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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86화 (286/375)

286화. 골목에서

정철은 지금 집이 아닌 친우인 임랑과 함께 남안왕을 모시고 불억루에 있었다.

불억루는 청루였지만 고상하고 청정한 곳이기에 남안왕도 가끔 찾아와 차를 마시며 노래를 듣곤 했다.

임랑은 남안왕의 시위장이여서 시간이 지날수록 불억루에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나 이곳의 아가씨들과도 안면을 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정철과 임랑을 모시는 기생은 전에 작은 패왕 용흔이 끝내 만나지 못한 명기, 청청이었다.

청청은 스무 살 기생이었다. 따뜻하게 데운 실내에선 얇은 수홍색 치마만 입고 있었고, 귀밑머리엔 구슬 비녀를 꽂아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상 앞에 앉아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뛰어난 연주 솜씨에 임랑이 박수를 쳤다.

“훌륭하구나!”

청청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차를 따르며 웃었다.

“임 공자께서 훌륭하다 하시는 건 와 닿지 않습니다. 정 공자께서 칭찬하셔야 청청이 뿌듯하지요.”

정철이 온화하게 웃으며 칭찬했다.

“정말 훌륭했다.”

임랑이 꽤 불쾌한 듯 말했다.

“청청, 어찌 그리 심한 말을. 내가 칠현금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정가 둘째 공자보단 너와 더 잘 아는 사이 아니냐.”

청청이 그를 흘겨봤다.

“그럼 나중에 임 공자께서 칠현금에 대해 잘 아시게 되면 그땐 필히 인정하도록 하지요.”

그들은 불억루에서 나와 남안왕을 왕부로 모셔다드린 후, 임랑은 정철을 데리고 다른 술집에 술을 마시러 갔다.

“불억루도 청루이긴 하지만 그곳은 목소리도 크게 내어선 안 되고 금기서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하니, 정말이지 너무나도 불편하더군. 가자, 역시 평범한 술집이 더 재미있어!”

정철이 웃으며 임랑을 쳐다봤다.

“그럼, 칠현금에 대해선 배우지 않을 셈인가?”

임랑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뭐 하러. 그런 쪽에 재능이 있었다면 무술을 배우지 않고 너처럼 장원에 급제했겠지.”

그러고는 임랑이 눈짓하며 말했다.

“청겸, 남안왕께서 동랑에게 마음이 있으신 것 같지?”

“음?”

“봐, 왕야께선 이렇게 오랫동안 홀로 지내시면서도 가끔 불억루엔 찾아가지. 자주 드나들진 않지만 이미 습관이라 해도 좋을 정도야. 왕야께 동랑이 특별한 게 아니라면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정철이 웃으며 대답했다.

“왕야께 동랑이 특별한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청청은 석근 너를 특별히 여기는 것 같던데.”

임랑의 눈이 커졌다.

“뭐가 특별해? 왜 난 몰랐지?”

“네가 칠현금에 대해 모르는 탓이지.”

“그, 그 말은 청청이 나를 좋아한다는 뜻인가?”

임랑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으나 정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랑은 고개를 젖히고 술을 한잔 들이킨 후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앞으론 청청을 찾아가지 않도록 하지.”

정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우리’야. 난 이번이 두 번째라고.”

‘내가 불억루에 간다는 걸 미미가 알면 안 되지.’

임랑이 그를 흘겨봤다.

“우린 형제 아닌가? 갑자기 그렇게 결백한 체 한다고?”

정철이 연신 기침을 해댔다.

임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난 늘 왕야를 모시고 가야 하는 처지인걸. 만약 청청이 내게 고백하면 어쩐단 말인가?”

“받아주면 되지.”

정철이 놀리듯 말하자 임랑이 그를 걷어찼다.

“어찌 받아준단 말이야? 청청을 아내로 맞을 수도 없는데. 그런 신분은 첩으로도 못 들인다고. 그렇다고 두 집 살림을 할 순 없지 않은가? 짧은 인생에 그런 힘든 일에 시달릴 순 없지. 난 그저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고 싶을 뿐이야. 용모가 출중하면 더 좋고. 큼큼, 그래서 말인데…… 청겸, 정말 나를 매부로 삼을 생각이 없는 건가?”

정철은 어두운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늘 내 아내를 탐내는 벗이라니, 정말 힘들군!’

임랑이 급히 따라나서며 투덜댔다.

“반밖에 안 마셨는데 가면 어떡해. 내가 사게 하려는 거라 해도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지 않나.”

정철이 그를 흘겨봤다.

“배불러서 그래.”

두 사람은 술집에서 나와 작은 골목을 걸었다.

임랑이 정철의 어깨를 토닥였다.

“청겸, 스무 살이나 되었는데도 혼인도 하지 않고 제 여동생을 그리 감싸고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정철이 차가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재빨리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임랑을 벽에 밀치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알고 싶어?”

늘 온화한 성품이었던 벗이 상쾌한 술향기가 담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임랑은 완전히 멍해졌다.

정철은 손으로 벽을 짚고 임랑의 귓가에 다가가 작게 말했다.

“석근, 누가 우릴 미행하고 있어.”

임랑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래서 뭐, 굳이 이런 이상한 방법으로 그 사람을 놀라 도망가게 하려고? 청겸,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놀라 도망가겠다!”

정철이 낮게 웃었다.

“아직 안 갔군. 덜 놀랬나 본데.”

그러고는 입술을 씩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비틀고 임랑에게 다가갔다.

곧 꽈당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정철은 몸을 세우고 임랑의 어깨를 토닥였다.

“됐어. 이제 갔네.”

임랑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갔다니 다행이군. 방금 네 모습은 정말 거북했어. 다른 사람이 보면 네 취향이 독특한 줄 알겠다.”

정철이 웃었다.

“일부러 의도한 거야. 그 사람은 내가 네게 입을 맞추고 있는 줄 알았을걸.”

임랑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입맞춤이라고?”

“응.”

그러자 임랑은 정신이 번쩍 들어 살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정철, 내 순결을 돌려줘! 아아악! 너랑 끝장을 봐야겠어!”

“그러지 마. 말로 해. 그래, 다시 술이나 마시러 갈까?”

“누가 너랑 마신다는 거야. 이 망나니! 네가 혼인하고 싶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나도 혼인하지 못하게 하려던 거 아냐? 됐어. 정청겸, 만약 내가 장가가지 못하면 네 여동생을 내게 줘야 해!”

정철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럼 방금 그러지 말걸.”

임랑은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제 가슴을 감싼 채 뒷걸음질 쳤다.

“청겸, 나보다 무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겁줘선 안 되지!”

정철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임랑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혼인하지 않으려는 게 설마 사내를 좋아해서인가?”

정철이 그를 흘겨보자, 임랑이 급히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나는 그런 취향 아니니까! 저기 벽춘루(碧春樓) 맞은편에 소관관(小倌館)은 벽춘루보다 장사가 잘되더군. 가고 싶으면 내가 몰래 숨겨줄 테니 가 봐.”

정철은 친우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는 듯하자 그제야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난 여인을 좋아하니까. 게다가 마음에 둔 사람도 있다고.”

임랑이 곧바로 정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느 집 아가씨? 얼른 말해봐!”

“너도 만난 적 있는 아가씨야.”

“누구?”

임랑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정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 셋째 여동생.”

“아, 그 아가씨였군―”

그러다 임랑의 입가에 띤 웃음기가 싹 굳었고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더니 비명을 지르며 물었다.

“정철, 뭐, 뭐라고 했어?”

정철이 빙긋 웃었다.

“내 셋째 여동생이라고. 석근, 그렇게 여인처럼 비명을 지르다니 누가 보면 네가 질투하는 줄 알겠어.”

“내가 무슨―”

임랑은 노발대발하며 입을 틀어막더니 마음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청겸, 아무리 나를 매부로 삼고 싶지 않더라도 그런 농담은 하지 마.”

정철이 담담하게 그를 흘끗 쳐다봤다.

“석근, 계속 매부, 매부 거리는데 나와 친우가 되기 싫은 건가?”

정철의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직감한 임랑이 멍하니 물었다.

“그럼 사실인 거야? 하지만 너희는―”

임랑은 정철의 가장 친한 벗이었기에 정철의 표정만 봐도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더니 주먹으로 정철을 살짝 치며 말했다.

“청겸, 너도 참! 아무리 내게 알려주려 했던 거라 해도 그렇게 차분하게 말하지 말라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정철은 여유롭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랑이 조금 격앙된 표정으로 뒤따라왔다.

“청겸, 이런 놀라운 비밀을 내게 알려줄 줄은 몰랐는데.”

정철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네가 늘 그렇게 함부로 매부라는 말을 뱉으니. 어느 날 주먹이라도 나갔다간 서로 감정만 상하잖아.”

임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이 청겸,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

정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말을 믿다니. 그럼 네 의복을 벗어 거리에 던져버리지 그래?”

두 사람은 그렇게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한편 공주부(公主府)에서 밀정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안양 공주는 깜짝 놀랐다.

“그것이 정말이냐?”

한쪽 무릎을 꿇은 밀정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말했다.

“소인이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정 대인과 임 대인이 함께 술집에서 나온 후 골목으로 들어갔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정 대인이 임 대인을 벽에 밀치더니 입을…… 입을 맞추었습니다.”

‘한 사람은 옥수처럼 아름답고 다른 한 사람은 명주처럼 빛나서 그런지, 그 장면이 전혀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밀정은 두 사내가 입 맞추는 장면보다 스스로가 그 장면을 거북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겁이 났다.

안양 공주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한참 뒤 밀정이 몰래 그녀를 쳐다보자 순간 수치스러우면서도 화가 나 잔을 들어 던졌다.

“꺼져!”

밀정은 급히 물러났고, 안양 공주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소매를 휙 뿌리쳐 탁상 위의 찻잔을 모두 쓸어버린 뒤 밖으로 나갔다.

‘어쩐지 정철이 내게 관심이 없더라니, 사내를 좋아하는 거였군! 공주인 이 몸이 사내보다 못하단 말인가?’

두 사내가 입을 맞추는 장면이 떠오르자, 안양 공주는 속이 거북해져 발걸음을 멈추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공주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시녀가 물었다.

“임죽헌(臨竹軒)으로 간다!”

시녀는 어리둥절했다.

임죽헌은 공주의 면수가 지내는 곳이었다. 가장 북적거릴 땐 각각 특색이 다른 미남이 열 명도 넘게 지냈지만, 공주가 장원랑에 빠진 뒤로는 모두 내보내고 공주를 가장 오래 따른 안(安) 공자만 남아 있었다.

안양 공주의 진홍색 치마가 우아하게 백옥 계단을 스치며 임죽헌으로 향했다.

시녀는 생각했다.

‘임죽헌이 다시 떠들썩해지겠구나.’

* * *

정철이 집에 돌아오자, 소매가 다가왔다.

“공자님, 셋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계속 곁채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알겠다.”

정철은 세수하고 손을 씻은 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곁채로 향했다.

정미는 토항(*土炕: 침상 아래 불을 때는 중국식 난방) 위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었다.

정철은 그 옆에 앉아 조용히 정미를 지켜봤다.

눈을 감은 소녀의 빽빽하고 긴 속눈썹은 아주 아리따웠다.

정철이 손가락을 뻗어 찌푸려진 정미의 미간을 살살 펴주었다.

정미가 눈을 떴다. 그녀는 눈앞이 몽롱하고 흐릿해 눈을 몇 번이나 끔뻑이고 나서야 정철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정미가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황후와 누가 닮았는지 이제야 생각났어!”

“응?”

정미가 손가락으로 정철의 눈을 살짝 쓰다듬었다.

“황후의 눈과 오라버니의 눈이 아주 닮았어.”

정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티 내지 않고 정미에게 물었다.

“오늘 황후마마를 뵈었어?”

“응. 황후마마께서 발작하셔서 내 신발을 한 짝 빼앗아가셨어.”

정미는 오늘 일을 정철에게 이야기해주었으나 화량에 관한 일은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정철이 말했다.

“날이 꽤 어두워졌어. 추우니까 위국공부로 데려다줄 테니 내일 현청관으로 돌아가.”

정미는 순순히 정철의 말을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목은백부에서 혼담을 꺼내려 중매인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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