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77화 (277/375)

277화. 환복

방 안은 바깥보다 어두웠기에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에야 방 안의 상황이 또렷이 보였다.

청색 도포를 입은 소녀가 조용히 바닥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머리는 수초처럼 풀어 헤쳐져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태감은 입을 달싹이며 천천히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아가씨―”

소녀는 생명을 잃은 나무인형 같아 태감은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한참 뒤, 그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소녀의 코끝에 댔다.

“아가씨―”

그리고 바로 이때, 정미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손바닥에 모아두었던 안신부를 곧바로 태감의 얼굴을 향해 쳤다. 태감의 눈빛이 잠깐 흐려지자 다른 손을 높이 들어 그의 목 뒤를 힘껏 내리쳤다.

정미의 예상대로 태감은 눈을 뒤집으며 힘없이 쓰러졌다.

정미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오른손으로 다시 안신부를 그려 태감에게 사용했다. 그리고 그제야 차가운 청옥 바닥에서 일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신부는 말 그대로 심신을 안정시키는 부적이었다.

‘얼마 전 그 유모에게 쓴 뒤, 다시 쓸 일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는데.’

안신부를 이렇게 쓸 수도 있다는 건 방금 차가운 바닥 위에서 떠오른 방법이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부적이니 보통 사람에게 쓴다면 순간 반응이 느려질 터, 그럼 그 시간을 틈타 들어온 사람을 처리하면 된다. 이후 안신부를 다시 한번 쓴 건 짧은 시간 안에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처음엔 정미도 태감을 유인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진 않았다. 미리 준비한 안신부는 원래 태자에게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태감을 꾀어냈으니, 상황이 더욱 좋군.’

소녀는 맑고 차분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기절한 태감을 끌어내다가 주위를 살펴보더니 결국 침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정미도 힘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결국 여인이었기에 기절한 태감을 옮기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침대로 그를 밀어 넣고 나자 조금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쉴 수 없었다. 정미는 다시 허리를 숙여 태감이 바닥에 떨어트린 자물쇠를 주워 올렸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구로 가 자물쇠를 문밖에 떨어트린 뒤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계획과 달리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의심스러워하겠지만, 정미는 개의치 않았다.

‘의심이 생기면 호기심도 생길 테니.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면 분명 문을 밀어보겠지. 태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와 사라진 태감을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할 텐데, 내게 다가와 확인해 보려 하지 않겠어?’

정미의 생각은 단순했지만, 이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뜻밖의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본능과 일치하기도 했다.

잠시 후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고 문밖에서 잠시 멈추더니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미는 눈을 감고 다른 감각에 집중했다.

자신의 곁에 누군가 쭈그려 앉는 게 느껴졌다. 옅은 용연향에 본능적으로 반감이 일었다.

“정미―”

태자가 정미의 코끝에 손을 댔다. 호흡이 느껴지지 않자 표정이 굳더니 문을 밀고 들어올 때의 예감이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정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그렸던 안신부를 태자의 얼굴에 사용했다.

태자의 표정이 흐려졌고 누군가 목 뒤를 내려치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정미는 그제야 진정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있는 힘껏 태자를 끌어내 침상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침상 아래의 태감을 다시 꺼내 마찬가지로 침상 위로 올렸다.

정미는 침상 머리맡에 서서 태자와 태감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 다정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화본에서 본 바로는 사내끼리도 사랑을 나눌 수 있댔어. 그럼 사내와 내시도 가능한 거겠지?’

정미는 뒤돌아나가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무표정으로 손을 뻗어 두 사람의 옷을 벗겨낸 뒤 청옥 바닥에 던져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안고 잠든 모습을 지켜본 뒤, 소녀는 침착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이따 귀비마마가 사람들을 데리고 상황을 살피러 왔을 때 기절하진 않아야 할 텐데. 저 태감이 어떻게 될지는 내가 신경 쓸 바 아니고. 어쨌든 나를 이런 계략에 끌어들였으니 응당한 책임을 져야지.’

* * *

태청지 옆, 해가 점점 높이 떠오르자 화 귀비는 귀녀들을 한쪽의 정자에서 쉬게 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현미 도장은 어찌 아직도 안 오시는 것이냐?”

화 귀비를 따라 연회에 나온 비빈들 두세 명이 대답했다.

“아마 다른 곳의 경치가 좋아서 구경하느라 늦으시는 것 아닐까요?”

화 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연꽃도 사람도 충분히 봤으니 본궁과 함께 가보자꾸나. 현미 도장은 평범한 신분이 아니니 혹시나 무슨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자리에 있던 비빈들 중엔 화 귀비의 의도를 어렴풋이 눈치챈 자도, 화 귀비의 말에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자도 있었다. 모두 당연히 화 귀비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걷던 도중, 한 비빈이 말했다.

“이상합니다. 아직도 현미 도장을 마주치지 않는다니요. 설마 아직도 환복을 하고 계신 걸까요?”

다른 비빈이 웃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갈아입을 리 없지 않습니까.”

“잊으셨습니까. 현미 도장은 오늘 도포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황궁에 준비된 옷 중 도포가 있을 리 없고요. 만약 평범한 아가씨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면, 머리도 다시 빗어야 할 테고 연지 수분도 발라야 할 테니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귀녀들의 치장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 비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때 화 귀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앞이 바로 귀녀들이 환복할 수 있도록 준비한 곳이다. 가서 보자꾸나.”

사람들은 곧 귀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자, 화 귀비가 대태감 등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등안이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현미 도장―”

안에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안이 고개를 돌려 화 귀비의 눈치를 봤다.

어떤 비빈이 입을 열었다.

“설마 현미 도장께서 이미 환복을 마치고 나가신 걸까요?”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진작 태청지로 돌아오셨어야지요. 오는 길에 마주치지도 않았는걸요?”

화 귀비는 의도한 바가 있었기에 등안에게 말했다.

“열어 보거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여인과 태감뿐이니 봐선 안 될 것을 보였다고 해도 상관없지. 정미가 태자비가 되면, 이 사람들이 함부로 혀를 놀릴 수 있겠는가?’

“예.”

등안도 화 귀비의 계략을 알고 있었기에, 안에 있을 소녀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문을 열었다.

작고 여린 보통 내시와는 달리 등안은 키도 덩치도 컸기에 문을 열고 나자 방 안의 풍경이 완전히 가려졌다.

등안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화 귀비가 짜증 내며 말했다.

“등안, 문에 서서 뭐 하는 게냐. 어서 비키지 않고.”

등안은 한참 침상을 빤히 쳐다보다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의 상황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벽에 붙어있는 침상엔 휘장도 내려와 있지 않았기에 서로를 꼭 껴안고 잠에 든 두 사람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린 또렷한 이목구비의 사내는 분명 일국의 황태자였다.

그리고 귀인들을 향해 뽀얀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는 자는―

누군진 모르겠지만, 분명, 분명히 사내였다!

‘사내라고!?’

비빈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여기 사내가 있어. 그것도 태자의 침상 위에!’

잠시 멍해진 뒤, 몇몇 비빈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소리에 태자가 눈을 비비며 멍한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새카만 안색의 화 귀비를 보자, 태자는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뭔가 허전하고 쌀쌀한 느낌이 들어 그제야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태감이 그의 허리를 안고 푹 잠들어 있었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기 때문일까, 그 순간 태자는 생각했다.

‘언제부터 젊은 태감까지도 내 침상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지? ……잠깐!’

태자는 그제야 자신도 옷을 걸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모비와 서모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극도의 충격을 받은 태자는 달콤하게 잠들어 있는 태감을 걷어찼다.

태감이 청석 바닥 위에 쿵 하고 떨어지자, 사람들은 그쪽을 쳐다봤다.

‘다행이야. 진짜 사내는 아니었구나!’

비빈들 중 몇 명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옷을 입지 않은 내시는 참으로 역겹구나! 잠깐, 이 상황을 황상께서 아시면 어찌 생각하실까?’

화 귀비는 이미 정신이 어질어질한 상태였지만 황궁에서 지내며 수많은 풍파를 겪어왔기에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거운 눈빛으로 비빈들을 훑어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오늘 너희는 아무것도 못 본 게다. 알겠느냐?”

화 귀비가 평소처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자, 비빈들은 애써 차분함을 되찾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마마. 저흰 오늘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중 눈치 빠른 자가 덧붙였다.

“그래, 그래요. 저희는 여기 온 적도 없는 겁니다. 계속 마마와 연꽃을 보고 있었지요.”

화 귀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오늘 상황은 원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생각이 없었다. 황가의 명예에 금이 갈 수 있으니. 그래서 늘 말을 잘 듣던 하급 비빈들을 몇 골라왔지. 앞으로 입을 막을 수 있게.’

화 귀비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며 넋을 놓고 있다가 등안에게 말했다.

“등안, 어서 태자에게 옷을 내어주지 않고 뭐 하느냐―”

등안이 화 귀비의 말에도 꼼짝하지 않자, 화 귀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외쳤다.

“등안, 본궁이 부르지 않느냐. 귀가 들리지 않는 게냐?”

대태감 등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청옥 바닥은 물처럼 차가웠고, 늘 부유한 생활을 누리던 등안은 무릎이 아플 만도 한데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화 귀비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자,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황상께 인사 올립니다.”

비빈들이 휙 뒤돌아서서 분분히 절을 올렸다.

“황상을 뵙습니다!”

화 귀비는 급소라도 찔린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을 때에야 뻣뻣하게 뒤돌았다. 그리고 창경제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황상,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창경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움찔거리며 생각했다.

‘그러게 말이다. 짐이 어찌 이곳에 와서 홀딱 벗은 채 뒤엉켜있는 아들과 내시의 모습을 봐야 한단 말이냐?’

창경제의 시선이 천천히 태자에게로 옮겨가다가 바닥에 웅크려 어쩔 줄 모르고 있는 태감에게로 꽂혔다.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은 황제는 생각했다.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진짜 사내가 아닌 내시이니 최소한 태자가 당하는 쪽은 아니구나!’

“황상―”

화 귀비는 왜 지금 상황에 가장 나타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등장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화 귀비는 처음 궁에 들어와 기댈 곳 없었던 그때로 돌아간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창경제의 입술이 떨리더니 마침내 크게 고함쳤다.

“어서 옷을 입지 않고 뭣 하느냐!”

그러고는 뒤돌아서 다시 소리쳤다.

“너희도 썩 꺼지지 않고!”

비빈들이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

창경제는 도저히 다시 그 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소매를 뿌리치고 복도로 나가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