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행동
정미가 떠난 후, 태후가 웃으며 교 유모에게 말했다.
“도사라고 해도 결국 천진난만한 아가씨로구나. 이 점이 몹시 마음에 들어.”
교 유모가 대답했다.
“현미 도장은 총명하신 분이지요.”
“그래, 정말 총명한 아이더구나.”
태후는 차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에 그려진 무늬를 매만지다가 천천히 말했다.
“애가는 화 귀비가 그 아이를 상하연에 초대했다 하여 혹시나 귀비의 속셈에 넘어갈까 봐 불렀더니―”
방금 태청지에서 들려온 소식이 떠오르자, 태후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태후는 당연히 화 귀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는 곧 황제가 될 몸이었기에, 태후는 친가와 황후를 위해서라도 굳이 맞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화 귀비와 태자가 어린 여자아이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태후는 기분이 몹시 통쾌했다.
이에 태후는 정미에 대한 호감이 더욱 깊어졌고 만약 애초에 정미가 태자비가 되었다면 이 고인 물처럼 무료한 나날들이 조금이라도 활기찼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자비가 된 사람이 정미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며느리를 화 귀비가 가지는 건 원치 않으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화 귀비가 이득을 보는 건 원치 않았다.
그 후 태후는 그 오랜 기간 중 처음으로 창경제에게 말을 전했다.
“애가가 현미 도장의 경전을 아주 좋아하니 앞으로 자주 궁에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황상께서 궁궐에 드나들 수 있는 영패를 하사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현미 도장은 도사지만 아직 젊은 여인이기도 하지요. 궁 안의 황자들에게 우연히 현미 도장을 마주치더라도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교육해주십시오. 국사께 우스운 꼴을 보일 수 없으니.”
태후의 말에 태자와 다른 황자들은 황상에게 교육을 받았고 특히 ‘문제 학생’인 태자는 더욱 유의하여 가르쳤다. 대부분 앞으로 현미 도장이 궁에 들어왔을 때 무슨 소란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는 뜻이었다.
태자는 울화가 치밀었다. 다음에 정미를 만나면 호되게 갚아줄 생각이었는데 곧바로 이런 경고를 들으니 피를 뿜을 뻔했다. 그는 동궁으로 돌아온 뒤 난동을 부리며 기물을 파손하고 끼니도 거르기 시작했다.
* * *
정미는 궁에서 나오자마자 버드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정미가 기뻐하며 치맛자락을 들고 다가갔다.
“오라버니, 왜 여기 있어?”
정철은 기다리는 동안 몹시 초조해하며 정미를 걱정했으나 겉으론 조금도 티 내지 않았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마침 육황자에게 강독을 하는 날인 데다가 미미도 궁에 들어왔으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
멀지 않은 곳에 현청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서 두 사람은 곧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미미, 오늘 상하연은 어땠어? 별일 없었어?”
정미는 당연히 정철에게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으며 차갑게 웃었다.
“화 귀비의 수단은 너무 저열해. 궁녀에게 실수인 척 내 옷을 적시게 하고 내게 남들에게 말 못 할 손해를 입혀서 태자와 혼인할 수밖에 없게 만들려고 했어. 정말 잘못 생각한 거지!”
정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천천히 물었다.
“미미는 그걸 어떻게 해결한 거야?”
‘육황자의 이야기를 들은 황상이 당연히 그쪽으로 찾아갔을 텐데. 황상이 자리에 계시면 화 귀비도 그 수단을 쓸 수 없었을 테고. 설마 황상께서 찾아가지 않았나?’
정철은 가슴이 답답했다.
‘황궁 안의 일은 내가 아무리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미미를 지키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정미는 정철이 자신을 걱정하여 표정이 좋지 않은 줄 알고 급히 손을 흔들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내가 당하고 살 사람이야? 태자와 젊은 태감의 옷을 홀딱 벗겨서 침상에 같이 올려두고 다른 길로 돌아서 태청지로 돌아갔어.”
그러고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화 귀비가 비빈들을 데리고 구경하러 갔다던데? 나중엔 황상도 찾아갔다고 하고. 다들 그 상황을 보고 무슨 반응을―”
정철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자, 정미는 웃음을 멈추고 손으로 그를 살짝 건드렸다.
“오라버니, 왜 그래?”
정철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늘 담담하던 눈빛이 한순간에 사나워지자 아주 무서웠다.
정철이 또박또박 물었다.
“벗겼다고?”
“응?”
정미는 순간 중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철이 갑자기 매서운 분위기를 내뿜자 왠지 불편해서 저도 모르게 옆으로 몸을 옮겼다.
정철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두 손으로 마차 벽을 짚어 그 사이에 정미를 가뒀다.
“미미, 뭐라고 했어. 태자와 젊은 태감을 벗겼다니. 내가 이해한 게 맞아?”
정미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라버니가 이해한 게 맞아.”
정철의 얼굴이 새카매지더니 힘겹게 말을 쥐어짜 냈다.
“정미, 너는 아직 아가씨야. 네가 사내 둘을 벗겼다는 걸 내게 자랑해서 되겠어?”
“둘 중 하나는 태감인걸…….”
“아, 그것까지 확인하셨겠다?”
정철은 눈을 질끈 감고 정미를 훅 잡아당겨 무릎 위에 엎드리게 하고는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오라버니가 나를 때리다니!’
정미는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 세게 때리진 않았지만, 찰싹하는 소리가 나자 두 사람 모두가 당황했다.
정미가 손발을 허둥대며 일어나 엉덩이를 감싸며 씩씩댔다.
“오라버니, 왜 함부로 때려!”
차분해지자 정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차갑게 말했다.
“때리지 않으면 또 잊어버릴까 봐! 아가씨가 사내의 옷을 함부로 벗겨도 돼?”
정미는 몹시 억울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 눈에 사내로 보이지 않는걸! 젊은 태감은 물론이고, 태자는 그리 천박해서 내가 키우는 반어보다도 품격이 없어! 아니, 북명 사형이 내게 키우라고 준 거북이 두 마리도 태자보단 나을걸.”
정철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씰룩였다. 화도 반쯤 가라앉은 듯했다.
“그렇게 생각해?”
정미는 흥 하고 토라졌다.
‘어릴 땐 아무리 심한 장난을 쳐도 안 때렸으면서. 이제 내가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걸 알았으니까 소중히 하지 않는 거지? 나중에 시집간 뒤엔 더 자주 얻어맞을지도 모르겠네!’
정철은 뾰로통한 정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웃기면서도 왠지 어이없어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됐어. 너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거지? 하지만 어쨌든 간에 앞으론 그러면 안 돼. 많이 아팠어?”
정미는 그제야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그러다 못된 마음이 들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만져줄래?”
정철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정미를 휙 밀친 뒤 경계하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아직 덜 아픈가 보구나!”
정미는 장난이 성공하자 그제야 화를 풀었다.
정철이 물었다.
“황상은 어떻게 처리하셨어?”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태청지로 돌아온 뒤 금방 태후마마께 불려갔거든.”
“태후?”
정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미가 가면 갈수록 자신을 더 크게 놀라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철은 관직에 오른 뒤 의지할 가족도 손잡을 어른도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의 신중함과 세심함으로 황친과 귀족의 자제, 그리고 문무백관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태후가 외부인을 만나지 않는다는 건 정철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정미는 태후가 현청관에 왔던 일을 설명하고는 정철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상상도 못 했을걸. 그날, 태후마마께서 황후마마와 함께 오셨어.”
정철은 깜짝 놀랐다.
“황후? 그럼 태후마마께서 국사께 황후마마의 진료를 부탁드린 건가?”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국사께서 승낙하셨어?”
“사부님께선 거절하셨어. 황후마마의 병은 마음의 병이라 약도 의원도 쓸모없다고.”
정철의 얼굴이 차가워지더니 짙은 푸른색의 창발 너머 창밖을 한 번 쳐다봤다.
떠들썩한 거리는 마차 안의 기척을 완전히 덮어버렸고 아무도 남매의 대화가 얼마나 무서운 주제를 다루는지 알 수 없게 했다.
햇살은 화창했지만 정철의 마음속엔 어둠이 드리웠다.
“그럼 태후마마께서 왜 너를 부르신 거야? 현청관을 찾아온 그 날, 네가 태후의 눈에 띄는 행동이라도 했어?”
그러고는 멈칫하더니 정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어서 물었다.
“설마 태후마마께서 네가 황후마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기시는 건 아니겠지?”
정미는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정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정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미미, 오라버니 말 들어. 황궁과 엮여선 안 돼.”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나중에…… 황위에 오르는 자가 태자가 아닌 이상.”
정미의 눈이 커졌다.
정철이 정미를 토닥였다.
“오래전 일은 너도 모르지. 화 귀비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총애를 받은 게 아냐. 처음엔 화 귀비와 황후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대. 황상도 그땐 황후와 금실이 좋았고 오히려 다른 비빈들에게 담담하게 대하셨다더군. 그러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난 뒤로 황후는 총애를 잃고 유폐되었고, 그때 화 귀비가 머리를 들기 시작한 거야.”
정미는 열심히 듣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 이후엔?”
정철이 웃었다.
“그 이후엔 지금과 같은 상황이지. 미미, 잘 생각해봐. 이 황궁에서 황후의 정신이 맑아지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볼까?”
“화 귀비와 태자.”
정미가 중얼거리자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황후를 치료하고 화 귀비와 태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나중에 태자가 황위에 올랐을 때 너를 가만둘 것 같아? 위국공부까지도 연루될 수 있어.”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정미가 고개를 숙였다.
“알아들었어.”
정철은 그제야 안심하며 정미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이건 걱정 마. 황상께서 찾아가 주신 덕분에 화 귀비와 태자가 대놓고 네게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없을 테니.”
* * *
정철의 예상이 맞았다. 정미가 현청관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상이 대태감 주홍희를 통해 영패를 보내왔고 앞으로 정미는 자유롭게 궁궐에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태자가 여전히 태자비를 그리워해 태자비를 선출하는 일은 잠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이 퍼져나가자 사람들 사이엔 희비가 교차했다. 하지만 정동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동 이낭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어머니, 태자비를 선출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왜 제가 입궁하는 건데요?”
동 이낭이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뜻밖의 일이구나. 태자비는 선출하지 않더라도 황손을 돌봐야 하는 사람은 필요하니, 귀비마마께서 너를 떠올렸다 하셨단다. 상심하지 마렴. 궁에 들어가면 양제의 신분이 되는 거야. 그건 정3품의 계급 아니니.”
“정3품이요?”
정동이 중얼거리며 되새기다가 동 이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3품의 양제라면 첩이나 다름없잖아요?”
‘귀비마마께서 나를 떠올린 게 아니라 분명 어제 조모님이 궁에 들어가서 뭔갈 하신 거겠지. 결국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첩’이라는 말에 동 이낭은 마음이 아파 잠시 멈칫하다가 정동을 위로했다.
“어리석은 소리 말거라. 태자의 첩과 평범한 첩이 같니? 네가 황손을 잘 보살펴주고 나중에 네 아들이 생기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말해서 귀비도 황상의 첩인걸. 근데 지금 누가 감히 귀비마마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정동은 진이 빠져 더 이상 동 이낭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정동의 마음속에서 나날이 깊어져 가는 그 소년은 점점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정동은 앞으로 다신 그 소년을 떠올려선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