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연꽃
한편 회인백부, 맹 노부인은 나쁜 쪽으로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가 했더니 찻잔을 아무렇게나 동 이낭을 향해 던져버렸다.
동 이낭은 감히 피할 수 없었다. 찻잔이 그녀의 이마에 부딪히며 이마에선 곧바로 피가 흘렀다.
“노부인, 진정하세요. 다 이 며느리의 잘못입니다. 곧바로 동이를 찾아오라 명하겠습니다.”
동 이낭은 차마 손수건으로 상처를 누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곧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맹 노부인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동이가 연지를 사러 나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야?”
동 이낭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마의 상처에 통증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맹 노부인이 더욱 화를 냈다.
“내가 말했지 않느냐. 태자비를 선출할 때이니, 지금 상황에 조금의 착오도 있어선 안 된다고. 그런데도 동이를 혼자 나가게 두다니! 그래서, 지금 동이는 어디 있단 말이냐?”
맹 노부인이 차갑게 웃더니 독사 같은 눈빛으로 동 이낭을 노려봤다.
“경고하건대 만약 동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다간 어찌 될지 잘 생각해 보거라.”
동 이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기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연분과 뒤섞이자 마치 귀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동이를 찾아오겠습니다.”
염송당에서 나온 동 이낭은 맥이 빠진 채 벽에 기대 중얼거렸다.
“동아,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이 어미와 네 동생들의 목숨이 다 네게 달려 있거늘.”
* * *
회인백부에서 이리저리 찾아 헤매던 정동은 사가 밖에 한참 숨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동이 찾던 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만 보면 정철과 몹시 닮은 모습이었지만, 정동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동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가 곧바로 발을 거두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벽을 꼭 잡고 잠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침착한 발걸음으로 밖에서 입구까지 걸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정동은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이제 저자와 조금의 친척 관계도 아니게 되었는데, 어떤 명분으로 눈앞에 나타날 수 있겠어. 게다가 내가 이렇게 나타나면 눈 밖에 나기만 할걸.’
정동은 한참 넋을 놓고 입구를 바라만 보다가 뒤돌아서 떠났다.
소녀는 쓸쓸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다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이렇게 넓은 세상에 새장 밖을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정동은 현청관에 있는 정미가 부러워졌다. 너무 부러워서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그리고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급히 몸을 숨겼다.
하인 몇 명이 지나갔지만, 회인백부 하인의 옷을 입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그중 익숙한 얼굴이 한둘 정도 있었다.
한 하인이 작게 말했다.
“넷째 아가씨께서 그저 놀다가 시간이 늦어진 것 같은데 이렇게 호들갑 떨 필요 있나?”
다른 한 명이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둘째 마님께서 다급할 수밖에. 넷째 아가씨를 찾지 못하면 마님도 아마……. 킥킥.”
정동은 길모퉁이에 한참을 서 있다가 마침내 조용히 회인백부로 향했다.
* * *
5월 중순이 지나고 황궁의 태청지(太淸池)에 연꽃이 피자, 정미도 다른 집안의 아가씨들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구경하러 오라는 첩자를 받았다.
정미는 은은한 연꽃 향을 풍기는 연잎 무늬의 첩자를 보자 파리라도 삼킨 것처럼 역겨워했다. 그럼에도 날짜를 확인하고 시간에 맞춰 가기로 결정했다.
정미는 그저 국사의 제자일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반쯤은 속세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여도, 정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여전히 속세에 있었다. 그리고 청령진인이 정미의 혼사를 거절해주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존귀한 황족들의 심기를 거스를 배짱은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연회 날이 다가왔다.
정미는 현청관에서 곧장 출발했고 복장도 당연히 청색 도포를 입었다.
열다섯 살의 소녀가 도사 머리를 한 채 도포를 입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정미는 귀녀들이 서로 소곤거리는 걸 차갑게 한 번 훑어보더니 구석에 서 있는 정동을 보고 잠깐 생각하더니 발걸음을 떼고 다가갔다.
정동은 태청지 옆에 서서 연잎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정미가 나타난 뒤 소란스러워진 주변도 의식하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정동이 휙 뒤돌아섰다. 그녀는 정미임을 알아보고는 눈이 잠시 반짝이더니 다시 어두워지고 무덤덤하게 ‘셋째 언니’라 불렀다.
정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정동,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정동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최근 정동은 늘 현청관이 있는 방향을 멀리 내다보며 생각했다.
‘만약 정미를 찾아가 부탁한다면 나를 도와줄까? 하지만 정미가 도와준다고 해도 뭘 도울 수 있다는 말이야? 회인백부는 내 집이고, 내 어머니는 산골 출신이지. 정미처럼 운이 좋지도 한 씨처럼 뭔가 깨닫고 이 새장을 순식간에 벗어날 수도 없어. 회인백부의 넷째 아가씨라는 각인은 내 뼛속 깊숙이 새겨져 있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피해를 입는 건 원치 않아. 그러니 그저 얌전하게 견딜 수밖에.
그리고 태청지에서 정미를 재회하자, 정동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정미가 정말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여긴 굳이 왜 왔겠어?’
정미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복잡했다.
‘정동은 울보에 소심하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려고 일부러 나를 음해하곤 했지. 하지만 이건 알아. 정동도 나와 마찬가지로 태자와 혼인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런데도 여기 나타났구나.’
정미는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작게 물었다.
“정동, 원치 않으면 꾀병을 부리지 그래?”
‘정동은 바람에도 날아갈 것처럼 작고 연약하니까 갑자기 아프다고 둘러대는 것도 그리 이상할 것 없지.’
청령진인이 정미에게 화 귀비와 태자가 현청관으로 찾아온 의도를 알려준 후, 정미는 황궁에서 정동을 고려치도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하연(賞荷宴)에 정동이 오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정동이 멈칫하자, 정미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고 말했다.
“알잖아. 나는 부의야. 네가 원한다면 널 도울 방법이 있어.”
한참 뒤, 정동이 고개를 숙이고 개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프면 안 돼. 내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잖아.”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가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러자 정미는 그저 탄식하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지며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화 귀비가 등장했다.
오늘 화 귀비는 수홍색 궁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려 아주 아름다웠다. 그녀는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귀녀들 사이에서 정미의 모습을 발견했다.
도사 차림을 한 정미를 보자, 화 귀비는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가 재빨리 다시 인상을 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올리게 한 뒤에는 정미에게 웃으며 말했다.
“현미, 본궁의 옆에 앉으시지요.”
귀녀들이 각기 다른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미는 국사의 제자라는 당당한 체면을 세우며 턱을 살짝 들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화 귀비 앞으로 한걸음 씩 걸어갔다. 그리고 공수하며 인사를 올리고는 화 귀비의 옆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화 귀비는 다른 귀녀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오직 청색 도포를 입은 이 소녀에게만 시선을 주었고 웃으며 물었다.
“국사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저번엔 현미 도장께서 길을 안내해주신 덕분에 순조롭게 국사 대인을 뵐 수 있었습니다.”
화 귀비가 아무리 황궁에서 위세를 떨친다고 해도 결국 진정한 황후는 아니었다. 태후조차도 국사를 만나려면 그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그러니 국사의 눈엔 일개 총비(寵妃)일 뿐인 화 귀비에게 그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화 귀비는 태자와 정미를 혼인시키고 싶어 했다.
‘만약 국사의 제자와 혼인하게 되고, 나중에 태자가 황위에 오르게 되면 조정에 큰 도움이 되겠지.’
화 귀비는 정미를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이 계집, 신분도 딱 좋아. 국사의 제자이면서 몸엔 정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태자비에 딱 걸맞지. 덕분에 조금 거슬렸던 외모도 그리 신경 쓰이지 않고. 아닌가 수수한 도포 때문인가?’
화 귀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여튼 그리 안 좋게 볼 필요도 없지. 이 계집은 그 일찍 죽은 것과 완전히 다른 사람일 테니.’
화 귀비의 기분이 좋아지자 연회의 분위기도 꽤 풀렸다.
소녀들 중엔 태자비를 노리고 온 사람도 있었고 그저 억지로 온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화 귀비의 관심이 도포를 입은 정미에게 쏠리자 모두의 마음이 꽤 편해졌다.
너무 뛰어난 사람에겐 질투심마저도 들지 않기 마련이었다.
태청지의 연꽃이 한창 예쁘게 필 때였다. 분홍색과 옅은 흰색이 뒤섞인 연꽃과 하늘처럼 푸른 연잎이 어우러지자 모두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가망이 없다고 느낀 소녀들은 연꽃을 감상하며 술을 마셨고 점점 분위기는 떠들썩해졌다.
화 귀비는 계속 정미와 담소를 나누었다. 별거 아닌 내용이었지만, 정미는 그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화 귀비의 말에 대답하고 있을 때, 정미는 갑자기 몸이 차가워지는 걸 느껴 고개를 숙여보았다. 찻물이 옷섶을 적시고 있었다. 옆에 있던 궁녀가 급히 무릎을 꿇더니 벌벌 떨며 빌었다.
“마마, 살려주십시오. 고의가 아닙―”
화 귀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외쳤다.
“끌고 가거라!”
정미는 푹 젖은 앞섶을 쳐다보다가 이 일이 화 귀비의 꾀라는 걸 깨달았다.
화 귀비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어린 궁녀라 부주의했나 봅니다. 정말 미안하군요. 여봐라, 현미 도장을 모시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거라.”
젊은 태감이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손을 뻗었다.
“현미 도장, 소인을 따라오시지요.”
정미는 눈앞의 수려한 외모의 사내를 차갑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화 귀비의 속셈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의 앞에서 앞섶이 젖은 채로 있을 순 없었다.
정미가 떠나가자, 화 귀비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 * *
정미는 의아했다. 태감도 궁녀처럼 비빈들의 곁에서 시중을 들 수 있지만, 외부인인 정미가 환복 하러 가는 길은 궁녀가 안내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태감이 갑자기 뒤에서 정미를 힘껏 밀쳐 어떤 방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리 미목수려(*眉目秀麗: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움)한 젊은 태감이라도 궁녀보단 손힘이 좋을 테니!’
정미는 차가운 웃음이 나올 뻔했다.
‘화 귀비는 참으로 주도면밀한 자구나!’
만약 미리 조심하지 않았다면 지금 상황에 얼마나 놀랐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정미는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빨리 문을 닫은 태감은 안에서 바닥에 뭔가 떨어지는 큰 소리가 들린 뒤,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키가 큰 아가씨길래 혹시나 소란을 피울까 봐 손에 힘을 좀 세게 주었는데. 설마 바닥에 부딪혀서 큰일이 난 건 아니겠지?’
자물쇠를 채우던 태감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가씨―”
태감이 다시 불러보았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처마 아래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만 작게 들려왔다.
태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럼 내 목숨도 끝장인데!’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닌 이상, 나쁜 짓을 할 때 약간의 꺼림칙함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대부분 직접 확인하는 길을 택하곤 했다.
태감은 자물쇠를 다시 풀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