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3개의 부탁
“미야, 그게 무슨 소리냐?”
위국공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지는가 싶었으나, 곧바로 다시 온화한 모습을 되찾았다.
정미가 위국공의 손목 위에 손을 얹더니 차가운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았다.
“외숙부, 여기 힘줄이 끊어졌지요. 최근 계속 이쪽 분야의 부술을 연구하고 있었거든요. 한번 시도해볼 수 있겠어요.”
위국공이 벌떡 일어나 정미를 빤히 쳐다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야, 어른과 농을 쳐선 안 된다.”
“외숙부!”
정미가 어이없다는 듯 위국공을 부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잊으셨어요? 저는 청령진인의 제자라고요. 어떻게 이런 일로 외숙부께 농담을 할 수 있겠어요.”
위국공의 손목은 위국공 스스로조차 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 아픔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늘 소탈하던 그가 망설였다.
“하지만―”
“외숙부, 뭐가 그리 걱정되시는 거예요. 최악의 결과라 해봤자,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지 않나요?”
위국공은 잠시 멈칫하더니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래. 내가 너무 걱정이 많았구나. 네가 할 수 있다고 하니, 마음껏 시도해 보거라. 치료하다 더 악화되어도 상관없다. 나는 이미 왼손을 쓰는 데 익숙해졌으니.”
“그럼 한번 시도해볼게요. 다만 제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 외숙부께서 들어주셨으면 해요.”
“말해보려무나.”
“제가 치료에 성공하더라도, 절대 이 일을 남들에게 알리지 말아주세요.”
위국공이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마.”
위국공의 손목은 한참 오래된 부상이었고 끊어진 힘줄은 이미 붙어있었기에 다시 끊어낸 후 알맞은 부수로 치료해야 했다.
정미는 사흘 동안 준비를 마친 뒤 사람들 몰래 위국공에게 찾아가 손을 치료해주었다.
“미야, 이걸로 다 된 것이냐?”
위국공이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목에는 새하얀 면포가 두껍게 둘려 있었으나, 위국공은 지통부를 마셨기에 아무 감각이 없어 더욱 믿지 못했다.
정미가 웃었다.
“내일 아침이면 면포를 풀어보셔도 돼요. 하지만 오늘은 서재에만 계세요. 다른 사람들에게 손목에 면포를 감고 있다는 걸 보이지 마시고요.”
“그래. 얌전히 서재에 머무르고 있으마. 아무도 이 일이 너와 관련된 것임을 알지 못할 게다.”
그날 밤, 위국공은 사람을 보내 도 씨에게 오늘은 서재에서 머문다고 전한 뒤 낮은 평상 위에 누워 이리저리 잠을 뒤척였다.
방 안의 화로가 충분치 않은 탓인지, 낮은 평상이 따뜻한 토항만큼 편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평상 위에 깐 요가 너무 얇은 탓인지, 위국공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가 손을 들어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래전 이미 마음을 접은 줄 알았더니, 치료에 대한 희망이 생기니 애송이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됐다. 그냥 안 자면 되지. 오늘 하룻밤이면 되는데.’
위국공은 아예 몸을 일으켜 외투를 걸친 뒤 책상 앞에 앉아 병서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는 것도 잊은 채 책에 빠져 있다가,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눈을 비비며 책을 내려놓고 손목을 쳐다봤다.
조카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내일 아침이면 면포를 풀어보셔도 돼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손목이, 고작 하룻밤 만에 다 나을 수 있다고?’
위국공은 손목에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고는 한참 면포를 건드리지 않았다.
한참 뒤, 위국공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 이리 꾸물대는지.”
그는 이를 악물고 면포를 풀었고 이윽고 손목이 드러났다.
흉측한 흉터는 여전히 손목 위에 남아있었고, 울퉁불퉁한 형태도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제 손목을 베었던 곳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위국공은 면포를 바닥에 던진 뒤, 천천히 오른손을 쥐어봤다.
그의 눈빛이 순간 굳더니 기쁜 기색이 드러났다.
뻣뻣한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고작 하루 만에 치료된 건가?’
위국공은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화선지를 펼치고 자주 쓰는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오른손을 쓰지 않은 탓에 조금 어색하고 서툴긴 했지만, 위국공은 제가 쓴 글자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말아 화로 안에 던졌고, 종이가 재가 된 뒤에야 밖으로 나가 세수하는 것도 잊은 채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창법을 한번 연습해보자 위국공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갓 태어나 날개를 펼쳐 언제든 구름 속으로 날아갈 수 있는 새처럼 상쾌했다.
기척이 느껴지자, 위국공이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웃으며 그를 지켜보는 정미가 보였다.
아침 햇살 아래 소녀의 모습은 가슴 깊이 스며드는 이슬처럼 평안하고 아름다웠다.
위국공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정미가 웃었다.
“외숙부, 축하드려요.”
위국공은 아무 말 없이 정미를 들어올렸다. 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정미가 어렸을 때처럼 그녀를 들고 한 바퀴 돌더니, 수염을 비비려고까지 했다.
정미는 깜짝 놀라 손으로 위국공의 얼굴을 막으며 소리쳤다.
“외숙부, 아직 세수도 안 하셨지요?!”
위국공은 그제야 어색한 표정으로 정미를 내려놓았고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야, 말해 보거라. 원하는 게 있느냐? 하늘의 별을 따와 달라 해도 내 기필코 방법을 찾아보마.”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그럼 대신 세 가지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래, 말해 보거라. 이 외숙부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정미가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첫 번째, 비밀을 지켜주세요. 저는 사람들이 제가 외숙부 같은 오랜 부상도 치료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으면 해요.”
정미가 하필 이때 위국공의 부상을 치료한 이유는 외숙부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어서도 있었지만, 다른 방면으론 평왕을 유인하기 위함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왕을 유인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진 않았다. 특히 태자가 정미가 평왕을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정미의 목숨을 앗아가려 할 터였다.
위국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걱정 말거라. 절대 비밀을 지킬 테니.”
“그럼 두 번째, 큰외숙부께서 북쪽에서 승리하여 무사히 돌아오셨으면 해요.”
위국공이 잠시 멈칫하더니 따뜻한 눈빛으로 큰 손을 뻗어 정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 그럼 세 번째는 무엇이냐?”
“세 번째는―”
정미가 위국공을 흘끗 쳐다보더니 얼굴에 홍조가 스쳤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당당했다.
“세 번째 부탁은,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지면, 그 사람이 누구든 외숙부께서 이뤄주셨으면 해요.”
위국공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정미가 많이 컸구나. 그렇게 하마.”
“외숙부, ‘누구든지’예요. 잘 생각하셔야 해요. 승낙하신 후에는 절대 돌이킬 수 없다고요.”
위국공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들었다. 누구든지 간에, 정미 네가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내 기필코 이뤄주도록 하마. 네 외조모와 어머니에게 이의가 있다고 해도 무조건 너를 도우마. 이제 되었느냐?”
정미가 찬란하게 웃으며 절을 올렸다.
“그럼 미리 감사드릴게요, 외숙부. 이제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연습하세요. 저는 외조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보겠습니다.”
소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자, 위국공이 씨익 웃었다.
‘정미에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나 보군. 어떤 애송이가 이런 행운을 누릴는지.’
* * *
다음 날 조정, 신하들은 북쪽에 보낼 주장에 대해 의논 중이었다. 모두 목을 세우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팽팽하게 대립해서 조정은 가격을 흥정하느라 떠들썩한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창경제는 무표정으로 용상에 앉아 있었으나 속으론 무척 짜증이 났다.
‘이런 쓸데없는 말을 듣고 있느니, 차라리 어화원에서 사슴고기나 구워 먹는게 낫겠구나.’
창경제가 헛기침을 한 번 하며 퇴청하려 할 때, 위국공이 앞으로 나서서 스스로 종군을 지원했다.
신하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조정의 백관 중 위국공이 부상으로 군에서 물러났다는 걸 모르는 자는 없었다.
‘조정에서 늘 아무 말 없이 배경처럼 있었으면서, 왜 갑자기 출정한다는 거지?’
“국공의 부상은―”
창경제가 멈칫했다.
위국공이 갑자기 종군에 지원한 그 순간만큼은 창경제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순식간에 의아함이 몰려왔다.
‘창도 못 드는 위국공은 발톱 없는 호랑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북쪽과 대치했을 때 어떻게 맞설 셈이지? 입만 나불댈 생각은 아니겠지?’
위국공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신의 부상은 이미 완쾌되었사옵니다.”
“완쾌되었다?”
창경제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스쳤다가 다시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짐이 기억하기로는, 그때 수많은 어의가 진료했지만 국공의 부상에는 속수무책이었거늘. 언제 완쾌된 것이냐?”
“사실 소신은 여태 몇 년간 오른손을 단련해왔고 점점 효과를 보았습니다. 하루 또 하루 지나다 보니, 지금 오른손은 거의 다 나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창경제가 크게 웃었다.
“그래, 그래. 위국공이 출정할 수 있다니 하늘께서 대량을 보우하시는구나!”
조회가 끝난 후, 위국공이 부상을 완쾌하고 출정한다는 소식은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갔다.
“몇 년 동안이나 쉬었으면서 하필 이때 부상이 다 나았다니?”
“흠흠, 위국공의 부상 말일세.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뜻인가?”
“십몇 년 전 사염 밀매 사건 때, 송국공(宋國公) 가문의 이백여 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었는가? 송 국공이 무너지자, 대량의 개국공신은 둘밖에 남지 않았지. 하나는 위국공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공(齊國公)이지.
하지만 제국공부에선 그동안 인재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선조가 남긴 여음으로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 그땐 노위국공도 실력이 녹슬지 않았고, 위국공은 더욱 혈기왕성할 때라, 군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독보적인 인재가 되었을 것이네.”
“그럼 하필 이 시기에 위국공이 다시 나서는 건, 황상의 의심을 사지 않겠는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부상이 다 나았다니.”
“어쨌든 패전하는 것보단 나으니 황상께서도 기뻐하셨지. 게다가 노위국공도 현 위국공도 아이가 들었고, 위국공 세자는 무예가 평범해 문관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몇십 년 전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 위국공은 총명한 자야.”
위국공의 참전은 많은 추측을 낳았다.
* * *
평왕부 안, 평왕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밀정을 불러 명령했다.
“가서 위국공부를 잘 지켜보아라. 특히 위국공부의 사촌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본왕에게 보고해야 한다.”
밀정이 물러난 뒤, 평왕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댔다.
“그 부상이 이렇게 쉽게 낫다니 본왕은 절대 믿을 수 없다. 꾸준히 단련했다니, 터무니없는 소리지!”
단련이라면, 평왕도 절름발이가 된 후 전혀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몰래 곁에 두고 있는 의원이 직접 알려주기를, 계속 단련하다간 다리에 더욱 무리가 가 지금보다 악화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매일 단련하면 부담만 늘어난다는데, 위국공은 그 방법으로 나았다고? 절대 못 믿지!’
평왕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차갑게 웃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다. 예를 들면― 정가의 셋째 소저. 상처를 순식간에 지혈하고 새살을 돋게도 할 수 있는데, 또 무엇이 불가능하겠는가?’
이 생각이 떠오르자, 평왕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져 손으로 가슴을 꾹 눌러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