딸에게 이렇게나 많이 준비해두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