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황후의 발작
정미가 입가심하고 손을 씻자, 태후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현미, 애가가 듣기로는 예전에 미친 거인을 치료한 적 있다던데…… 정말입니까?”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이후 그 거인 나리는 진사에 급제했습니다.”
“정말 굉장하군요.”
정미가 순순히 인정하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현미 도장, 그날 현청관에서 화 귀비와 태자에게 소란을 피울 뻔했던 유모를 기억하십니까?”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그 유모의 정신이 조금 이상합니다. 원래대로라면 궁의 규칙에 따라 일찍이 쫓아내야 했지만, 애가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아이기에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더군요. 현미 도장이 정신병에 다소 식견이 있다 하니 오늘 한번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지요.”
정미가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고는 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애가를 따라오시지요.”
정미가 태후를 따라 편전의 내실로 들어가자 유모 차림을 한 중년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은 낮은 평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태후가 왔음에도 아무 반응 없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빗으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태후는 티 나지 않게 정미의 반응을 한 번 살핀 뒤 입을 열었다.
“낮엔 대부분 조용히 지내다 밤에 발병합니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인지 아직 대낮임에도 상태가 그리 좋지 않군요. 현미 도장, 번거롭겠지만 한 번 봐주세요. 치료할 수 있다면 이 아이에게도 행운이고 애가도 마음의 짐을 덜을 수 있으니.”
정미가 다가가 잠시 관찰하더니 다시 태후를 쳐다보고 말했다.
“태후마마, 이런 모습으론 진료를 볼 수 없습니다.”
“음?”
태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유모의 화장을 씻어낸 뒤, 원래 얼굴을 드러내야만 진료를 볼 수 있습니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고 유모의 중얼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미는 무표정으로 맑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태후는 한참 동안 정미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정미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환자의 병을 치료해주는 것인데 어찌 무서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황후입니다.”
“황후마마도 어쨌든 환자입니다.”
정미의 말에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태후의 눈가가 촉촉해지는가 싶더니 눈을 피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지요. 애가의 눈에도 제 조카는 의원이 필요한 환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태후는 감정이 조금 격해져 저도 모르게 정미에게 술술 말했다.
“황후긴 하지만 총애도 자식도 없고 관저전에 유폐되어 있지요. 애가도 그저 이 아이가 이렇게 늙어가길 원치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자들은 황후의 병이 낫길 원치 않습니다. 현미 도장, 이 아이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고, 이 일에 끼어들면 분명 성가신 일이 될 겁니다.”
태후가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
그러자 정미가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웃었다.
“태후마마께서 저를 지켜주시겠지요?”
정미는 황후의 신분을 아는 걸 굳이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 사람들에게 들켜도 ‘몰랐다’고 둘러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황후의 병은 정신병이었기에 그렇게 모르는 척할 순 없었다.
정신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병인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황후의 신분을 모르는 척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치료가 되었을 때 태후로부터 황후의 병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정미는 황후를 꼭 치료해야만 했다. 화 귀비와 태자를 반드시 끌어내려야 했다. 그래야만 큰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고 악몽 속의 비참한 운명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태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녀를 보며 웃었다.
“그렇지요. 애가가 도장을 지켜드릴 겁니다. 누군가 현미 도장께 칼을 겨누면 애가에게 칼을 겨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장께서 황후를 치료해주시기만 한다면―”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국사께서 예전에 황후의 병은 마음의 병이라 치료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태후가 정미를 찾은 건 정미가 국사를 뛰어넘었다고 여긴 게 아니라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매달려보려는 것뿐이었다.
정미가 웃으며 설명했다.
“태후께서 부의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봅니다. 부의는 다른 기예와 다릅니다. 부의는 천부적인 재능과 통찰력이 더욱 중요하지요. 모든 가능성이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부의마다 자신 있는 분야는 각자 다릅니다. 그리고 저, 현미는 황후마마의 병과 관련된 과목에 조금 식견이 있습니다.”
‘환자의 가족이 나를 믿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할 때니까. 그래야 나중에 잘 협동할 수 있어. 사부님이 내 뻔뻔한 말을 듣고 혼을 내봤자 기껏해야 무릎을 꿇고 경서를 읽는 정도겠지.’
태후는 정미의 말에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태후마마.”
교 유모가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자 화장을 지운 황후의 모습이 보였다.
정미는 조금 놀랐다.
‘역시 비바람이 불던 그 날 밤에 마주친 여인이었구나. 방금 얼굴을 씻은 덕분에 좀 더 멀쩡해 보이시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눈에 익은 느낌이 더 강해졌어. 황후의 얼굴을 보는 건 두 번째인데, 어디서 오는 익숙함일까? 설마 세상에 정말 왠지 계속 눈이 가는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정미가 마음속 의혹을 꾹 참고 예를 갖추려 하자, 태후가 막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하니.”
정미가 태후를 쳐다보니 태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당부했다.
“그저 평범한 환자로 여겨주십시오.”
정미는 황후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황후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보며 뒤로 움츠렸다.
정미는 황후가 소란을 피우지 않자 열심히 망진하기 시작했다.
정미도 황후를 빤히 쳐다보고 황후도 정미를 빤히 쳐다보자, 다른 사람들 눈엔 조금 우스운 장면으로 보였다.
하지만 태후만은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한참 뒤, 정미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태후를 쳐다봤다.
그런데 정미의 행동이 황후를 자극했는지, 정미가 뭐라 말하려고 하자 황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정미에게 달려들었다.
등 뒤의 기척을 느낀 정미가 고개를 휙 돌렸고 달려드는 사람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들었다. 그러다 상대가 황후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차마 걷어차지 못하고 허공에서 발을 멈췄다.
황후가 달려들며 몸을 숙이더니 정미의 허벅다리를 안고 바닥에 넘어트렸다.
정미는 뒤로 나자빠졌고 황후가 그 위를 누르고 있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
정미는 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청옥 바닥 위에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어 다행이라고…….
‘하마터면 본전도 못 찾고 죽을 뻔했잖아!’
“황후마마―”
교 유모가 다가가 황후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황후가 교 유모를 휙 밀쳐냈다.
정미는 갑자기 발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 보자 황후가 정미의 자수 신발 한 짝을 품에 안고 재빨리 낮은 평상 위로 되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교 유모가 태후를 쳐다봤다.
태후는 맥이 빠진 표정이었다.
“얼른 현미 도장을 일으켜드리지 않고 뭐 하느냐.”
정미는 교 유모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며 한쪽 발은 맨발로 융단을 밟은 채 태후를 쳐다봤다.
그러자 태후가 황후 곁으로 걸어가 다정하게 말했다.
“진진(眞眞),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 어서 신발을 돌려주어라.”
“싫어요!”
황후가 뒤로 움츠리며 품속의 신발을 꽉 껴안았다.
“제 아이를 뺏어가지 마세요. 안 돼요!”
“진진, 그건 아이가 아니란다. 잘 보렴. 신발이지 않으냐.”
황후가 태후를 휙 밀쳐냈다.
“거짓말, 모두 날 속이고 있어!”
그러고는 신발을 안고 천천히 흔들었다.
“그 누구도 내 아이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황후의 발작을 대비해 평상 위엔 부드러운 베개 외엔 아무것도 두지 않았기에 황후는 베개를 들어 태후에게 던졌다.
정미가 급히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 제가 황후마마의 병을 확인했으니 우선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교 유모에게 분부했다.
“황후를 잘 보고 있거라.”
입구까지 걸어갔을 때, 태후가 고개를 돌려 황후를 한 번 쳐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고 정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전(主殿)의 응접실로 돌아온 뒤 태후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걱정 마세요. 괜찮습니다.”
태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정미의 발에 꽂혔다.
정미는 침착하게 치맛자락을 아래로 당겨 맨발을 숨겼다.
“현미 도장의 발은 참으로 작고 예쁘군요. 애가의 거처엔 맞는 신발이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잠시 머물렀다가 황후가 괜찮아지면 교 유모에게 신발을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그날 밤 찾아오지 못한 신발이 떠오르자 정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무 신발이나 주셔도 됩니다. 궁문을 나가면 바로 마차를 탈 테니까요.”
“정말 미안하군요.”
정미는 더 이상 치렛말을 하지 않고 잠시 망설이다가 태후에게 물었다.
“황후마마께…… 아이가 있었나요?”
태후가 슬퍼하며 말했다.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6개월이 되기도 전에 요절했습니다. 그 이후론 회임한 적 없고요. 황후가 아프기 시작한 후 계속 아이를 찾는 것도 아마 그 공주가 떠올라서 그런 것 같군요.”
“그랬군요.”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태후를 위로했다.
“걱정 마세요. 우선 황후마마의 몸조리부터 하고 차도가 보이면 증상에 맞춰 약을 짓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현미 도장.”
정미는 궁녀가 가져온 자수 신발로 갈아신고 작별 인사를 올렸다.
궁을 나가는 길에 정미는 예기치 않게 화 귀비의 조카, 화량과 마주쳤다.
겨울이었지만, 화량은 상아색 옷을 입고 외투로는 은호(*銀狐: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은빛이 나는 여우) 가죽으로 만든 피풍을 두르고 있어 입술은 더욱 붉게, 이는 더 희어 보였다.
그는 정미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빙그레 웃었다.
“음? 정가의 셋째 아가씨 아닙니까.”
예전의 정미였다면 무시하고 지나갔겠지만 이번엔 저도 모르게 화량을 쳐다봤다.
‘태자가 목은백의 아들이라면 화량과는 직계 형제겠구나. 자세히 보니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네.’
정미는 화 귀비의 용기에 감탄했다.
‘친가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다니. 얼굴이 닮았으니 누군가 의심할 일도 없었겠지.’
화량은 정미에게 실컷 얻어맞은 뒤로 정미를 보면 조금 겁이 났지만, 늘 무법천지로 살아오던 그였고 황궁엔 고모님도 있으니, 지금은 지난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두려움을 제치고 앞서는 중이었다.
정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떠나려 하자, 화량은 곧바로 발을 들어 정미의 치맛자락을 밟았다.
내시가 앞장서고 있었기에 정미는 큰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치맛자락을 휙 빼고 발을 들어 화량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화량은 비틀거리며 허리를 숙였고 마침 정미의 신발이 벗겨져 날아가는 걸 보고 급히 주워 품에 안고는 정미에게 사악하게 눈짓했다.
“셋째 아가씨, 어디 두고 봅시다.”
그러고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정미의 신발을 흔들어 보이더니 고개를 숙여 냄새를 한 번 맡고는 정미가 뭐라 말을 뱉기도 전에 줄행랑쳤다.
정미는 이를 갈았다.
‘화량과 태자는 같은 집안이 분명하구나. 후안무치하고 변태 같아! 하지만…… 그건 내 신발도 아닌걸. 뭘 두고 보자는 거야? 신발이 조금 커서 날아가 버렸네. 그 변태가 좋아하는 꼴을 보니 좀 찝찝하기도 하고.’
“도장―”
정미가 따라오지 않자, 앞장서던 내시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정미는 빙긋 웃으며 내시를 따라갔다.
‘좀 있으면 황궁 입구에 도착하니까. 신발 한 짝쯤이야 조금만 참자고.’
마차에 올라탄 뒤, 정미는 차가운 발을 매만지며 마부에게 곧바로 정철에게 향하라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