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우연
그 순간, 정미가 소매 속에 숨겨둔 오른손을 빠르게 움직여 공중에 안신부(安神符)를 그렸고, 그 비명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그 손으로 유모의 어깨를 툭 쳤다.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쳐다봤을 땐, 정미의 손이 유모의 어깨에 멈춰있었고 비명이 먼저였던 건지 정미의 손이 먼저였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미는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나아가 아무렇지 않게 그 유모를 가리더니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방금 유모의 어깨에 벌레가 있기에 급한 나머지 어깨를 쳐버렸습니다. 태후마마, 귀비마마와 태자 전하께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겉으론 태연하게 말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다.
방금의 안신부는 허공에 아무렇게나 그린 것이었기에 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때문에 이 ‘유모’가 언제든 다시 발작할 수 있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 했던가, 정미는 정아가 입궁할 때부터 차갑게 대하며 야박하게 군 태자를 몹시 미워했다. 게다가 정아의 죽음이 태자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자 저도 모르게 태후 쪽을 지키고 싶어졌다.
그리고 관저전에 지내는 미친 황후를 향한 동정심도 있었다.
다행히 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미 도장께서 선의를 베풀어주셨는데 애가가 놀란 것이지요. 됐다. 너희는 내 곁에서 오랫동안 지낸 시종들 아니냐. 걸핏하면 깜짝 놀라선 안 되지. 오늘 이른 아침부터 나왔더니 머리가 좀 아프구나. 어서 돌아가자.”
화 귀비가 말했다.
“살펴가세요, 태후.”
하지만 화 귀비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계속 그 ‘유모’를 쫓았다. 태후를 곁에서 모시는 시종이 작은 것에 놀라 소란을 피우는 건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미가 다가와 화 귀비에게 공수하며 인사를 올렸다.
“귀비마마, 스승님께선 타인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래도 제가 마마와 태자 전하를 모시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화 귀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미는 소진 도장을 담담하게 쳐다보며 위엄 있게 말했다.
“소진 사질, 번거롭겠지만 사질이 태후마마를 안내해주게.”
소진 도사는 늘 화 귀비와 태자 앞에서 체면이 있는 자였기에 이제 막 급계한 계집에게 ‘사질’이라 불리자 따귀라도 세게 맞은 듯 그 소리만 귓가에 계속 맴도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정미의 지위에 맞설 순 없기에 소진은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꾹 참고 얌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사숙.”
소진 도사는 화 귀비와 태자에게 인사를 올리고 태후에게로 다가갔다.
화 귀비와 태자는 동시에 정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순간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
정미가 국사의 제자가 되어 지위가 높아지긴 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없어 보였고, 배사례 때의 성대하고 장중한 모습을 보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정미의 지위가 어색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늘 예우를 갖춰 대했던 소진 도사가 정미에게 이리 공손히 대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자, 화 귀비와 태자는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오늘 오길 잘했군.’
소진 도사의 기분은 더욱 좋지 않았다.
도를 닦는 사람이 세속에서 활동하려면 명성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망할 계집. 분명 이 점을 이용해 귀비와 태자 앞에서 나를 누른 거지? 평소 귀인들의 존경을 받던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면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닌 사람이라 여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미는 소진 도사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귀비마마, 들어오시지요.”
화 귀비와 태자가 청령진인을 만난 뒤, 정미도 청령진인에게 불려갔다.
“사부님.”
정미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실 속으로는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청령진인의 여유롭고 차분한 모습을 보자 차마 먼저 뭐라 물을 수 없었다.
그때, 청령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현미, 귀비와 태자가 왜 여기 찾아왔는지 알고 있느냐?”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청령진인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차가운 얼굴에 잠깐의 따뜻함이 스치자 차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사부님이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안 웃는지 알겠어. 은발의 사내가 이렇게 눈부시게 웃으니 요괴처럼 보이잖아.’
“내게 태자와 제자의 혼인을 허락받으러 왔다.”
“아, 그렇군요.”
덤덤하게 답했지만 정미의 안색은 확 굳어졌다.
“사부님, 그 ‘제자’가 설마 저는 아니지요?”
청령진인이 껄껄 웃었다.
“네가 아니면 네 사형이란 말이냐?”
정미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물었다.
“사부님, 설마 허락하신 건 아니겠지요?”
청령진인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허락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거절하지 않았다니요?”
청령진인이 반문했다.
“현미, 너는 어쩔 셈이냐?”
“전 절대 태자와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정미가 곧바로 소리쳤다.
‘어떤 일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어도, 어떤 일들은 내 태도를 명확히 밝혀야 해!’
“태자와 혼인하지 않겠다?”
청령진인이 말끝을 늘이며 복잡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예! 싫습니다!”
정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다가 아예 손을 뻗어 청령진인의 팔을 껴안고 애교를 부렸다.
“사부님, 어서 거절해주세요. 화 귀비와 태자가 이 마음을 접을 수 있게요!”
궁에서 태자비를 선출한다는 소식이 퍼져 나왔을 때 정미가 그리 염려하지 않았던 것도 청령진인의 태도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사의 신분으로 황실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령진인은 제자에게 강요할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미에게 들이닥친 현실은 달랐다.
‘사부가 명확히 대답하진 않았지만, 태도를 보니 나를 태자와 혼인시키고 싶어 하는 눈치야.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구나.’
곧 이어진 청령진인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현미, 네 혼사에는 스승이 관여할 수 없다.”
정미는 잠시 멈칫했다가 한참 뒤에야 물었다.
“사부님, 그 말씀은―”
청령진인은 정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이만 나가보거라.”
정미는 몸을 굽혀 인사하고 나온 뒤 불안한 마음으로 은행나무길을 걸었다.
‘사부님의 말씀은 이 일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미인가? 허락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고― 그럼, 화 귀비도 강제로 나를 핍박할 수 없다는 거 아냐?’
이 생각이 떠오르자, 정미의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실은 늘 예상치 못한 짓을 하는 곳이니 계속 주의해야 해.’
* * *
한편 태후의 침전 안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
“황후를 잘 모셔다주었느냐?”
“예.”
태후가 팔걸이에 올린 손을 무의식적으로 두드렸다.
“화 귀비가 어찌 갑자기 현청관에 향을 피우러 갔지? 설마 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가?”
유모가 대답했다.
“태후마마, 마마께서 아주 조심스럽게 황후를 모시고 나갔으니 귀비마마께서 아실 리 없습니다. 그저 우연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태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황후가 발작을 일으키려 했을 때 현미 도장의 행동도 우연인 것 같더냐?”
나이 든 유모는 이 질문엔 대답할 수 없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교묘했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하기엔 겨우 열몇 살 된 어린 아가씨가 어찌 황후의 이상함을 알아채고 화 귀비와 태자의 주의력을 돌리려 발작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유모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현미 도장이 막아주신 덕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요.”
황후는 언제 어디서든 발작을 하는 환자였기에 아까는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렇지. 마차로 돌아오자마자 발작했으니.”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현청관에 있을 때보다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유모가 위로했다.
“소인의 생각엔 태후마마와 황후마마께서 복이 많은 덕분 아닐까 싶습니다. 황후마마께서 만약 귀비 앞에서 발작하셨다면, 현미 도장에게까지 숨기지 못했을 겁니다.”
태후가 유모를 빤히 쳐다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애가의 생각엔 황후의 발작이 늦어진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유모가 깜짝 놀랐다.
“태후마마의 말씀은 황후마마께서 당시 발작하지 않은 게 현미 도장과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까?”
궁에서 몇십 년을 지내며 이미 침착함을 유지하는 데 도가 튼 유모조차도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현미 도장께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셨는걸요.”
“아니. 했다.”
태후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황후가 비명을 지른 뒤 현미 도장이 황후의 어깨를 쳤지.’
“그렇다고 해도 화, 황후마마의 발작을 늦출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유모는 이 괴이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평범한 시각으로 바라봐선 안 돼. 언제 어디서 발작할지 모르고 한 번 발작이 터지면 점점 심해져 수습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그 누가 살짝 치는 것만으로 발작 증세를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유모가 연거푸 고개를 젓자, 태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현미 도장은 국사의 제자 아니더냐. 신선과도 같은 사람인데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러고는 낙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국사께서도 황후의 병을 치료할 수 없구나.”
태후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유모가 위로했다.
“태후마마, 괴로워 마세요. 사람에겐 각자의 운명이 있지 않습니까. 신선이라 하더라도 뭐든 이룰 수 있진 않을 겁니다.”
당시 태후를 따라 국사를 뵈러 들어간 유모는 자신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태후가 국사를 만났을 때의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
태후는 더는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들지 않아 그저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의 병은 원인을 찾아야 한다’라……. 국사의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황상과 황후는 이미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는데 설마 황상이 황후에게 직접 사과해야 한단 뜻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무리 내가 황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증인과 증거가 완벽한 상황에 황상이 황후를 믿을 리 있겠는가? 황후의 명분을 지키고 관저전에 유금된 것도 황상이 너그럽게 처벌한 것인데. 황후, 황상의 신임과 사과를 원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면 안 되는 것이야?’
“태후?”
태후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휘저었다.
“됐다. 생각해봤자 얻을 게 없으니. 교(喬) 유모, 애가가 예전에 쓰던 장신구 중 몇 가지를 현청관으로 보내거라. 애가가 오늘 현미 도장의 세심한 접대에 고마워서 드리는 상이라 하고.”
“예.”
교 유모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현미 도장이 정말 알아챈 것인지 소인이 한번 떠볼까요?”
태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겉으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이니 뭔갈 알아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게다. 정말 우연이었다고 해도 애가가 그 아이에게 정을 주고 싶구나.”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현미 도장이 위국공부 한명주의 딸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태후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예전에 황후와 한명주도 사이가 몹시 좋았지. 애가도 한명주의 시원스럽고 단순한 모습을 좋아했고. 늘 둘이 각자 아들과 딸을 낳으면 혼인을 맺자고 농담도 하곤 했는데 말이다. 그 한명주의 딸이 벌써 성인이 된 게로구나. 하지만 황후는…….”
침전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마치 조용해진 태후의 모습처럼 보였다. 여전히 온화하고 점잖았지만 전성기 시절의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