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설융과의 재회
청색 도포를 입고 깔끔한 도사 머리를 백옥 비녀로 틀어 올린 정미가 천천히 걸어가자 속세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길을 비켜주었다.
정미는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고, 환안은 주인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두렵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당당히 걸어갔다. 떠들썩하던 사람들도 입을 닫고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정가 셋째 나리가 정미의 눈에 바로 들어왔다.
“셋째 숙부님―”
정미가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제생당에서 정미를 아는 자들은 깜짝 놀라 소박한 차림의 소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셋째 아가씨가 의관에 올 땐 늘 유모를 쓰고 있었기에 셋째 아가씨의 목소리와 신기한 능력은 수없이 직접 듣고 보았어도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나리는 잠시 멍해졌다가 입을 열었다.
“미야, 무슨 일로 왔느냐?”
“지나가다가 제생당이 소란스럽기에 셋째 숙부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해서요.”
정미의 말에 셋째 나리가 소란을 피우던 사람을 흘끗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별일 아니다. 의관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으니 어떤 병증엔 방법이 없는 것뿐이란다. 미야, 마저 볼일 보러 가거라. 여긴 사람이 많아 난잡하니.”
그는 의관에서 열심히 진료를 보던 조카가 종종 떠오르긴 했지만, 정미가 어렵게 백부를 떠났으니 앞으로 최대한 백부와 엮이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미는 셋째 나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린 듯 소란을 피운 사람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저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들어오시라 하세요. 제가 한번 볼 테니.”
그러고는 제생당 안으로 들어갔다.
셋째 나리의 입꼬리가 움찔거렸으나 결국 아무 말 없이 그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그러고는 그도 정미를 따라 뒤돌아 들어갔다.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셋째 아가씨가 또 사람을 구하려 한다는 걸 깨달은 머슴들은 아까부터 흥분한 표정이었고 그 사람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아직도 멍하니 계십니까? 셋째 아가씨를 만났으니 가망이 있겠군요.”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그때 인파 속에서 어떤 자가 놀라 소리쳤다.
“생각났다. 제생당엔 원래 작은 신의님이 계속 진료를 보셨었다고. 젊은 아가씨였어. 방금 안으로 들어간 도장께서 분명 그 신의님이실 거야!”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작은 신의님’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란을 피우던 일행은 급히 환자를 데리고 제생당으로 들어갔다.
* * *
정미가 대청에 앉아 말했다.
“환자를 가까이 보내보세요.”
사람들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중 나이가 그나마 많아 보이는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의…… 원님, 제 동생은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놓아줄 수 없습니다.”
“그럼 잘 잡고 있으세요.”
정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고 환자와 반 장 정도 거리를 둔 채 잠시 그를 관찰했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가족 중 이 환자 말고도 발병한 사람이 있습니까? 환자의 윗세대나 조부 세대 혹은 형제자매 등 가까운 친척 중에요.”
사람들의 표정이 굳더니 나이가 그나마 많아 보이는 사람이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저희 숙부님도 정신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 돌아가셨어요.”
“역시.”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환자의 병증은 유전입니다.”
“유전이요?”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한 채 이구동성으로 되물었다.
셋째 나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정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이 정신병의 원인은 당신 가족의 혈통에 있는 겁니다. 대를 거칠 때마다 발병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지요. 게다가 이런 병은 태어날 때부터 발병하는 게 아니라 특정 나이가 지나면 어떤 자극에 의해 나타나게 됩니다.”
“자극이요? 아, 제 둘째 숙부님도 몇 년 전 사촌 동생을 데리고 강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동생이 깊이 뛰어드는 바람에 빠져나오지 못해 죽었거든요. 그 이후로 그렇게 되셨습니다.”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정미가 물었다.
“처음엔 그나마 이성이 있고 사람도 분간할 수 있었는데, 점점 심해지지 않았습니까?”
“예, 맞습니다! 바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젊은 의원이 점점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어. 의술이 아주 출중한가 본데……. 그럼 방금 같은 혈통이라면 발병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시, 신의님, 그럼 어떡합니까?”
“아, 환자 말입니까? 흠…….”
정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부탁했다.
“저희도요. 저희도 둘째 숙부님처럼 되는 건 아니지요? 신의님, 저희를 구해주세요. 저는 아직 장가도 못 갔는걸요!”
정미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무릎을 꿇는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니.”
청년이 망설이자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시라 하지 않느냐. 신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정미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게 부르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전엔 제생당에서 진료를 봤지만, 지금은 현청관에서 수련하고 있으니 현미 도장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환자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이 병은 유전되기 때문에 한 번 발병되면 완전히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관리하면 증상을 완화시킬 순 있어요.”
“도장, 그럼 제 동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순조롭게 치료된다면 대부분의 시간은 발병하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습니다. 간단한 일도 할 수 있을 테고요. 하지만 자극을 받게 되면 다시 발병하게 될 텐데, 그땐 다시 오시면 됩니다. 이렇게 치료하는 것도 괜찮다면 제가 약을 하나 지어드리지요. 앞으로 이레마다 환자를 데리고 현청관으로 오시면 계속 관리해드리겠습니다. 대략 49일 뒤엔 그만 찾아오셔도 되고요.”
나이가 많은 사람의 표정이 격앙되더니 연거푸 감사 인사를 올렸다.
“도장의 말씀대로만 될 수 있다면 저희 집에서 도장께 장생위패를 세우고 늘 향을 피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럼, 약을 지어 오지요.”
정미가 뒤돌아나가려 하자 청년이 급히 외쳤다.
“도, 도장, 그럼 저희는요?”
“당신들이요?”
정미가 빙긋 웃었다.
“당신들은 멀쩡하지 않습니까?”
청년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언제든 발병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도 말했듯이, ‘앞으로’ 발병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은 멀쩡한데 어찌 치료를 한다는 겁니까? 게다가 이건 그저 가능성일 뿐, 확률은 낮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미는 말을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가 선혈로 부수를 만든 뒤 들고 나갔다.
정혈을 남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에선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신병과 음양을 통하는 부법은 사람의 영지(*靈智: 영묘한 지혜와 뛰어난 슬기)와 정신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선혈을 이용한 부법이 효과가 훨씬 뛰어났다.
이런 비상시기에 태후의 이목을 끌어들이려면 정혈을 아까워할 수 없었다.
환자는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채 부수를 들이켰다.
반주향(*약 15분) 정도 지나자 청년이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보세요! 둘째 숙부님께서 정말 나으신 것 같아요!”
그들은 늘 함께 지내는 가족이었기에 환자의 작은 변화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부수를 먹인 뒤부터 환자의 거친 호흡도 눈에 띄게 진정되어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던 셋째 나리조차 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효과가 있습니다. 효과가 있어요! 신의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절을 올리려 하자, 정미가 슬쩍 피했다.
“전 일이 있으니 이만 가봐야 합니다. 앞으로 이레마다 잊지 말고 현청관으로 저를 찾아오십시오. 제 도호를 말하시면 됩니다.”
“예, 예. 꼭 기억하겠습니다.”
사람들을 내보낸 뒤, 정미가 셋째 나리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셋째 숙부님, 오늘은 제 외조부님의 생신이라 늦지 않게 얼른 가봐야겠어요.”
“그럼 어서 가보거라.”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일이 떠올랐는지 물었다.
“셋째 숙부님, 설 형님은요?”
‘설 형님’은 춘시의 부정행위를 폭로한 공붓벌레 설융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후 시험을 치르지 않고 제생당에서 장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셋째 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설 선생은 고지식한 사람이지. 네가 백부와 연을 끊었다는 걸 알게 되자 사직을 신청했다. 네 은혜를 갚을 길은 없지만, 최소한 피해는 주고 싶지 않다더구나.”
정미는 왠지 가슴이 따뜻해졌지만, 설융에겐 관직도 없고 살짝 어리숙하다는 걸 떠올리자 저절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굳이 떠나려 하기에 나도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머슴을 보내 몰래 미행하게 했다. 동쪽 거리의 시장에서 서화를 팔고 사람들 대신 서신을 적어주는 일로 자리를 잡았더구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셋째 숙부님.”
셋째 나리는 정미를 입구까지 배웅한 뒤, 마차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한숨을 쉬고 뒤돌아 들어갔다.
* * *
정미는 마차에 앉아 잠시 생각하다가 마부에게 동쪽 거리의 시장 입구로 돌아가라 분부했다.
마침 시장이 닫히기 전에 도착했지만, 사람들이 북적였고 행상인의 고함이 귓가에 끊이질 않아 무척 시끄러웠다.
정미는 마차에서 내릴 수 없어 환안에게 사람을 찾아오라 시켰다.
“설 형님을 보면 나를 만나러 오라 전해줘.”
환안이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순식간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이 틈을 타 눈을 감고 쉬었다.
반 시진 후, 환안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소인이 설 선생을 모셔왔습니다!”
정미는 재빨리 창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안은 한 손으론 설융의 옷깃을, 다른 한 손으론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설융은 문약한 서생이었기에 온몸에 먹물을 뒤집어쓴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불쌍하고도 화난 눈빛으로 정미를 마주 보았다.
정미가 매서운 눈빛으로 환안을 쳐다봤다.
‘나중에 이 바보 같은 계집에게 모셔온다는 게 뭔지 알려줘야겠군. 이게 모셔온 거야? 거리에서 부잣집 소녀를 강탈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잖아!’
“설 형님, 오랜만이네요.”
정미가 머쓱한 듯 손을 흔들었다.
설융은 화가 나면서도 다급해져 말을 더듬었다.
“세, 셋째 아가씨, 얼른 이 여종을 막아주십시오. 남녀칠세부동석 아닙니까!”
정미가 이마를 짚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 뭐가 중요한데? 환안이 모셔온 방법이 문제 아닌가?’
“환안, 얼른 설 선생을 놓아줘.”
“예.”
환안이 설융에게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설융은 급히 뒷걸음질 치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환안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것 같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정미가 머리를 내밀고 불렀다.
“설 형님, 우선 마차에 타세요. 가면서 얘기하지요.”
설융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어색하게 말했다.
“독신 남녀가 어찌 한 마차에 함께 탈 수 있단 말입니까?”
정미는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서야 이를 갈며 말했다.
“환안, 설 선생을 마차에 태워드리거라!”
“예.”
환안이 불쑥 다가와 설융의 옷깃을 잡고 마차의 앞판 위에 올리고는 마부에게 말했다.
“설 선생을 잘 봐주세요. 떨어지지 않게요.”
그러고는 환안도 재빨리 마차에 올라 문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미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갑자기 환안을 꾸짖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두자. 흠흠, 나쁘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