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신분
반반은 한지의 방문에 깜짝 놀라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소인이 작년 겨울부터 매화꽃에 쌓인 눈을 모았는데 벌써 넘칠 정도랍니다. 소인이 차를 끓여드릴게요. 드시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실 겁니다.”
한지는 반반을 쳐다보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어찌 알았느냐?”
반반이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알 수 있지요.”
아리땁고 발랄한 통방이 차를 끓이러 갔다. 남주인에 대한 끈적한 미련도 남녀 간의 은밀한 신호도 느껴지지 않자, 한지는 왠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혼인 후 여길 처음 방문했다는 것에 대한 어색한 기분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내가 찔릴 게 뭐 있어. 그저 너무 답답해서 머물 곳이 필요했을 뿐. 서재는 안 돼. 서재는 너무 조용하니까 병풍에 쓰인 그 시를 도저히 떨칠 수 없어. 시도, 글씨도 몹시 훌륭했지. 다만…… 다만 그 필체는 정미가 내게 준 신발창 속에 있던 종이에 쓰인 필체와 똑같았어! 그 병풍은 정요가 혼수로 가져온 거야. 가짜일 리 없어! 가짜가 아니라면 정미의 말이 사실이 되는 거고. 정요가 어떻게 그런 짓을? 혹시…… 고모님과 정미가 정요에게 모질게 대하고 철 형님은 또 정미만 아끼니, 정요가 잠시 삐뚤어진 건가?’
한지는 수십 번이나 이유를 찾아 헤맸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라면 과거 시험 하나만 보고 그 오랜 세월을 공부로 버텨오기 마련이잖아. 정요가 한 짓은 이미 소녀의 사소한 장난이 아니야. 이건 악질이라고.’
“세자, 차를 다 끓였습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풍겨오는 차향에는 여인의 체취도 옅게 느껴지는 듯했다.
한지가 찻잔을 건네받고 한 모금 살짝 머금더니 눈을 감았다.
‘그만하자. 정요는 회인백부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으니까 내가 용서해줘야지.’
이때,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 여기 계십니까? 소인은 세자 부인의 곁을 모시는 채연(彩娟)이라 하옵니다. 방금 부인이 기절하셔서―”
한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반반을 쳐다봤다.
반반이 방긋 웃으며 그를 살짝 밀었다.
“어서 세자 부인을 뵈러 가세요. 소인은 여기 있겠습니다. 저를 보시면 기분만 상하실 테니.”
그러고는 애교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제가 예의 없다고 여기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한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다. 넌 늘 예의 바르지 않았느냐.”
그러고는 그는 채연을 따라 나갔다.
반반은 식어가는 차를 보며 웃었다.
‘이 사람은 정이 많으면서도 야박하지. 하지만 난 세자의 첫 여인이니 전혀 급할 게 없어.’
* * *
다음 날.
정미는 태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고 성정도 이상한 태후는 분명 노쇠하고 엄숙한 모습일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40대처럼 보였고 화려하게 입은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옅은 웃음을 지을 때 눈가에 드러나는 잔주름에서만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태후의 뒤에는 네 명의 유모가 따르고 있었다. 둘은 오십 대, 다른 둘은 사십 대 남짓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계속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미는 가볍게 훑어보다가 그 어색한 표정의 유모를 다시 쳐다봤다.
왠지 멍한 표정이었지만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눈이었다.
정미는 계속 그 유모를 쳐다봤다.
태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아무렇지 않게 그 유모를 가렸다.
“진인께서 바로 국사께서 새로 받으신 제자입니까?”
정미가 시선을 거두고 웃었다.
“진인의 칭호까진 가당치 않지요. 제 도호인 ‘현미’라 부르시면 됩니다, 태후마마.”
“‘현미’라―”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군요. 그럼 현미 도장, 애가(*哀家: 태후가 자신을 일컫는 말)와 함께 향을 피우러 가시지요. 모처럼 출궁했으니 향을 피운 뒤 현청관을 구경하고 싶군요.”
향을 세줄 피우고 태후는 진심으로 절을 올렸다. 그 성심이 하늘에 닿을지는 정미도 알지 못했다.
향을 다 피운 후, 정미는 우선 태후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러나 태후 뒤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두 유모만 보였고 나머지 두 명은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그리 예민한 편이 아니었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한 가지 일에 꽂히면 더 집중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해. 그 유모, 왜 눈에 익을까? 분명 어디서 본 적 있을 거야!’
정미는 신경이 쓰여 한 씨가 알려준 주의사항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저 여유롭게 식사하는 태후와 함께 조용히 밥을 먹을 뿐이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태후 쪽에서 정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태후는 현청관을 공경했지만, 현청관의 도사 중 공경할만한 이는 오직 국사뿐이라 여겼다.
북명진인은 공로도 과실도 없어 태후는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북명진인의 여제자, 소진 도사는 예전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만날 때마다 반감이 일었다. 왠지 그 여도사에게서 청심과욕한 도사의 모습보다는 속세의 탁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국사가 새로 들인 여제자를 보니 나이는 어리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법. 정미에게 호감이 생긴 태후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픈 마음이 들어 접시의 팥떡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가는 늘 현청관의 소식(*素食: 채식 위주의 소박한 음식)을 좋아했지요. 오랜만에 왔더니 이런 간식이 새로 생겼군요.”
한 씨의 조언이 없었다면 정미는 태후가 별 뜻 없이 한 말이라 여겼겠지만, 태후가 팥떡을 좋아함을 알고 있는 정미는 지금 태후의 기분이 꽤 괜찮다는 걸 눈치채고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태후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주방에 만들어 달라 부탁했지요.”
태후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음? 현미, 어찌 애가가 팥떡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셨는지요?”
정미는 잠시 멈칫했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단 음식이니까요.”
태후도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지요. 단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러고는 담담한 눈빛으로 옆의 유모를 흘끗 쳐다봤다.
유모는 곧바로 팥떡을 하나 더 집어 태후의 접시에 놓았다.
태후가 웃으며 정미를 쳐다봤다.
“그럼 앞으로 애가가 또 현청관에 오게 되면, 애가가 이 달달한 팥떡을 좋아한다는 걸 꼭 기억해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꼭 기억해둘게요.”
다시 정적이 흐르고 접시와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만 작게 들려왔다.
식사 후, 태후는 차를 마신 뒤 정미에게 말했다.
“현미 도장, 국사께서 아직 폐관하지 않으셨지요?”
“예. 최근 계속 관에만 계십니다.”
태후가 안심한 듯 웃었다.
“다행입니다. 국사께서 40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셔서 애가도 뵌 지 아주 오래되었거든요. 오늘 찾아온 김에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현미 도장, 번거롭지만 길을 안내해주세요.”
정미는 태후가 이런 요구를 할 줄 몰랐지만 자기 일을 남에게 미루는 걸 늘 싫어했기에 안내를 맡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만날지 안 만날지는 사부가 정하는 일일 테니.’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서 오세요.”
태후는 정미가 시원하게 승낙하자 눈가의 웃음기를 더욱 짙게 했다.
길가의 은행나무 잎은 전보다 더욱 무성해져 햇빛을 꽤 많이 가려주었다. 반주향(*약 15분) 정도 지나자 정미가 어떤 마당 앞에 멈춰 섰다.
“스승님은 여기 계십니다.”
청령진인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져 있기에 거처엔 시중을 드는 도동조차 없었다. 그저 동자들이 때맞춰 찾아와 식사를 올리고 빗자루질할 뿐이었다. 정미는 태후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 한 뒤, 안으로 들어가 물었다.
잠시 후, 정미가 돌아와 태후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태후마마, 스승님께서 들어오시라 하셨습니다.”
태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현미 도장.”
정미는 태후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지켜봤다.
사실 태후가 아니라 태후 뒤에 꼭 붙어있는 두 유모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식사 시간에는 나이가 많은 유모 둘을 곁에 두더니 사부님을 뵐 땐 나머지 둘을 데리고 들어가시는구나. 그저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한 걸까?’
정미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밖에서 기다리는 나이가 많은 유모 둘을 쳐다봤다.
둘 중 하나는 평범한 외모였고, 다른 하나는 젊은 시절의 아리따운 외모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둘 다 느낌은 비슷했다.
정미는 시선을 거두고 생각했다.
‘차림새 때문이겠지. ……아니, 잠깐.’
정미는 다시 두 유모를 쳐다보다가 비로소 뭔가 깨달았다.
‘두 유모의 느낌이 비슷한 건, 둘의 분위기가 비슷하기 때문이야. 둘 다 총명하고 침착한 여인이지.’
이렇게 생각하니 정미는 그 눈에 익은 유모가 더욱 궁금해졌다.
‘태후의 곁을 지키는 유모인데도 그렇게 멍하고 굼뜰 수 있나? 그런 유모가 태후 곁에 있으면서 출궁까지 할 수 있다니. 분명 평범한 자가 아닐 거야.’
정미가 마음대로 추측하는 사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쯤 태후가 다시 나왔다.
정미는 태후의 기분이 들어갈 때보다 좋지 않음을 눈치채고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태후도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기에 정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고, 젊은 두 유모가 태후를 뒤따랐다.
정미도 급히 신경 쓰이는 유모 뒤에 서서 따라갔다.
정미는 키가 컸기에 위에서 몰래 그들을 내려다 보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이 유모의 목 아래 피부가 목 위의 피부보다 젊잖아!’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 차이쯤이야 별로 개의치 않았겠지만, 정미는 부의였기에 많은 문제를 알아챌 수 있었다.
‘변용(變容)한 것이로구나! 태후는 변용한 유모를 데리고 현청관으로 와 사부를 만났어. 그리고 꽤 실망한 모습으로 나왔고. 이것 참 이상하네. 태후의 목적이 뭘까? 오랫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다가 사부님이 세상에 나오시니 곧바로 현청관에 향을 피우러 왔으니……. 태후는 사부님께 진료를 보러 온 게 틀림없어! 그리고 그 환자는 십중팔구 이 변용한 유모일 거고! 그럼 이 마마의 신분은―’
정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믿을 수 없지만 유일한 가능성인 결론을 내렸다.
‘황후.’
태후의 친조카인 황후 외에 이 세상에서 제일 존귀한 여인이 이렇게 마음을 쓸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정미가 넋을 놓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첩, 태후를 뵙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손자가 황조모님을 뵙습니다.”
정미가 정신을 차려보니 화 귀비와 태자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소진 도장이 그들의 곁에 있는 것이 보였다. 누가 봐도 청령진인을 만나러 가는 모습이었는데 지나가는 길에 태후와 마주친 것이다.
태후를 감싼 분위기가 더 어두워지더니 담담하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인가?”
태자는 황조모가 늘 모비를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화 귀비보다 먼저 대답했다.
“모비와 향을 피우러 왔다가 국사께서 아직 폐관을 하지 않으셨다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정미를 스윽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휘며 웃었다.
“우연이구나. 애가도 국사를 뵈러 왔거늘. 그럼 가보거라. 애가는 먼저 궁으로 돌아가마.”
“살펴 가십시오.”
화 귀비와 태자가 몸을 돌려 길을 피해주었다.
이때, 태후를 뒤따르던 변용한 유모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태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큰일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