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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80화 (280/375)

280화. 동궁에 머물다

5월 말, 정동이 태자의 동궁으로 들어가 정3품 양제에 봉해졌다.

정미는 이 소식을 듣고 한참 멍해졌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6월 초에는 창경제가 비빈들과 대신들을 데리고 청량산에 피서를 갔고, 육황자에게 강독을 하는 스승인 정철도 그 대열에 포함되었다.

정미는 현청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수도가 한산해졌을 때 황상의 영패를 들고 정동을 만나러 갔다.

‘오라버니가 황궁과 엮이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큰언니가 떠난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 더 이상 초혼술을 미루면 때를 놓치게 될 거야.’

* * *

태자가 자리를 비우자 동궁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화원 안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던 꽃들도 화창한 햇살 아래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정동은 정미의 첩자를 받아보고는 낙관에 쓰인 ‘현미’ 두 글자에 왠지 마음이 아팠다.

‘현미-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일을 피해 현청관에 숨을 수 있다니 정말 좋겠다.’

정동은 자신이 갈수록 정미를 질투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심지어 어떨 땐 만약 정미가 여전히 백부에 있었다면, 지금 황궁이라는 감옥 안에 갇힌 사람은 누굴지 생각하기도 했다.

정동은 알고 있었다.

‘만약 정미가 여전히 회인백부의 셋째 아가씨라고 해도 무조건 정미가 입궁하진 않았겠지. 그리고 태자의 양제 자리는 서녀 따위가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그때 옆에 있던 궁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님, 첩자를 보낸 내시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미 도장을 안 만나시는 겁니까?”

정동은 정신을 차리고 궁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만날 것이다. 가서 차와 간식을 준비하라 일러두어라. 현미 도장이 오셨을 때 내어올 수 있도록.”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 현미 도장께선 대추떡을 좋아하신다. 대추는 빼고.”

“예.”

궁녀가 물러나자, 정동은 홀로 방 안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질투한다고 뭐가 달라져? 결국 정미가 현청관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제 능력 덕분인걸. 난 회인백부의 아가씨라는 신분 외엔 아무것도 없고. 뭐 하러 남을 원망해? 화내고 원망해봤자, 내 자신이 더 불쌍해질 뿐이야!’

정동이 벌떡 일어나 천천히 화장 거울 앞으로 가 앉은 후 눈썹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손님이니 좀 생기발랄하게 보여야지.’

그렇게 정미가 찾아왔을 때, 이복동생이자 현 태자의 양제인 정동은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꾸민 채였다.

하지만 정미는 부의였기에 얼굴을 보고 건강상태를 파악하는 건 기본기나 다름없었다. 정미는 정동을 한 번 훑어보는 걸로 그 아름다운 모습도 그저 가면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셋째 언니, 들어와 앉아.”

정동이 정미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낮은 평상 위에 함께 앉았다.

“유야를 보러 온 거지?”

“유야도 볼 겸 너도 볼 겸 온 거지.”

정동이 잠시 멈칫하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뭐 하러. 볼 것도 없는데.”

그러고는 궁녀에게 명령했다.

“유모에게 황손을 안아오라 전하거라.”

잠시 후, 용훤이 유모의 품에 안겨 들어왔다. 정동은 유모에게서 아이를 건네받고 정미에게 보여주었다.

용훤은 벌써 첫 돌이 다 되어갔고 또렷해진 이목구비는 정아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뽀얗고 높은 콧대는 아주 기품 있었지만 아쉽게도 입가에는 여전히 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시선에도 초점이 없었다.

황손은 자랄수록 보통 아이와 눈에 띄게 달랐다.

정동은 부드러운 손수건을 꺼내 용훤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용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지만 손을 뻗어 정동의 손가락을 잡았다.

정동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더니 웃으며 말했다.

“예전엔 아무 반응도 없었는데, 지금은 내 손가락도 잡을 줄 알아. 내가 이모인 줄 아나 봐.”

정동이 궁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태자는 처음 사흘에만 정동의 거처에 머무르며 그녀를 아주 고통스럽게 괴롭히더니 이후 다신 찾아오지 않았다.

정동은 자신이 태자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태자는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후궁 중 가장 오래된 손 양제처럼. 이번에 청량산에 피서를 갈 때도 태자는 손 양제와 작년 중양절에 들인 다른 양제 둘을 데리고 갔다.

정동은 사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태자는 나를 안 좋아하지만, 나도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으니……. 내가 유야를 잘 보살피며 이 동궁에 자리를 잡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

사람은 누군가에게 심지어 어떤 물건에게라도 마음을 쓰게 되면, 동기가 어떻든 간에 점점 정을 주게 되는 법이었다. 정동도 그렇게 유야에게 진심을 쏟게 되었다.

그리고 정미는 당연히 정동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별해낼 수 있었다.

사실 정미는 자신보다 조금 어린 정동이 유야를 진심으로 아껴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유야의 병을 꺼리지도 않았다.

정미는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이었지만 정동의 손을 덥석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정동, 정말 고마워.”

정동이 손을 빼며 콧방귀를 꼈다.

“왜, 언니가 나보다 유야와 더 가깝다고 생각해? 그래서 특별히 내게 고마워하는 거야?”

“아니. 만약 동궁에 들어온 사람이 나였다고 해도 너만큼은 유야를 잘 보살피지 못했을 것 같아서.”

정동이 눈을 부라렸다.

“됐어. 그만해.”

정미는 무안한 듯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유야를 예뻐하다가 손을 씻고 궁녀가 내온 차와 간식을 먹었다.

정미는 백옥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대추떡을 발견하자 고개를 돌려 정동을 쳐다봤다.

“궁에서 만든 대추떡이 백부 것보다 맛있길래…….”

정동이 어색한 듯 말했다.

‘난 정미의 입맛을 신경 쓴 게 아니라고. 그저 내가 궁에서도 마찬가지로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

“응. 진짜 회인백부에서 만든 것보다 맛있네.”

정미가 대추떡을 야금야금 먹은 뒤 차를 들이켰다.

그렇게 차와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반나절이 지나갔다.

정동이 정미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줬다.

“날이 꽤 어두워진 것 같은데.”

‘설마, 저녁까지 먹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정미가 창밖을 쳐다보더니 깜짝 놀랐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정말 어두워졌어.”

정동이 차를 들며 정미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 했을 때, 정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왕 늦었으니 그냥 여기서 하루 자고 갈게. 너랑 같이 있어 줄 겸.”

‘응?’

찻잔을 든 정동의 손이 멈칫하더니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우리가 언제부터 같이 잘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는데? 난 전혀 몰랐는걸?’

한편 정미는 오히려 이게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다.

정동의 입궁이 안타깝긴 했지만, 정동이 동궁에 들어온 덕분에 여기 머무를 핑계가 생긴 것이기도 했다. 정아의 혼을 불러오려면 꼭 자야(*子夜: 자시(子時)인 한밤중.)에 이뤄져야 했다.

“난 다른 사람이랑 못 자.”

정동이 찻잔을 움켜쥐었다.

“한 번 자 보면 적응될걸.”

정미가 뻔뻔하게 말하자 정동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런 무뢰한 같은 말을 하다니? 한 번 자 보면 적응된다니. 저, 정미에게 이상한 취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

정동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정미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큰언니 때문이야. 언니가 죽은 곳에서 지전도 태우고 향도 몇 개 피워주고 싶어서.”

정동이 깜짝 놀랐다.

“황궁에서 그러면 안 돼!”

“알아. 하지만 어른들 말로는 떠난 사람에게 지전을 보내고 싶으면 그 사람의 묘 앞이나 죽은 곳이 가장 좋댔어. 큰언니가 묻힌 곳은 황릉이니 나는 찾아갈 수 없을 테고. 큰언니가 떠났을 때 난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는걸.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곳도 없고. 그래서 힘들어서 그래.”

정미의 말을 듣고 나니 정동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나랑 같이 자고 싶다는 건 그저 핑계였구나.’

하지만 정동은 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흥, 전혀 안 아쉽거든.’

“정동, 한 번만 도와줘.”

정미가 정동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정동은 잠시 망설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조심해야 해, 들키지 말고.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난 같이 가지 않을 거야.”

‘어차피 태자도 안 계신데 그냥 한 번 도와주지 뭐.’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밤이 되었다.

정미는 조용히 일어나 청색 휘장을 걷은 뒤 신발을 신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숨긴 물건을 매만졌다. 정아의 혼을 불러올 기물들이 모두 여기 있었다.

몸에 뭔갈 지니고 궁에 들어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들을 들고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쥐어 짜냈는지 모른다.

정미는 병풍을 돌아 밖으로 나가다가 깜짝 놀랐다.

“정동, 왜 여기 있어?”

정동은 편한 외투를 걸치고 있었고 누가 봐도 방금 일어난 모습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언니, 정말 혼자서 큰언니에게 지전을 태워줄 생각이야?”

“응. 아까 말했잖아.”

“이렇게 깊고 큰 궁에, 게다가 한밤중인걸. 안 무서워?”

맑은 달빛과 등불이 창살 너머로 정동의 얼굴을 비추자 안색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무섭냐고?’

정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신기해하는 부의지만 어쨌든 정미도 어린 아가씨였다. 심야에 동궁에서 초혼술을 하는데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섭더라도 꼭 해야 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정미가 빙긋 웃었다.

“안 무서워. 큰언니에게 제사를 지내는 거잖아. 큰언니가 분명 날 지켜줄 거야.”

정동이 콧방귀를 뀌었다.

“입만 살아가지고.”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궁녀를 불러줄게. 같이 가.”

정동과 정아의 관계는 늘 담담했고 정동은 어두운 걸 가장 무서워했기에 절대 정미를 따라가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미 혼자 보내기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진짜, 왜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드는 거람!’

“괜찮아.”

정미가 단호히 거절했다. 정동의 표정이 순간 굳자, 정미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도 말했잖아. 황궁에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네 궁녀는 네가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시종도 아닌데, 여기 궁 안의 사람들은 다 누군가의 눈이야. 그러니 이 일은 절대 제삼자에게 알릴 수 없어. 쓸데없는 소란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나 혼자 갈게.”

“하지만―”

“괜찮다니까. 봐, 난 키도 크고 힘도 세. 동궁에 있는 사람은 여인 아니면 태감일 텐데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아, 얼른 놔! 아프다고!”

정동이 정미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를 노려봤다.

“태감과 여인만 있다고 누가 그래? 궁문 밖에도 호위가 있어. 지전을 태우려거든 잘 태워. 불이라도 냈다가 호위한테 들키면 큰일 날 테니.”

“알겠어, 알겠어. 걱정 마. 더 늦으면 날이 밝겠다. 며칠 유야를 돌봤다고 벌써 어머니 같은 잔소리를 하다니. 안 되겠구나.”

정미가 정동의 뺨을 꼬집자 정동이 찰싹 때리며 짜증을 냈다.

“남의 호의를 개떡으로 알아. 얼른 가.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도 못하고 돌아오지 말라고!”

정미가 떠난 뒤, 정동은 조용히 침상으로 돌아와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역시 정미가 제일 미워. 정미보다 미운 사람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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