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방법
정미가 눈을 떨구고 중얼거렸다.
“그랬군요.”
“화 귀비의 친가, 목은백부엔 남자아이가 하나뿐이다. 그 아이가 바로 화 귀비의 조카인데 이름은 화량이라 했던 것 같구나. 분명 그 집은 부덕한 짓을 많이 저질러 자손이 씨가 마른 것일 게다!”
한 씨가 이를 갈며 말하자 정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화 귀비가 태자와 화훤은 직계 남매라 했어. 그리고 목은백부 첫째 아가씨의 이름이 화훤이고! 직계 남매라 함은…… 그럼 태자가 사실은 현 목은백의 아들이란 소리잖아!’
정미는 큰 충격을 받아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 씨가 깜짝 놀라 정미의 이마를 짚었다.
“얼굴이 왜 이리 빨개? 아무래도 의원을 불러야겠다.”
정미가 급히 말렸다.
“그저 열이 나는 것뿐이에요. 물을 많이 마시고 땀 좀 빼면 나을 거예요. 어머니께서 의원을 부르시면 외조모님이 알게 되실 텐데, 그럼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
한 씨가 망설이자,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잊으셨어요? 저는 부의잖아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한 씨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정미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문을 닫았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정미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봤다.
‘태자가 목은백의 아들이었다니. 그럼 황가와 아무 관계도 없는 거잖아. 태후와 황상께서 이 일을 알게 되시면 어떡하지?’
그 순간 정미는 입궁하여 태후에게 모든 걸 밝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정미가 직접 폭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태자와 화 귀비는 끝장나겠지만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힐 황실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정미가 과연 무사할 수 있겠는가? 만약 위국공부와 정철까지 연루된다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터였다.
“진정해야 해. 충동적이어선 안 돼.”
정미는 침상 위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이럴 때마다 유난히 정철이 보고 싶었다.
‘오라버니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 * *
하루가 일 년 같은 고된 기다림 끝에 마침내 7월이 되어 정철이 황제와 함께 수도로 돌아왔다.
정철이 돌아오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당연히 위국공부에 가서 단 노부인과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는 일이었다.
정미는 정철을 보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드디어 돌아왔구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정철은 뭔가 찔리는 듯 다른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손을 빼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너와 사촌들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어. 이따 나눠 가져가.”
한흘 등 어린아이들이 정철을 둘러싸고 배시시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화서만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뭔가 언짢은 듯 다가오지 않으려 했다.
‘정미와 철 형님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억지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철 형님을 볼 때마다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게 되었어.’
정철이 어른들께 인사를 올린 뒤, 정미는 기회를 틈타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 나랑 형무원에 가자.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
정철이 정미를 따라 형무원으로 가자 정미는 곧바로 시종들을 내보내고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낮췄다.
“오라버니, 지난달에 또 궁에 다녀왔어.”
“태후께서 부르셨어?”
“아니, 동궁에 갔어.”
정미가 입을 꾹 다물더니 이어서 말했다.
“거기 가서 내가 큰언니의 혼을 불러왔거든.”
정철의 눈빛이 굳더니 가만히 정미의 말을 들었다.
정미가 손을 뻗어 정철의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나는 그날 한밤중에 큰언니의 잔혼을 불러와 언니가 죽기 전 장면을 재현했어. 태자가 언니의 목을 졸라 죽인 뒤 해당화 나무에 매달았던 거야! 큰언니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해당화 나무에 매달린 채 두 다리가 흔들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미미―”
정철이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정미를 품에 안았다.
정미가 고개를 들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보였다.
“오라버니, 큰언니 대신 복수해줘야겠어!”
정미를 안은 정철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는 꼭 해야지. 오라버니가 잘 생각해볼게.”
정미가 똑바로 앉아 정철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오라버니, 큰언니의 죽음으로 알아낸 일이 또 있어. 태자는 화 귀비가 낳은 자식이 아니야. 목은백의 아들일 거야!”
“뭐라고?”
정철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정미를 밀어냈다.
정미는 그날 본 장면을 자세히 설명한 뒤 이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태자와 화가의 큰아가씨가 직계 남매라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큰언니도 이 비밀을 알게 되어서 태자에게 입막음을 당한 거였고.”
“그렇다면―”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린 창백한 정미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아파져 그녀를 토닥였다.
“오라버니가 알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 * *
며칠 뒤, 정철이 다시 위국공부로 찾아와 알아낸 소식을 정미에게 말해주었다.
“화 귀비가 입궁한 뒤, 당시 황후를 제외하면 그녀가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지만 몇 년 동안 회임하지 않았어. 그리고 황후가 유폐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화 귀비의 회임 소식이 들려왔고. 당시 늘 화 귀비의 진료를 봐주던 사람은 성이 이(李) 씨였던 태의인데, 수도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알아봤더니, 그 이 태의는 화 귀비의 먼 친척 숙부였어.”
“그럼 그 태의는 지금 태의서에 있어?”
정철이 웃었다.
“이상한 건 화 귀비가 태자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태의가 호부(戶部)의 상서(尙書)댁에 왕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물에 빠져 죽었다는 거야.”
정미의 가슴이 싸늘해졌다.
“그럼, 태자는 역시 화 귀비의 친가에서 데리고 온 아이인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크지.”
정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빤히 쳐다봤다.
소녀의 손가락은 가늘었고, 물들이지 않아 연분홍빛을 내는 반질반질한 손톱은 짧게 정리된 채였다.
정미는 갑자기 눈을 들어 정철을 보며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태자 같은 사람은 절대 황위에 올라선 안 돼. 화 귀비도 태후 자리에 걸맞지 않고! 오라버니, 그렇지?”
“맞아.”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를 떠나서 일국의 신하로서도 이 일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가 직접 나설 수 없어.”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오라버니가 돌아오길 기다린 거야. 같이 대책을 상의하려고.”
정철이 잠깐 침묵하더니 정미에게 물었다.
“미미, 황후의 병을 치료할 수 있어?”
“황후?”
“그래. 20년 전의 일을 파헤치고 태자의 출신을 폭로하려면 중요 인물 둘이 필요해. 하나는 황후고, 다른 하나는 평왕이야.”
정철이 정미에게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황후가 유폐된 후, 화 귀비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지. 이게 그저 우연이라고 보긴 힘들어. 그럼 황후도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평왕은, 만약 평왕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태자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을 거야. 게다가 어떤 일들은 티 나지 않게 흘리기만 해도 굳이 나설 필요도 없이 알릴 수 있는 법. 평왕은 당연히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태자의 출신을 폭로하려 할 거야.”
정미가 반짝이는 눈으로 정철에게 말했다.
“평왕의 다리 치료는 시도해볼 수 있어.”
정철은 부의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정미가 설명해주었다.
“평왕의 다리는 부의의 열세 과목 중 상절과(傷折科)에 속해. 황후의 정신병은 폄침과에 속하고. 이 두 가지는 아직 많이 섭렵하지 못했어. 하지만 의서에는 치료할 수 있는 부법이 적혀 있었어. 조금만 시간을 주면 무조건 치료할 수 있다곤 확신할 수 없지만, 최소한 시도는 해볼 수 있어.”
“대략 얼마나 걸릴까?”
정미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상절과는 그나마 쉬운 편이야. 다리의 근골 절단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우면 돼. 하지만 평왕의 다리는 이미 오래된 병이니 빨라도 석 달은 배워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정신병은 사람의 머리에 관련된 것이라 가장 복잡해. 사부님조차도 치료할 수 없다 했으니,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얼마나 걸릴지는 확답할 수 없어. 하지만 정신병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해 천천히 병증을 관리할 수 있어. 황후의 광증은 전에 진사에 합격한 뒤 너무 기쁜 나머지 미쳐버린 거인 나리와는 조금 달라.”
맹 나리는 급성 담미심규증으로 기쁜 나머지 미쳐버린 것이었다. 이런 병증은 보통 의원들도 침질과 뜸질, 탕약으로 천천히 치료하면 호전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황후의 병인은 복잡했다. 청령진인조차 황후의 병은 치료하기 힘들다고 말했음에도 정미가 시도하려 하는 이유는 아혜가 가르쳐줬던 정혈로 부적을 만드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청령진인에게서 부법을 배울수록 청령진인의 부술은 아혜가 알려준 것과 매우 달랐다.
간단히 말하자면, 청령진인이 가르쳐준 부술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교의 정통 부술이었다. 천하제일 도관인 현청관뿐만 아니라 부법 비전이 있는 도관은 대부분 대동소이하며 각자의 특기가 있다는 점만 달랐다.
반면 아혜가 가르쳐준 부법은 기이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의 입을 열게 했다. 현청관의 부법 비전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은 신기한 부법이었다.
정미가 평왕의 다리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혜가 자신의 핏줄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했으니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이 생각이 들자, 정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아혜를 경계하면서도 결국 스스로 정혈을 통해 부적을 그리는 방법을 택하는구나. 역시 여태까지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 여전히 그 방법에 미련이 남아 있나 봐.’
“미미, 그럼 일단은 공부부터 해. 나는 20년 전의 일을 더 알아볼게.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후 정미는 현청관에 머물며 공부에 전념했고 밖으로 거의 나오지도 않았다.
* * *
눈 깜짝할 새 가을이 되고 현청관의 은행나무도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랑잎 나비처럼 어지럽게 흩날렸다. 은행나무 길을 걸으면 노란 잎이 어깨에 떨어지곤 했다.
정미는 어깨와 머리 위에 떨어진 낙엽을 털어내며 두 달 만에 하산했다.
이번 하산은 노위국공의 축수(*祝壽: 오래 살기를 빎)를 위한 것이었다.
대량의 수도는 서쪽이 부유하고 동쪽은 가난했기에 서쪽으로 갈수록 훈귀고관들이 모여 있었다. 현청관에서 위국공부로 가는 길은 회인백부를 거쳐 제생당을 지나야 했다.
정미는 회인백부를 몹시 혐오했지만, 제생당은 정미가 회인백부를 나갈 수 있었던 시작이었기에 좋은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쯤이면 셋째 숙부가 일찍이 제생당으로 와 이웃들에게 진료를 볼 시간일 텐데.’
정미는 참지 못하고 창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제생당 입구는 떠들썩했고 오가는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고 있었다.
“멈추어라.”
정미가 외쳤다.
마차는 제생당 입구 근처에 멈춰 섰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정미가 환안에게 명령했다.
환안이 ‘예’하고 대답하고는 마차에서 내렸고, 금방 돌아와 정미에게 보고했다.
“몇몇 사람이 어떤 미친 사람을 데리고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뭐라고 하는데?”
환안이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가씨와도 관련이 있네요. 예전에 어떤 실성한 거인 나리가 제생당에서 치료받은 후 신의님께 편액까지 바쳤다 들어 환자를 데리고 왔는데, 지금 제생당에선 치료할 수 없다고 하니 말을 듣지 않고 소란을 피우고 있는 거예요.”
“그랬구나.”
정미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동안 정미는 늘 태후에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이 기회로 자신의 경력이 태후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정미가 직접 자천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일 터였다.
“내가 가볼게.”
정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안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붙잡았다.
“아가씨, 아직도 회인백부의 일을 신경 쓰시는 거예요?”
정미가 담담하게 웃었다.
“아니. 하지만 셋째 숙부님의 일인데 보고도 모른 척할 순 없잖아.”
정미는 마차에서 내려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태자를 끌어 내리기로 결심한 후, 소녀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