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떠보기
화 귀비가 따라 나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상, 진정하세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태자는 정가 셋째 소저와 자야 하는 것 아니었나. 왜 태감으로 바뀐 거지? 그래, 분명 정가 셋째 소저가 꾀를 부린 걸 게다!’
화 귀비는 어디론가 사라진 정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창경제 앞에선 감히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이 국사의 제자와 태자를 동침시킬 계략을 꾸몄다고 할 순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황상께서 나를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
“귀비, 귀녀들과 연꽃을 본다 하지 않았소. 태자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창경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일국의 황제인 창경제가 그리 멍청할 리 없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게 무슨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태자가 그 아가씨를 해하려다가 오히려 당한 게구나!’
창경제는 태자가 몹시 한심했다.
‘이게 내 아들일 리 없다. 누군가와 동침하려다 되레 당하다니! 이, 이 얼마나 무능한 황태자인가!’
창경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화 귀비를 쳐다봤다.
“국사의 제자가 상하연에 참석했다고 들었소. 이 일이 국사의 귀에 들어가면 짐의 체면이 어찌 될 거라 생각하오?”
이때, 문이 열리더니 태자가 옷을 입고 나와 창경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부황.”
창경제는 태자를 보자 가슴 속에 있던 불씨가 타오르는 느낌이 들어 얼른 시선을 피했다. 이러다 태자를 발로 차 죽이는 등 후회할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황족인 용가(容家)는 팔자가 사나웠다. 다른 집안에서 황제를 맡으면 늘 아들들이 지나치게 우수해 형제끼리 황위를 다투는 걸 걱정하기 마련인데, 용가는 황태자를 고를 때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그나마 나은 자를 골라야만 했고 늘 어쩔 수 없는 위험 부담을 안아야 했다.
창경제의 장자는 장애가 있었고, 오황자와 육황자는 아직 어린 데다 고집이 셌다. 지금의 태자에게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누가 봐도 황태자에 가장 적합한 황자였다.
그리고 창경제에겐 자신 외에 바람에도 쓰러지는 허약한 형제, 남안왕밖에 없었다.
또 선조인 가덕제(嘉德帝)까지 올라간다면 당시 그에겐 태자 한 명밖에 없었기에, 만약 초대 회인백이 태자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 황위를 다른 누가 가지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창경제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육황자에게 강독하는 한림원의 수찬, 정철을 절로 떠올렸다.
‘외모와 성품 모두 출중하고 언행에도 절도가 있지. 내가 호통을 친 이후로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게다가 학식과 무예는 말할 것도 없다. 흥, 역시 다른 집 자식이 가장 밉구나!’
속으로 복잡하게 생각하던 창경제는 저도 모르게 무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창경제가 몹시 두려워졌다.
태자가 복도에 무릎을 꿇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
“부황―”
‘사실 오늘 일은 그리 큰 잘못은 아니다. 단지 너무, 너무 창피할 뿐! 정가의 셋째는 오늘 본궁과 절대 마주치지 않기를!’
태자가 눈을 내리깔고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
창경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자, 소행이 단정치 못하고 방자하구나. 짐은 몹시 실망했다. 내일부터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동궁에서 교양을 쌓도록 해라!”
“부황!”
태자는 깜짝 놀랐다.
‘나를 조정에 참여하게 한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이렇게 다시 내쫓으신다고? 난 스무 살도 아니고 이제 스물한 살이다! 이렇게 되면 그 노신들이 나를 얼마나 깔보겠는가?’
“태자, 짐의 결정에 이의라도 있는 게냐?”
창경제가 정색하며 묻자, 태자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 감히요.”
“알면 됐다. 짐은 네게도 ‘감히’ 저지르지 못하는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만!”
‘다른 집 아가씨와 동침하지 못하니 내시를 침상에 끌어들여? 일말의 자존심도 없는 것!’
창경제는 태자가 꼴도 보기 싫어 화 귀비에게 말했다.
“귀비, 이 일은 그대가 주관한 상하연에서 일어난 일이오. 아랫사람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으니 앞으로 이런 연회는 적게 열도록 하는 게 좋겠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화 귀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황상의 말씀이 맞습니다.”
창경제가 한숨을 내쉬며 이어서 말했다.
“선 태자비가 떠난 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소. 지금 시기에 태자비를 선출하는 건 원래도 타당하지 않은 일이오. 이 일은 천천히 신중하게 논의하도록 하지.”
잠시 태자비 자리를 비워두잔 뜻이었다.
화 귀비는 몹시 불쾌했다.
아들이 정미의 속셈에 당한 걸 알게 될수록 그 계집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럼 반드시 태자비 자리에 앉혀주지. 내 며느리가 된 후에도 내가 이리 쩔쩔맬 줄 아느냐?’
“황상, 태자비를 선출하자는 건 신첩의 의견이었습니다. 태자가 지난 정을 잊은 게 아니라요. 신첩은 유야가 아직 어리니, 만약 적모가 있으면 그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아 태자비를 선출하고자 한 것입니다.”
창경제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땐 후궁의 여인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땐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지?’
창경제는 화 귀비를 빤히 쳐다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귀비, 유야를 돌보는 데 꼭 적모가 필요한 것이오? 태자의 동궁에 첩이 그렇게 많은데 그중 하나를 고르면 되지 않소.”
화 귀비가 대꾸하려 하자, 창경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설마 잊은 것이오? 황후가 오랫동안 속무를 보지 않았음에도 황자와 공주들은 적모 없이도 잘 자라주지 않았소?”
화 귀비는 깜짝 놀라 더는 대꾸하지 않고 공손하게 말했다.
“신첩, 알아들었습니다.”
창경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소.”
화 귀비는 태자와 함께 창경제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그러다 창경제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화 귀비는 화들짝 놀라 얼굴이 떨릴 지경이었다.
창경제가 유유히 물었다.
“그래, 국사의 제자인 현미 도장은 어디 있는가? 짐이 만났으면 하는데.”
화 귀비는 말문이 막혔다.
정가의 셋째는 원래 이 방 안의 침상 위에 있어야 했지만 지금 그 침상 위에 있던 사람은 내시였다. 이 중 누가 정가 셋째의 행방을 알고 있겠는가.
“귀녀들과 연꽃을 감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귀비, 짐과 함께 가보지.”
태청지로 돌아온 뒤, 정미의 행방을 묻자 어떤 여관이 걸어 나와 말했다.
“폐하와 귀비마마께 아룁니다. 방금 태후마마 곁의 여관이 찾아와 현미 도장을 모시고 가셨습니다.”
“모후가 말이냐?”
창경제는 어리둥절했다.
그를 정성껏 키워준 양모이기에 존경해야 마땅했지만, 황후 사건 이후 태후는 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창경제의 문안 인사마저 거절했다. 아직도 그에게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외부인을 만나지 않더니 현미 도장은 왜 부르신 거지? 설마 나처럼 국사 제자의 남다른 능력을 알아채신 건가?’
창경제가 지금 시간에 태청지에 온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전에 화 귀비의 조카인 화량이 사냥을 나섰을 때 하마터면 곰에게 물릴 뻔했다는 육황자의 우스갯소리를 듣자 피를 멎게 하고 살을 돋아나게 하는 정미에게 흥미가 생긴 것이다.
공교롭게도 화 귀비가 태청지에서 상하연을 열어 정미를 초대했고, 창경제는 그녀를 만나려 이곳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황상과 귀비가 놀란 표정을 짓자 여관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태후께서 며칠 전 현청관에 향을 피우러 가셨는데, 그때 현미 도장께서 접대해주셨다 합니다. 태후께서 현미 도장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고 오늘 도장께서 궁에 들어오셨다 하여 부르셨습니다.”
태후가 현청관에 간 일은 황상도 당연히 알고 있어 그제야 의심이 풀렸다.
상하연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 * *
폭풍 같은 일에서 벗어난 정미는 자녕궁(慈寧宮)의 궁녀들이 가져온 작은 걸상 위에 앉아 태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애가가 현청관에 갔던 그 날은 몹시 감사했습니다, 현미 도장.”
태후가 떠보는 듯 말했다.
그날 정미의 행동이 정말 우연이었다면 그저 접대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우연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무슨 뜻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정미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일을 우연으로 넘길까, 아니면 인정하고 태후에게 내 능력을 알릴까?’
전자는 태후의 호감을 이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고, 후자는 태후와 멀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 ‘유모’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미는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이해득실을 따져 보다가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치 않습니다, 태후마마. 그날의 일은 그저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을 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답니다.”
태후의 눈빛이 굳었다.
‘역시 그날 일은 이 도장이 의도한 것이었구나!’
정미는 곁눈질로 몰래 태후의 표정을 살폈다. 태후의 눈동자가 점점 깊어졌고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미는 후회하지 않았다.
소문과 달리 태후의 눈엔 살기가 스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이든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국사의 제자라는 신분이 생긴 뒤, 정미는 자신의 능력을 감추느니 그 능력으로 입장을 확고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미는 황가와 엮이고 싶지도, 할 수 있다면 한 발짝도 이 황궁에 내디디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큰언니 정아가 죽은 원인을 규명해야 했기에 앞으로 이곳에 오지 않을 순 없었다.
귀비와 태자에겐 이미 미움을 샀으니 태후가 정미를 쓸모 있다고 여기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감싸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미는 아주 침착했다.
‘태후는 황후의 병을 치료하고 싶어 하지만 사부님께선 방법이 없다고 했으니 내게 기대를 걸지도 모르지. 그날 내가 한 행동은 아무 도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니까.’
태후는 확실히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황후에 관한 일이니 당연히 안달복달하며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쨌든 현미 도장께 감사할 일이지요. 애가는 오랫동안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깨끗하고 조용한 것만 좋아하는데, 그날 현미 도장의 접대에 골칫거리가 꽤 사라진 기분이었습니다.”
완곡하게 둘러 말했지만 정미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태후마마. 현미에겐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일은 더 이상 꺼낼 필요도 없고요.”
태후는 정미의 눈치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궁녀들에게 팥떡을 내오라 해 정미에게 내주었고 교 유모에게 젊은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가져오라 해 정미에게 하사했다.
황궁의 팥떡은 현청관의 팥떡보다 깔끔하진 않았지만 나름의 맛이 있었다. 게다가 하사받은 물건들은 정교하고 세련되어 시장에서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정미는 싫은 마음을 꾹 참고 상하연에 참석했다가 화 귀비와 태자에게 골탕을 먹이고 태후와는 모종의 묵약이 생기자 기분이 좋아져 웃으며 태후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