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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88화 (288/375)

288화. 위국공

목은백이 돌아왔을 때, 부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자 그 이유를 물었다.

목은백 부인은 상황을 설명하다가 결국 뒤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제 팔자가 사나운 게지요. 멀쩡한 아들을 보냈으니―”

목은백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부인의 말을 끊어냈다.

“부인, 그런 말은 함부로 해선 안 되오!”

목은백 부인이 입을 닫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나리가 아니면 누가 제 속상함을 알아준단 말입니까? 량이가 못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둘째 동서는 그 아이의 친어미이고, 평소에 지나치게 감싸고 돈 탓에 결국 이런 짓까지 저질렀지 않습니까. 이 일이 퍼져나가면 얼마나 큰 웃음거리가 될지, 앞으로 어느 집안에서 딸을 보내려 하겠습니까?”

목은백이 부인의 손을 잡고 타일렀다.

“량이는 내 작위를 물려받을 아이이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당신이 꾸짖으면 되오. 둘째 제수가 당신의 뜻을 존중하지 않을 리 있겠소?”

목은백 부인이 손을 빼며 차갑게 웃었다.

“둘째 동서가 저를 존중해준들 노부인께서 량이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시는데, 제가 어찌 나설 수 있겠습니까.”

목은백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도 저는 노부인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걸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죄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

목은백은 부인이 더 말을 흘릴까 봐 급히 위로했다.

“부인, 미안하오. 귀비마마께서도 그대의 호의를 잘 기억해두고 계실 테니 나중에 큰 복을 누리게 될 거요.”

목은백 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목은백은 조카인 화량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곧바로 아우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아들 때문에 꾸중을 들은 화가의 둘째 나리는 어두운 얼굴로 화량을 찾아가더니 길에서 아무렇게나 꺾어온 나뭇가지로 매를 들었다.

“아버지의 빚은 아들이 갚는다던데, 네놈은 오히려 내 욕을 먹이는구나! 경고하건대, 앞으로 또 이런 짓을 저지르면 절대 이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게다. 네 조모와 어미도 나를 못 막을 게야!”

둘째 나리가 떠난 뒤, 실컷 얻어맞은 화량은 벽 모퉁이에서 눈물범벅이 된 채 책상다리를 안고 중얼댔다.

“정가의 셋째가 설마 내 천적인 건가? 어찌 그 아이를 이겨 먹으려 할 때마다 이런 매질을 당하게 되는 거지?”

‘엉엉엉, 이제 그만할래!’

* * *

목은백부에서 거짓말로 혼담을 꺼낸 일은 어느새 퍼져나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동지가 지나고, 북방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람들의 관심도 그 일로 옮겨가게 되었다.

창경제는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패전의 주된 원인은 대량군이 북쪽의 엄동설한을 견디지 못했고, 주장(主將)은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동사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창경제는 급히 중신들을 서재로 모아 이 일에 대해 의논했다.

병부(兵部)의 상서(尙書)가 말했다.

“북쪽 땅의 기후는 대량의 장병들이 견디기 힘듭니다. 소신은 장병들에게 방한복과 약재 등을 추가 보급해 겨울을 나게 해주어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방한복은 이미 보급하지 않았는가?”

창경제가 물었다.

“폐하, 대량의 장병들은 북쪽의 추위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산피(*山皮: 산짐승의 가죽)복이나, 두꺼운 솜옷을 입어야 하옵니다.”

호부(戶部)의 상서가 벌떡 일어났다.

“황상, 작년 정주(靖州)에 설해가 닥친 탓에 재난민을 안치하고 건물을 다시 짓느라 은자를 많이 소모했습니다. 북쪽의 전투도 이미 몇 개월이나 지속되어 국고가 그리 넉넉지 않사옵니다―”

창경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장 재상을 쳐다봤다.

“장 재상,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장 재상이 답했다.

“예로부터 전쟁은 국고가 가장 소모되는 일이었지요. 북쪽 전투가 길어질수록 국고가 더욱 비게 될 겁니다. 그러니 소신은 아직 아까워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장병들의 난의포식(暖衣飽食)을 보장하고, 최대한 빨리 승리를 쟁취하는 게 최선이지요. 그리고 이 외에도 북쪽에 출정한 경험이 있는 주장을 선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사료되옵니다.”

창경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북쪽에 출정한 경험이 있는 자라면, 북제군을 랑아산(狼阿山) 북쪽까지 몰아낸 한(韓) 부대보다 더 뛰어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초대 위국공은 태조와 함께 천하를 쟁취한 8대 개국공신 중 하나였다. 후계자가 없거나 작위를 박탈당한 집안을 제외하니, 현재는 8대 개국공신 중 두 집안만 남게 되었고, 위국공부는 그 둘 중 하나였다.

위국공부에서 통솔하는 한(韓) 부대는 명성이 자자했고, 그간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몇 년 전 위국공이 부상으로 병권을 내려놓았다고는 하나 한 가문이 국군에 끼치는 영향은 결코 얕잡아볼 수 없었다.

창경제는 고민했다.

‘위국공이 부상으로 다신 창을 들 수 없게 되고 군에서 나갔을 땐 남몰래 기뻐했거늘, 한 부대에 당한 북제가 해를 거듭하며 대담하게 굴어올 줄이야. 지금 상황에서 한 부대 외엔 적합한 인재가 없구나.’

“경들은 우선 북쪽 장병들의 방한복을 보급하는 데 집중하시오. 주장을 선출하는 일은 짐도 자세히 고려해볼 테니. 좋은 인재가 있으면 경들이 짐에게 추천해주어도 좋소.”

* * *

이 일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수도의 화기애애한 연말 분위기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정미는 동지 이후로 국공부에 불려와 잠시 머물렀다. 그녀는 현청관에서의 조용한 나날에 적응되어 있었기에 정월까지 국공부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골치가 아파왔고 의서를 들고 방 안에 틀어박혀 종일 공부했다.

한 씨는 단 노부인이 꾸짖은 이후로 정미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려 노력했다. 정미가 종일 방에 틀어 박혀있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찾아와 말했다.

“겨우 열다섯밖에 안 되었으면서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이나 보고. 답답하지도 않니? 조금 춥긴 하지만, 날씨가 좋을 땐 잘 챙겨 입고 걷기라도 하지 그러니.”

정미가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둘째 오라버니가 요즘 왜 그렇게 바쁜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요. 나가봤자 할 것도 없고요.”

한 씨가 눈을 부라렸다.

“누가 외출하라 했니? 집 안의 화원에서 바람을 쐬는 것도 괜찮다. 청설림의 매화도 벌써 폈다는구나.”

청설림 얘기에 정미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관심 없어요.”

한 씨는 의아했다.

“매화를 좋아하지 않았니?”

정미가 입을 삐죽였다.

“매화는 좋지만, 청설림의 매화는 싫어요. 특히 사촌 올케언니의 온몸에서 매화향이 느껴진다고요. 그래서 이제 매화도 꺼려질 지경이에요.”

정요 얘길 꺼내자, 한 씨가 콧방귀를 끼며 정미를 잡아당겼다.

“미야, 혹시 알고 있니? 그 여우 같은 것이 또 설치기 시작했다는구나.”

정미가 손수건을 내려놓자 그제야 평소의 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또 무슨 일이에요?”

한 씨가 비웃었다.

“무슨 일이긴? 또 제 재학을 뽐낼 셈이지. 이번에 북쪽의 장병들이 추위로 병이 나면서 패전하게 되지 않았니? 이에 조정에서 방한 물자를 준비하고 있고. 정요가 어제 위국공 세자 부인의 명분으로 초청장을 뿌렸다는구나. 각 집안의 부인과 아가씨들을 초대해 청설림에서 매화를 감상하고, 시를 써서 기부하자고.”

한 씨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수도의 모든 가문이 위국공 세자 부인의 대의를 칭송하고 있단다. 그 여우 같은 것, 도대체 어디서 이런 꾀를 떠올리는 건지!”

“시를 기부한다고요?”

정미는 몹시 역겨웠다.

예전엔 정요를 미워하더라도 재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요가 지었던 시가 모두 표절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론, 그저 구역질만 날 뿐이었다.

“미야?”

한 씨가 정미를 살짝 밀었다.

“네?”

“그러니까, 이번 상매연에 너도 갈 테냐?”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히 가야지요.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으니까요.”

‘정요가 시를 표절한 일은 오라버니가 맡겠다고 했지만, 눈 깜짝할 새 벌써 1년이 지났고 여전히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아. 오라버니가 잊은 건지, 아님 계획이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러니 이번 상매연에서 오라버니의 도움 없이 정요의 재녀라는 명성을 반드시 빼앗고 말겠어!’

* * *

투지가 불타오르자 정미는 더 이상 의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 씨의 말에 따라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 소금 같은 가루눈이 내리더니, 새벽이 되자 풀과 나뭇가지에 서리가 한층 쌓여있었다. 그리고 해가 뜨자 서리는 물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져 땅을 적셨다.

정미는 그 위를 동동거리며 청설림으로 향했다.

청설림은 정말 벌써 매화가 피고 있어 몹시 아름다웠다.

정미는 그 사이를 걸으며 아무 매화 가지를 잡아당겨 냄새를 맡다가 웃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매화 숲은 아무 잘못 없는걸. 미운 사람 때문에 청설림한테 화풀이해선 안 되지.’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매화는 더욱 무성히 피어있었다.

정미가 코를 킁킁대다가 고개를 돌려 환안에게 물었다.

“어디서 술냄새가 나지 않니?”

환안이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쪽에서 나는 냄새 같아요.”

국공부 안에 있는 청설림이었기에 당연히 외부인일 리 없었다.

“그럼 가보자.”

은은한 술 향기를 맡으며 꽃과 잎 사이를 스쳐 지나가자, 누군가 홍매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자는 나무 아래 돌의자에 웅크려 앉아 술 주전자를 높이 들고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큰외숙부?”

정미는 조금 의외였지만, 환안에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눈짓한 후 위국공에게로 다가갔다.

기척이 들리자 위국공이 고개를 들었다. 조카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자 그는 급히 술 주전자를 옆에 내려놓고 똑바로 앉았다.

하지만 술을 꽤 마신 탓인지, 정미를 보는 눈빛에 몽롱한 술기운이 드러났다.

“정미였구나. 와서 앉거라.”

정미가 다가가 돌의자 위에 앉아 위국공을 자세히 살펴봤다.

위국공이 미소지었다.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위국공의 웃는 얼굴은 사뭇 온화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정미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외숙부,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위국공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걱정거리는 무슨. 그저 홍매가 예쁘게 피었기에 술을 마시러 온 거란다. 미는 술을 마시지 못해 아쉽구나. 그런게 아니라면 이 외숙부와 함께 마실 수 있었을 텐데.”

정미가 진지하게 말했다.

“분명 걱정거리가 있으신 거군요.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요. 속에 담아두고 털어놓지 않으면 병이 날 거예요.”

“그럴 리가.”

위국공이 껄껄 웃었다. 하지만 조카가 차가우면서도 다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웃음을 점점 거둬들이며 물었다.

“그럼 미가 말해보거라. 내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을 것 같으냐?”

위국공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이제 막 성년이 된 조카에게 걱정을 털어놓을 리 없었다.

정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최근 수도의 상황이 떠오르자 번뜩하고 떠올랐다.

“황상께서 북쪽의 주장을 선출하는 일 때문이시지요?”

위국공은 잠시 멈칫하더니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역시 많이 컸구나.”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한 번 들어보았다.

오랫동안 부유한 생활을 누려 뽀얗고 매끈해진 손목 위에는 울퉁불퉁하고 매서운 흉터가 선명히 남아있었다.

정미의 시선이 위국공의 손목에 꽂혔다.

‘큰외숙부는 손목 부상 때문에 다신 창을 들 수 없어서 침울한 마음으로 수도로 돌아오셨을 거야.’

정미가 눈을 들어 위국공을 향해 빙긋 웃었다.

“큰외숙부, 손목의 부상 말인데요. 제가 한번 치료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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