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쌓인 흙
마부 옆에 앉은 설융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닫고 조금 어색해하다가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문발을 보며 물었다.
“세, 셋째 아가씨,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문발 너머로 정미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나가다 우연히 설 형님을 보았는데 이야기 좀 나누고 싶어서 불렀어요. 하지만 지금은 바로 위국공부로 가야 하니 저와 함께 갑시다. 좋은 술과 음식이 마련되어 있을 거예요.”
좋은 술과 음식이라는 말을 듣자. 설융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의 집안엔 항산(*恒産: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이 없었다. 예전엔 거인이라는 공명 덕분에 정기적으로 조정에서 은냥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없으니 서화를 파는 일로 겨우 입에 풀칠할 뿐이었다.
‘좋은 술과 음식이라. 통닭구이도 있겠지? 돼지고기도?’
설융은 조용히 침을 삼키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위국공부에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사양하지 마세요. 오늘은 제 외조부님의 생신입니다. 손님이 많을수록 떠들썩하고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나지요. 게다가 제 시종이 당신의 옷을 더럽혔으니 깨끗한 옷으로 바꿔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환안이 듣자마자 곧바로 해명했다.
“아가씨, 설 선생께 묻은 먹물은 소인이 한 짓이 아닙니다! 소인이 갔을 때, 마침 어떤 사내가 설 선생께 인물도를 모사해달라고 찾아왔었어요. 그런데 설 선생이 그림을 열어보자마자 옆에 있던 벼루를 들고 그 사람을 쫓아내지 뭐예요. 그 벼루 위에 먹물이 있었다는 건 잊고요. 그래서 온몸에 먹물을 뒤집어쓰게 된 거예요.”
정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미묘한 말투로 말했다.
“설 형님이 성정이 그리 급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아닙니다!”
설융이 목을 꼿꼿이 세우고 곤색 대나무 발을 노려보며 횡설수설 해명했다.
“그, 그자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아, 아, 아니, 그 그림이 나쁜 그림이었어요! 어쨌든 맞아도 싼 사람이었다고요!”
“무슨 그림이었기에 설 형님이 보자마자 벼루를 던지려 한 걸까?”
정미가 중얼거렸다.
바깥에서 꽈당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마차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
“선생께서 마차에서 떨어지셨습니다.”
* * *
엉망진창이 된 설융과 함께 정미는 드디어 위국공부에 도착했다.
위국공부의 문 앞엔 손님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있어 아주 떠들썩했다.
정미는 특별한 신분이었기에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도 정미를 막아서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정미는 환안에게 잠시 설융을 부탁하고는 곧바로 형무원으로 돌아가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단 노부인과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한추화 등 형제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연회 시작 전, 전례대로 집안의 아랫세대들이 우선 축수(*祝壽: 오래 살기를 빎) 선물을 올렸다. 정미가 포함된 위국공부의 세 번째 세대 차례가 되자, 대부분 구매했거나 직접 만든 물건을 올렸다. 가장 훌륭한 선물은 손자며느리인 정요가 올린 양면 자수 병풍이었다.
정요는 모두의 앞에서 병풍을 가린 붉은 비단을 직접 벗겼고 사람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자수 병풍의 앞뒤에는 상황에 맞는 시가 수놓여 있었는데, 두 시는 서로 다른 필체로 쓰여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정요의 왼손 필체를 본뜬 것이었다. 이런 자수품은 천금을 줘도 구하기 힘든 정교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대청 안에 감탄이 울려 퍼졌다.
노위국공은 무장이기에 이런 것들에 그리 감흥이 없었지만 모두가 칭찬하니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정요가 입을 오므리며 웃다가 한지를 흘끗 흘겨봤다.
저번에 기절로 그를 속인 후, 두 사람은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한지는 매일 밤 정요의 방에 머물며 적어도 한 번은 치근거려야 잠들었다.
하지만 가끔 한지가 말하다가 갑자기 멍해질 때면, 정요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져 한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수 병풍은 정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으로 오늘 사람들의 갈채를 받아 한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럼 앞으로 한지도 제게 더욱 다정하게 대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한지의 표정을 보자 정요는 순간 당황했다.
한지는 그 병풍을 계속 빤히 쳐다봤다. 시녀가 선물을 치우자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정요와 눈을 마주쳤다.
그 온기 하나 없이 차가운 눈빛에 정요는 왠지 불안해졌다.
“왜 그러세요?”
정요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한지는 애써 표정을 풀었고 정요가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정미를 흘끗 쳐다봤다.
정미는 그 자수 병풍이 나타날 때부터 입가에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중양절 이후로 정요가 양손 글씨에 아주 자신감이 생겼나 본데. 그래, 앞으로 네가 이렇게 뽐낼 때마다 큰언니가 파놓은 구덩이에 흙을 메우는 꼴이니까. 그 구덩이가 흙으로 가득 메워지면 어떻게 될지 보자고.’
미소를 머금은 소녀의 모습은 교만했지만 그 옆태의 곡선은 몹시 아름다웠다.
한지는 왠지 괴로워져 황망히 시선을 거두었고 정요와 자리로 돌아오자 그 병풍이 그를 마주하며 섬뜩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만 같아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정미는 그런 한지의 모습에 더욱 기뻤다.
연회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떠들썩해졌다. 정철은 기회를 틈타 정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왜 늦었어?”
그러고는 웃음기가 더 짙어지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셋째 숙부님을 만났니?”
정미의 눈이 커졌다.
“오라버니, 어떻게―”
정철이 몰래 정미의 손을 토닥였다.
“잘 만났어. 나중에 형무원에서 자세히 얘기해줄게.”
“응.”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설융이 떠올랐다.
“맞다, 오라버니. 설 형님은 이제 제생당이 아니라 동쪽 시장에서 서화를 팔고 있대. 꽤 안타까워 보여서 위국공부로 데리고 왔어. 오라버니가 의견 좀 내봐. 설 형님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설융을 도와주자고?’
정철은 그 맹하고 정직한 서생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책에 그림을 그리게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 그건 설융이 절대 안 하려 하지 않을까?’
“오라버니, 왜 웃어?”
정철이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위국공부에 족학(族學)이 있잖아. 내 생각엔 설융이 족학의 선생이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정미의 눈이 반짝였다.
“오라버니 말이 맞아. 얼마 전 추화 언니도 족학의 어린 여학생들에게 강서를 하고 싶다고 말했거든. 위국공부의 족학엔 학생은 많고 좋은 선생은 없대.”
위국공부는 백 년 동안 전승된 훈귀 가문이었기에 종속된 족인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무장 출신이기 때문에 학자 가문만큼 공부를 중요시하지 않아 족학의 수준은 평범했다.
연회가 끝난 후, 정철은 정미와 함께 형무원으로 향했다. 그들은 한 씨와 잡담을 나눈 뒤 기회를 틈타 밀담을 시작했다.
“그 소란을 피운 사람들도 오라버니가 보낸 거였다니. 어쩐지 너무 교묘하게 마주쳤더라고.”
정철이 웃었다.
“그저 네가 미친 거인을 한 번 치료한 적 있다고 알려줬을 뿐이야. 태후 쪽에서도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을 거야. 49일이 지나고 치료 효과가 보이면 분명 너를 궁으로 부를 테고.”
“걱정 마. 최선을 다할게.”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보더니 탄식했다.
“이번 일은 미미가 오라버니보다 더 능력 있는걸.”
정미가 웃었다.
“설마 열등감이라도 느껴?”
정철이 다정하게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네가 자랑스럽지.”
정미의 마음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그날 정미는 위국공부에 머물렀고, 이튿날 단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뒤 위국공이 외출하기 전 설융에 대해 이야기했다.
위국공은 당연히 조카의 작은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설융은 재능이 있으니 춘시의 부정행위를 폭로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서원(書院)에서 선생이 되었을 터였다. 때문에 위국공부에겐 오히려 이득인 제안이었다.
설융은 그때부터 위국공부의 족학에 정착했고, 위국공부는 설융에게 개인 거처를 마련해주고 하인도 둘이나 보내주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새 겨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새 서강국의 서강왕후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강왕후는 창경제의 차녀, 운수(雲岫) 공주였다.
운수 공주는 온화한 성품으로 춤에 능했다. 황녀들 중 가장 정상적이고 얌전한 공주였기에 창경제도 그녀를 몹시 아꼈고 이 소식을 접한 뒤 끼니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게다가 하필 이때 북제에서 또다시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북제는 유목민족이었고 민풍이 거칠어 오랫동안 끊임없이 대량과 다퉈왔다. 예전엔 북제가 이렇게 도발하더라도 창경제는 그저 변방의 주둔군에게 급여와 지급품 등 물자를 제공할 뿐이었지만, 마침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을 때 북제가 도발해오자 책상을 쾅 내리치더니 곧바로 장군을 하나 보내 상황을 해결하게 했다.
대량과 서강이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중요 인물인 운수 공주가 요절하고 북쪽은 또다시 전쟁이 일자, 안락하고 떠들썩했던 수도엔 순식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편 정미는 현청관에서 지내며 속세의 번뇌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도동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태사숙조님, 얼마 전 산으로 와 태사숙조님께 진료를 봤던 사람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49일은 한참 전에 지났는데? 그 환자의 병도 이미 안정적으로 치료되었고. 근데 왜 또 찾아온 거지? 설마 돌발 상황으로 병이 다시 악화된 건가? 그런 거라면 앞으로의 일에 차질이 있겠는데.’
정미는 현청관의 대기실로 가 두 부자를 만났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정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으려 하자, 정미가 급히 도동을 시켜 그를 막았다.
“설마 또 발병한 겁니까?”
“아닙니다. 이번엔 감사를 표하러 왔습니다. 도장, 정말 도장 덕분입니다. 제 동생은 이제 일도 할 수 있고 일상생활도 다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제수도 얼마나 울었는지 도장께 꼭 감사 인사를 드리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당부하더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품속에서 보따리를 꺼내 건넸다.
“이건 제 제수가 드리는 헝겊신입니다. 받아주세요.”
정미는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보따리를 건네받고 다정하게 두 사람을 배웅했다.
* * *
태후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좋아 정미는 날짜를 세며 보름을 더 기다렸다. 날이 점점 추워지자, 그제야 면 휘장이 달린 가마가 정미를 찾아왔다.
마침 흐린 날이라 그런지 태후의 침궁도 조금 음울해 보였다.
그러나 태후는 여전히 조용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다.
태후가 팥떡과 대추떡을 내오라 명했다.
정미는 대추떡을 보고 움찔했다.
태후가 오랫동안 황궁의 일에 관여하지 않긴 했지만 각 궁에 조금의 통제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정미가 동궁에 고작 하룻밤 묵었다고 그녀가 대추떡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내다니…….
태후는 황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정미는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집중해서 먹었다. 모든 간식을 하나씩 천천히 씹으며 맛보았고 특히 팥떡과 대추떡은 두 개씩이나 먹었다. 살짝 맛만 보고 그만두는 다른 귀녀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태후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