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81화 (281/375)

281화. 단서

인적이 드문 야심한 밤, 하늘엔 어느새 구름이 드리워 달빛을 가렸다. 희미한 별빛과 저 멀리 처마 밑에 걸려있는 궁등의 빛은 화원을 아주 약하게 비추고 있었다. 초목이 크고 무성한 곳은 새까맸고 나뭇가지와 꽃줄기는 귀신의 마른 팔처럼 보여 아주 무서웠다.

정미는 차마 등롱을 들 수 없었다. 발걸음 소리도 아주 조용했다. 마음속으론 계속 자신을 위로했지만, 등 뒤는 식은땀으로 푹 젖어갔다.

희미한 빛을 따라 조심스럽게 걷다 보니 마침내 기억 속의 해당화 나무를 찾아냈다.

정미가 손을 뻗어 나무줄기를 어루만졌다.

밤은 아주 조용해서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미가 눈을 감고 바람에 날아갈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큰언니, 저 왔어요. 제가 초혼술을 잘 이뤄낼 수 있게 저를 지켜주세요.”

서금과는 부의의 열세 과목 중 가장 현묘하고 복잡한 과목이었다. 한 가지 부술을 배우는 데는 노력만으론 부족하며 순간의 깨달음이 있어야 배울 수 있었다.

정미는 초혼술을 반 정도 깨우친 상태였기에 성공 확률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초혼술이 성공하려면 그 혼이 떠난 지 얼마나 흘렀는지가 중요했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을수록 초혼에 성공할 확률이 떨어졌다.

정미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바로 정아의 혼을 불러오기에 가장 적기라 생각했다.

‘게다가 나와 큰언니는 친자매이니까.’

초혼술은 지친(*至親: 매우 가까운 친족)이 하게 되면 성공률이 높아졌다.

정미는 마음을 가다듬고 해당화 나무 아래 쭈그려 앉아 허리춤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작은 백자 그릇 세 개는 향을 꽂는 용도였고, 청옥 그릇은 부수를 담는 용도였다.

정미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하지만 곧바로 초혼부를 그리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음이 완전히 차분해졌을 때, 그제야 눈을 뜨고 손을 들었다. 손끝에 맺힌 피로 허공에 부적을 그리자 획마다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그 현묘하고 기이한 장면에 주위를 맴돌던 새와 벌레들도 멍하니 지켜보는 듯 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마침내 마지막 획을 마무리하자 유광(流光)이 청옥 그릇에 담겼다. 그릇에 있던 깨끗한 물은 연분홍색으로 바뀌었다.

정미는 청옥 그릇을 이마까지 높이 들고 절을 올린 뒤, 부수를 조심스럽게 해당화 나무 아래에 뿌렸다.

이어서 선향 세 개를 피워 백자 그릇에 꽂았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주문을 외웠다.

“반혼향(反魂香) 하나에 삼계로 통하는 길을……, 또 하나에 저승을 통하고……, 반혼향 세 개에 십전(十殿)으로 날아가니…….”

그러자 바람이 불고 해당화 나무의 잎이 갑자기 세차게 흔들렸다. 정미의 귓가엔 구슬프게 흐느껴 우는 소리가 울렸다.

정미는 눈을 번쩍 떠 멍한 눈빛으로 눈앞의 익숙한 모습을 쳐다봤다.

진홍색 피풍을 걸친 그녀는 여전히 겨울 옷차림이었고 바닥에 닿지 않는 발로 앞으로 날아갔다.

정미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 여인을 따라가자 곧 태자의 서재에 도착했다.

여인은 태자가 서재에 없자, 책장 뒤로 돌아가 아무 책이나 꺼낸 뒤 책장에 기대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밖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태자와 화 귀비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 모비,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태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화 귀비에 대한 불만이 드러났다.

– 침아, 지금 나를 탓하는 게냐?

태자의 감정이 격해졌다.

– 그때 사촌 여동생을 입궁시킬 때도, 지금 유야의 병을 치료하려 할 때도 안 된다고만 하시는군요. 모비,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기 시작하자, 정미는 그 대화를 또렷이 들을 수 없었다.

불러온 혼이 그날의 상황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정미는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화 귀비의 마지막 말만은 또렷이 들려왔다.

– 네가 뭘 안다고. 네가 뭘 안다고! 침아, 화훤(華萱)과 너는 직계 남매이지 않느냐!

정미는 깜짝 놀랐고 책장 뒤에 있던 사람도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곧 장면이 바뀌었다.

정아는 필사적으로 달리는 중이었고 뒤엔 태자가 쫓아오고 있었다.

앞쪽에서 달리는 자는 영혼이라 발이 땅에 닿지 않았고 오싹한 귀기(鬼氣)를 내뿜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태자의 얼굴은 몹시 흉악해 귀신보다도 무서웠다.

정미는 정아의 얼굴에선 두려움을, 태자의 얼굴에선 살기를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정미는 이것이 잔혼이 재현해주는 장면임을 잊은 듯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저도 모르게 외쳤다.

“큰언니, 빨리 뛰세요!”

하지만 정미의 바람과는 달리 정아는 화원 안에서 필사적으로 달리다가 해당화 나무 아래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정아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태자는 이미 근처까지 쫓아와 속도를 늦추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 전하, 저는 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정아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해당화 나무 쪽으로 움츠러들었다.

태자가 웅크려 앉아 또박또박 물었다.

–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그럼 왜 도망가는 거요?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을 정아의 목에 올리더니 갑자기 힘을 주었다.

정아는 양손으로 태자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 전하, 제발 저를 놓아주세요. 유, 유야도 돌봐야 하지 않습니까―

황손을 언급하자 태자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더니 손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정아는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며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정미는 태자에게 달려들어 손을 떼어내려 하며 소리를 질렀다.

“놔, 우리 언니를 놔 줘!”

태자는 정미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손 위에 푸른 핏줄이 드러날 때까지 힘을 주었다.

정아의 두 다리는 더 이상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은 크게 뜬 채였다. 눈가엔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자는 마침내 손을 놓았고 숨이 멎은 정아를 잠시 쳐다보다가 차갑게 웃었다.

– 본궁의 앞에서 유야 얘기를 꺼내다니! 네가 멍청한 아이를 낳지만 않았어도 본궁이 이렇게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일을 알게 되었겠느냐? 이건 네 운이 나쁜 탓이라 생각하거라!

그러고는 정아의 허리춤에서 연노란색 허리띠를 빼냈고 고개를 들어 해당화 나무의 나뭇가지에 허리띠를 묶고는 정아의 시신을 안아 올려 걸었다.

“금수만도 못한 놈, 이 금수만도 못한 놈아!”

정미가 달려들어 태자를 필사적으로 쥐어뜯었다.

그러나 태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큰언니!”

정미가 정아의 발치에 서서 허공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다리를 껴안았다.

그러자 바람이 멈추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백자 그릇에 꽂았던 향 세 개는 이미 다 타들어 가고 없었고, 재는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해당화 나무의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미는 눈물범벅이 된 채 고개를 들고 정아가 매달렸던 나뭇가지를 쳐다봤다. 그러나 정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입을 틀어막고 울부짖었다.

“큰언니―”

그때,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옷자락이 스쳐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고요한 밤중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미는 울음을 멈추고 경계하며 쳐다봤다. 희미한 별빛이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비췄다.

그러자 정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동이었다.

정동은 빠르게 다가와 궁등으로 정미를 비춰보았다. 정미가 엉망인 얼굴로 바닥에 앉아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자 다가가 그녀를 일으키며 깔봤다.

“이렇게 울 거면서 왜 안 무섭다고 한 거야?”

“왜, 왜 왔어?”

정미는 나무에 매달린 정아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동이 눈을 부라렸다.

“언니가 여기서 놀라 죽어서 내가 곤란해질까 봐!”

정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동은 고개를 숙여 주변을 훑어봤다.

“다 했지? 정리하고 어서 가자. 여긴 어쩐지 좀 으스스한 것 같아.”

정동은 아무 의미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 정미의 귀엔 다르게 들렸다.

정미는 왠지 마음이 아파져 정동을 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큰언니의 잔혼이 방금 떠났는데, 여기가 어찌 으스스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정동의 몸이 굳더니 한참 뒤에야 말했다.

“어서 가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는……. 아, 내 옷에 묻히지 마!”

‘나랑 정미랑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왔는데,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보는걸. 역시 큰언니와는 아주 친했나 보다. ……흥, 전혀 부럽지 않거든. 나도 동생들이랑 친하니까.’

“응, 가자.”

정미는 정신을 차리고 웅크려 앉아 물건을 챙긴 뒤 정동과 말없이 돌아갔다.

* * *

방에 돌아온 뒤, 다시 세수를 하고 자리에 눕자 정미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정미가 이상한 걸 느낀 정동의 안색이 좋지 않아졌다.

“그러니까 야밤에 쓸데없는 짓 말라 했잖아. 봐, 열까지 나고!”

정동이 어의를 부르려 하자 정미가 막았다.

“난 황궁의 사람이 아니니 아프다고 해서 궁에서 진료를 볼 수 없어. 게다가 난 부의인걸. 이 정도는 별거 아냐. 돌아가서 약 먹고 쉬면 금방 나을 거야.”

“그럼 사람을 불러서 현청관까지 데려다줄게.”

“현청관 말고, 위국공부로 갈 거야.”

“위국공부? 알겠어.”

그렇게 정미는 작은 가마를 타고 위국공부로 돌아갔다. 그녀는 단 노부인에겐 차마 열이 난다고 알리지 못해 한 씨 한 사람에게만 알렸다.

한 씨가 정미의 침상 옆에 앉아 꾸짖었다.

“황궁에서 하룻밤 잤다고 열이 난다고? 그러니 내가 말했지 않니. 궁은 무서운 곳이라고. 누가 들어가든 좋은 꼴을 못 본다니까! 앞으로는 가지 말거라!”

정미는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유야가 궁에 있는걸요. 그 아이를 지켜줄 친모가 없으니, 제가 이모로서 자주 가봐야지요.”

정아가 떠오르자, 정미는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급히 눈을 감았다. 눈가가 곧바로 촉촉해졌다.

한 씨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왜 우니. 유야가 구박이라도 받고 있더냐?”

그러더니 한 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정동 그 계집이 유야를 못살게 구는 거야?”

정미가 눈을 떴다.

“아니에요. 그저……, 그저 유야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요.”

한 씨는 복잡한 표정으로 정미의 손등을 토닥였다.

“너무 깊게 생각 말고 푹 쉬거라.”

유야는 정아의 친아들이었고 정아는 젊은 나이에 황궁에서 죽었지만, 그럼에도 유야는 황가의 일원이었다.

한 씨는 이 외손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미가 떠나려는 한 씨의 옷깃을 붙잡았다.

“어머니, 잠깐 앉아 계세요. 저랑 얘기 좀 나눠요.”

“다 나은 뒤에 이야기하면 안 되겠니?”

한 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미는 지난 밤 자신을 괴롭게 했던 문제를 꺼내어 물었다.

“어머니, 화 귀비는 어떤 사람인가요?”

“화 귀비?”

한 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화 귀비는 왜 물어보니? 좋은 사람은 아니다!”

“어머니, 어쨌든 저는 앞으로 자주 궁에 드나들게 될 거예요. 그러니 알려주세요.”

“말 그대로다. 화 귀비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예전엔 황후 앞에서 그리 공손이 굴더니, 사실 속내는 시커멨지. 나중에 황후가 실세(*失勢: 권력을 잃음)했을 때, 정확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분명 화 귀비와도 관련이 있을 게다.”

“그럼 화 귀비는…… 그 이후로 홀로 황상의 총애를 받았으면서 왜 자식은 태자 하나뿐일까요?”

한 씨가 차갑게 웃었다.

“화 귀비는 입궁한 뒤 몇 년 동안 회임 소식이 없었지. 아들 하나를 얻는 데에도 선향을 얼마나 피웠는지 모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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