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균열
다음 날 정미가 깨어났을 때 정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술이 다 깨서 나를 보기 부끄러운 건가?’
정미는 조금 아쉬웠지만 어젯밤 정철의 격앙된 모습을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
“셋째 아가씨.”
팔근이 다가와 붉게 칠해진 작은 함을 건넸다.
“공자께서 외출하시기 전에 소인에게 전달하라 명하셨습니다.”
정미는 평범한 함을 아무렇지 않게 열어보았다. 함 안엔 접힌 종이가 가득 차 있었다.
정미는 아무 종이나 꺼내 안의 내용을 읽어보고는 숨을 훅 들이켜더니 함을 가리키며 허둥댔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은표가 난 거야?”
팔근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공자께서 사비로 모아두신 돈입니다. 앞으로 셋째 아가씨께 맡기겠다고 하셨어요. 마음대로 쓰셔도 좋습니다.”
* * *
정미는 함을 들고 현청관에 돌아올 때까지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환안과 함께 은표를 세었다.
다 세고 난 뒤, 환안은 눈앞이 어질했다.
“아, 아가씨! 공자님은 어디서 이런 많은 돈이 난 거예요!”
정미도 멍한 눈빛이었다.
“나한테 묻지 마. 나도 몰라.”
“그, 그럼 어디에 쓰실 거예요?”
환안이 입맛을 다셨다.
“어디 쓰냐고?”
정미가 환안을 흘끗 흘겨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둘째 오라버니가 아내를 맞을 때 써야지!”
‘그때가 되면 무조건 큰 저택을 살 거야. 위국공부 근처에 있는 곳으로.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아무 때나 외조모님을 뵈러 갈 수 있게.’
정미가 아름다운 상상에 잠겨 있을 때, 환안이 그 상상을 끊어냈다.
“둘째 공자께서 아가씨께 드린 거잖아요. 그렇게 하시면 손해 아닐까요…….”
‘이렇게 많은 돈이라니. 맛있는 걸 얼마나 많이 사 먹을 수 있는데. 백미재의 양육갱이랑 덕승루의 훈제오리랑…… 아무리 많이 먹어도 평생 먹고도 남을걸. 아가씨는 둘째 공자님을 너무 아끼신다니까. 어떻게 이걸 다 공자님의 아내에게 쓰신단 말이야.’
환안이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표하자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네가 뭘 안다고.”
‘내가 바로 오라버니의 아내가 될 텐데 이 돈을 내 혼례에 쓰는 게 뭐가 어때서?’
꾸중을 듣자, 환안은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몰래 정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정말 아가씨의 마음은 알면 알수록 어렵다니까.’
“됐어. 어서 이 함을 잘 챙겨놔.”
“어디에 둘까요?”
환안은 난처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많은 돈은 어디다 둬도 잠을 못 이룰 거라고요.’
정미가 피식 웃었다.
“네가 알아서 생각해. 밖에만 두지 않으면 돼. 여긴 현청관이잖아. 누가 훔칠 수 있겠어?”
환안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함을 꼭 안은 채 숨길 곳을 찾아 나섰다.
홀로 남게 되자 정미는 입술을 매만지며 조용히 웃었다.
* * *
눈 깜짝할 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자, 한 도동이 북명진인의 명으로 정미를 모시러 왔다.
“사형, 어쩐 일이십니까?”
정미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매, 도법 공부는 좀 어떤가?”
“도법은 아직 그리 심도 있게 배우지 않았고, 부법은 진전이 있습니다.”
사부를 따라 음양을 통해 현묘한 세계로 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또 시간을 내어 소갈증을 치료하는 부수를 연구해야 했기에, 도법은 배울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정미는 아직 수도(修道)할 생각이 없었고 국사의 법통을 쟁취할 생각은 더욱이 없었기에 도법을 배우는 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북명진인도 그저 가볍게 물은 말이었기에 이어서 본론을 꺼냈다.
“궁에서 서신을 보내왔는데 내일 아침에 태후께서 향을 피우러 오신다는군. 나는 사매가 모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태후?’
정미는 바깥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태후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심지어 수도의 높은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조차도 태후를 만난 적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정미는 아주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정미는 권력에 관심이 없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권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의 여인을 모시게 된다면 어찌 되었든 좋은 인연이 될 터였다.
‘게다가 나는 어쨌든 자유로워졌지만, 황손은 아직 황궁에 있지 않은가. 만약 황손의 증조모인 태후가 황손을 조금이라도 신경 써준다면 황손의 친척인 우리도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사형, 태후는 어떤 분이신가요. 조심해야 할 게 있을까요?”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으니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북명진인은 멈칫했다.
“사형도 태후를 못 뵌 지 오래되었다네. 내 기억 속 태후께선 어떨 땐 아주 인자하시고, 어떨 땐…… 큼큼, 좀 엄격하셨네.”
정미는 태후의 성정이 그리 부드럽지 않음을 깨달았다.
북명진인에게서 뭔가 알아내지 못하자 정미는 다시 위국공부로 돌아가 한 씨에게 물었다.
“태후마마 말이니?”
한 씨가 의아해했다.
“왜 갑자기 태후마마에 대해 묻는 거니?”
“태후께서 향을 피우러 오신대요. 사형이 제가 모시라 하셨고요. 실수를 저지를까 봐 어머니께 여쭈러 왔어요.”
‘어머니와 황후는 친한 벗이었고 소녀 시절에 자주 궁에 드나들었으니, 다른 사람보단 태후를 잘 알고 계시겠지.’
한 씨가 먼 곳을 내다보며 기억을 되짚어봤다.
“태후마마는 말이다, 인자하신 분이지. 황후께도 아주 잘해주셨어. 황후를 아끼시니 내가 궁에 들어갈 때마다 내게도 참 잘 대해주셨지. 하지만―”
한 씨가 잠시 멈칫하더니 정미를 쳐다봤다.
“황후가 유폐된 뒤, 태후께서 좀처럼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되셨지. 내가 마지막으로 입궁해 뵈러 갔을 때 황후 얘기를 꺼냈더니 몹시 화를 내셨어. 참 무섭더구나.”
한 씨가 정미의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꼭 기억하거라. 태후 앞에서 절대 황후 얘길 꺼내선 안 돼. 황후와 관련된 사람 모두를 언급하지 않으면 더 좋고. 이것만 조심한다면 태후께서 너 같은 어린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실 거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 태후께서 팥떡을 좋아하신단다.”
한 씨가 뭔가 떠오른 듯 웃었다.
“이것도 황후가 내게 알려주신 건데 태후께서 혼인하기 전부터 팥떡을 좋아하셨다더구나. 입궁한 뒤로는 좋고 싫음을 내색할 수 없었고, 팥떡이 그리 고급 음식도 아니다 보니 아는 사람이 점점 없어졌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정미가 결심을 내리고 일어나 인사하려는데 한 씨가 붙잡았다.
“좀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 식사를 들고 가거라.”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곧 있으면 날이 어두워지는데 산길은 위험하잖아요.”
한 씨는 그 말에 더 이상 붙잡지 않았고 참고 참다가 결국 딸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길 꺼냈다.
“한지가 어제 그 여우와 다툰 것 같더구나. 정말 신기한 일이야.”
“어쩌다가요?”
“한지가 그 여우의 혼수를 걷어찼다고 들었다. 자세한 건 아무도 모르고.”
한 씨가 비웃었다.
“훗, 그 계집과 혼인하려고 그리 소란을 피우지 않았니. 혼인하고 나서 잘 지낼 줄 알았더니 벌써 다투기 시작했구나.”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지요.”
‘정요의 혼수라면 그 병풍을 말하는 거겠지.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어제가 되어서야 지 오라버니에게 그걸 알려준 거라고. 정요가 맹소의 신분으로 중양절에 이름을 날리고 맹소의 영광이 담긴 병풍은 궁의 귀한 물건이니, 화 귀비가 혼수로 보내주었겠지. 지 오라버니가 귀신에 홀려 정요가 방귀를 뀌어도 향기롭다 여길 정도가 아니라면, 정요의 왼손 필체와 신발창에 끼워져있던 종이에 쓰인 필체를 확인해 보려 할 테지. 그럼 병풍보다 더 빠른 방법이 또 있겠어?’
정미는 이번 하산의 수확이 꽤 좋다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을 안고 현청관으로 돌아갔다.
* * *
기쁜 정미와는 달리, 정요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요는 오늘 점심도 거른 상태였다. 정요의 두 시종 중 하나는 화 귀비가, 나머지 하나는 맹 노부인이 보내준 여종이었는데 정요를 깍듯이 모시긴 했지만 그리 친근하게 굴진 않았다. 그들은 정요가 끼니를 거르자 한두 번 더 권해보더니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가서 세자가 아직 서재에 있는지 보고 오거라.”
정요의 말에 분홍색 비갑(*比甲: 옛날 중국에서 부녀자들이 입던 일상복)을 입은 시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나갔다.
녹색 비갑을 입은 시종이 물었다.
“며느님, 식사를 내올까요?”
주인이 점심을 걸렀으니 시종인 그들도 차마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때문에 지금은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고, 만약 주인이 저녁밥도 거른다면 오늘 밤엔 잠들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정요는 시종을 한 번 훑어보며 속으로 짜증을 냈다.
‘눈치가 빠른 것이었으면 벌써 세자를 찾아가 내가 식사를 거른다고 알렸을 터인데, 이 시종은 영리해 보이면서도 멍청하단 말이지. 예전에 쓰던 교용과 시서보다도 못해. 이게 다 한 씨가 내 순결을 빼앗았기 때문이야.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구나.’
정요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 마당의 석류나무를 바라봤다.
붉은 석류꽃이 가득 피어있어 몹시 아름다웠지만 정요에겐 그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석류나무도 저리 꽃을 피우는데 나는 지금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몸이구나.’
정요는 더욱 짜증이 났다.
원래는 자신을 향한 한지의 마음 정도면 몇 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겼다.
‘근데 혼인한 지 겨우 얼마나 되었다고 내게 기분 나쁜 티를 낼 줄이야. 설마, 사내들은 다 이런 걸까? 가지지 못할 땐 간절하다가 가지고 나면 식어버리는 거야?’
정요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손톱으로 창살을 긁었다. 그러자 옅은 자국이 남았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등 뒤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님, 세자께선 서재에 안 계십니다.”
“서재에 안 계시다고?”
정요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다른 여종에게 지켜보라고 일러뒀는데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느냐?”
어제 한지가 병풍을 걷어찬 뒤 소매를 뿌리치고 떠난 이후, 지금까지도 정요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요는 소녀처럼 안절부절못하지 않고 곧바로 여종을 보내 서재를 지켜보라 명했다.
“물어보았습니다.”
분홍색 옷의 시종이 잠시 망설였다.
“그게…….”
“뭐라 했는데? 우물쭈물하지 말고!”
정요는 원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머뭇거리는 시종의 모습을 보자 더욱 화가 났다.
시종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반반에게로 가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요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돌아섰다.
“정말이냐?”
시종은 차마 정요의 안색을 살피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거기 있던 여종이 그리 말했습니다. 세자께서 반반의 거처로 들어가시는 걸 보았다고…….”
정요는 입을 꾹 다물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입구에서 다시 뒤돌아와 침상 위에 드러누웠다.
“가서 세자를 모셔오거라. 내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식사를 거르다 기절했다고 하고.”
“예.”
분홍 옷의 시종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