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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72화 (272/375)

272화. 꿈

정철은 일단 의심을 접어두고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해준 뒤,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다들 왔어?”

“응. 모두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걱정 마. 이미 주방에 다 얘기해놨어. 외조모님과 어머니가 먹을 걸 아주 많이 보내주시기도 했고. 다 같이 먹기에 충분할 거야.”

정철이 방으로 들어가 모두와 인사를 나눈 후, 임랑을 소개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던지라 술상이 차려지자 분위기가 금방 떠들썩해졌다.

임랑은 기회를 틈타 몰래 정철에게 물었다.

“청겸, 네 여동생한테 내 얘길 자주 했나 봐? 왜, 나를 매부로 삼으려고?”

그러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혀 불만 없어.”

‘친우가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 여동생이니 인품도 분명 훌륭할 테고 용모를 논하자면…… 큼큼, 굳이 말할 필요도 없군. 만약 이런 아내를 맞을 수 있다면 꿈을 꾸다가도 웃으며 일어나겠어.’

정철이 어두운 표정으로 친우를 한 번 훑어봤다.

“나는 불만 있어. 석근, 내 여동생을 넘보지 마!”

‘미미가 점점 커가면서 용모도 갈수록 출중해지고 있어. 앞으로 더 주의해야겠군. 나도 모르는 새 뺏길지도 모르니까.’

임랑이 정철에게 술을 가득 따르며 방긋 웃었다.

“우린 가장 친한 벗 아닌가. 좋은 일은 남에게 줄 수 없지.”

정철은 하마터면 마시던 술을 뿜을 뻔했고 입을 가리고 기침하기 시작했다.

“진정해, 진정해. 네가 네 여동생을 아끼는 걸 알아. 하지만 아무리 아끼더라도 결국 시집은 보내야 할 것 아닌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느니 내게 보내는 게 낫지.”

임랑이 웃으며 정철의 잔에 건배를 했다.

정철은 친우가 그저 농을 치며 자신을 떠보는 것임을 알면서도 어처구니없고 울컥해 술을 끝까지 들이켰다.

“어쨌든 내 여동생은 넘보지 마. 너 말고도 더 어울리고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

“또 누가 있는데?”

임랑은 잠깐 들었던 마음을 접고 웃으며 물었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니 여기 있는 소년들 모두가 출중한 자들로 보였다.

이때 한평과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차례로 술을 권했고 임랑의 물음은 그렇게 묻혀버렸다.

정철의 집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술상은 마당에 차려졌다. 여인들은 과일주를 마셨고 사내들은 제대로 된 술을 마셨다.

좋은 술과 친한 사람들이 함께하고 잔소리할 어른들도 없으니, 모두 술을 꽤 많이 마셨다. 늘 술을 입에 대지 않던 화서까지도 몇 모금 마셔 뺨이 불그스름했다.

연회가 끝날 때쯤 모두가 술에 취해 있었고 정철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미가 한추화에게 말했다.

“언니, 오라버니가 많이 취한 것 같아. 난 여기 남아서 오라버니를 돌볼게.”

한추화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사람을 보내.”

위국공부와 이곳이 가깝긴 했지만 한추화는 사람을 보내 마차를 불러왔다. 많이 취한 사람들부터 마차에 태운 뒤, 다른 마차엔 임랑과 사철을 태워 각자의 집으로 보냈다.

이때 화서가 마차 앞에서 멈춰 섰다.

“누님, 정미와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화서가 다가오자, 정미는 팔근에게 정철을 데리고 먼저 들어가라 명했다.

“무슨 일이야?”

화서의 뺨은 붉어져 있었지만 정신은 맑았다. 그가 정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물었다.

“오늘 여기 남아서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응?”

‘나쁜 짓이 뭔데?’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맞춤이라든지―”

‘그만!’

소녀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소년의 귀를 꼬집으며 이를 갈았다.

“어린 녀석이 걱정도 많네!”

화서는 몹시 화가 났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이 들을까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나, 나도 알아봤다고. 입맞춤을 하면 아기가 생긴다 했어!”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거든. 아…… 아기는 그렇게 생기는 게 아냐. 어서 가. 더 늦었다가 추화 언니한테 들키려고 그래?”

‘그저 입맞춤일 뿐인걸. 책에서 봤던 짓은 하지도 않았다고!’

화서는 정미가 입맞춤을 할 줄 모르는 줄 알고 그제야 마음을 놓고 마차로 돌아갔다.

정미는 마당 입구에서 마차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는 거람. 화서가 나쁜 걸 배웠어!’

화서에게 나쁜 걸 가르친 사람은 자신임을 깨닫지 못한 정미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수건을 짜 정철의 입가를 닦고 있는 팔근을 보고 말했다.

“내가 할게.”

팔근이 수건을 정미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늘 공자께서 평소보다 많이 드셨네요.”

정미가 정철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으며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취한 건 처음 보는구나.”

팔근이 배시시 웃었다.

“기분이 좋으셨나 봅니다.”

‘공자님께 회인백부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감옥에서 나온 뒤 처음 맞는 생일이고 셋째 아가씨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니 기쁘지 않을 리가.’

정미의 시선이 정철의 얼굴에 꽂혔다.

두 눈이 살포시 감겨있는 사내의 얼굴은 마치 높은 산꼭대기에 티끌 하나 없는 눈처럼 깔끔하고 수려했다.

정미의 눈빛이 더 다정해지더니 팔근에게 분부했다.

“가서 해장국을 끓이거라.”

“예.”

팔근이 문을 닫고 신나게 걸어 나갔다.

집 안의 하인들 가운데 팔근과 소매 외에는 이 방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다.

팔근이 나가자, 정미는 마음을 놓고 정철의 얼굴에 손을 올려 얼굴 윤곽을 따라 그렸다.

눈썹, 눈, 입술, 모든 구석이 다 좋았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정철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미?”

정미가 고개를 숙여 붙잡힌 손을 쳐다보았다.

정철이 작게 웃었다.

“꿈이구나.”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정미는 웃으며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취하면 이렇게 귀여워지는구나.’

정철이 갑자기 다시 눈을 뜨더니 몽롱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정철이 정신을 차린 줄 알고 그를 놀리려다가 곧바로 멍해졌다.

정철이 고개를 숙여 정미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곤 중얼거렸다.

“이런 꿈도 오랜만이네.”

그러고는 손에 번쩍 힘을 주더니 소녀를 품에 안고 익숙한 듯 그의 아래에 깔았다.

“미미―”

정철은 자신이 꿈을 꾸는 줄 알고 술 냄새가 풍기는 숨결을 정미의 얼굴에 뿜었다. 정미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오라버니가 많이 취했나?’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긴 속눈썹을 떨며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 내 위에 있으니까 조금 무겁긴 하네. 하지만…… 오라버니니까, 그래도 좋아.’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포개지자 정미는 머리가 새하얘져 기꺼이 손을 뻗어 정철의 어깨를 품에 안았다.

정철이 이렇게 몰입한 게 처음이라서일까 아니면 그에게서 풍기는 술향기에 덩달아 취해버린 걸까. 정미는 만약 자신을 누르고 있는 정철이 없었다면 진작 하늘로 날아갔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느낌이 이상해. 나도 취했나?’

정미의 의식이 흐려질 때쯤 갑자기 가슴 쪽에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충격적인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지금 내 옷을 벗기고 있어. 그것도 입으로!’

귀신에 홀린 것처럼 화서의 경고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미는 풀린 옷자락을 휙 움켜쥐고 당황하며 말했다.

“오, 오라버니. 이러면 안 돼. 아기가 생긴다고.”

정철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정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

정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4월, 정미는 속옷에 내의만 걸치고 있었고 두 옷은 모두 얇고 부드러운 소재였다.

연둣빛 겉옷과 새하얀 겹옷이 들춰지자 연분홍색 속옷이 드러났다.

정철의 입술이 소녀의 분홍빛 꽃봉오리에 닿아 뒤얽히더니 이빨로 살짝 깨물기까지 했다.

그 순간 정미는 온몸이 감전된 느낌에 벌떡 일어나 정철을 밀어냈다.

“오라버니, 이러지 마―”

그리고 곧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지자 정미는 더욱 충격을 받았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비수로 위협할 것까진 없잖아! 오라버니는 지금 분명 귀신에 홀린 걸 거야!’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난 정미는 정철의 어깨를 깨물어버렸다.

고통이 느껴지자 정철의 눈빛이 갑자기 맑아졌다.

그러고는 온몸이 굳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봤다.

연분홍색의 속옷은 수줍은 소녀의 뺨 같은 붉은 빛을 띠었고, 그 연분홍색 아래 숨겨진 구슬 두 알 중 하나엔 이슬이 맺혀있었다.

정철은 순간 뭔가 깨달은 듯 표정이 차갑게 굳더니 침상에서 뒤돌아 내려왔다. 그는 차마 정미를 쳐다보지도 못하며 눈을 꾹 감고 급히 말했다.

“내가 실수했어.”

정철이 방에서 나가려 하자, 정미가 급히 옷을 내려놓고 불렀다.

“오라버니, 여긴 오라버니 방이야!”

‘응?’

정철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정미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두 뺨을 붉히며 옷을 여몄다.

‘오라버니가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너무 부끄러워…….’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정철은 걱정이 되어 용기를 냈다.

“미미, 너―”

그러고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다시 입을 닫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소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정철이 제정신을 차렸으니 정미도 숨김없이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제 뒤돌아도 돼. 다 정리했어.”

이 말에 정철의 목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한참 뒤에야 천천히 뒤돌아섰다.

정미는 침상 위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봤다.

정철은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정미에게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두 사람은 서로가 먼저 말문을 열길 기다렸다.

결국 정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미, 미안해. 방금은 내가 경솔했어. 약속할게. 앞으론 절대 이러지 않기로―”

정미의 시선은 계속 정철을 향하고 있었다. 정철이 미안한 표정으로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자 방금의 수치스러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고 눈을 내리깔며 작게 말했다.

“입은 맞춰도 돼.”

정철은 잠시 멍해졌다가 어이없으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기뻤다.

다른 아가씨는 어떻게 반응했을지 모르지만, 정미가 이렇게 기꺼이 받아들여 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철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본능을 주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미도 그렇고 나도 그래. 역시 최대한 빨리 혼인해야겠어.’

정미가 정철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물었다.

“오라버니, 방금은 취해서 그런 거야?”

“어―”

정철은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예전엔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익숙한 꿈이 다시 찾아오자, 이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꿈에서는 굳이 자신을 통제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느니 차라리 취했다고 말하는 게 낫겠지. 그리고 미미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 한동안 이런 황당한 꿈을 꿨다곤 절대 말 못 해.’

정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그저 내 옷만 안 벗기면 돼. 그랬다간 아기가 생겨버린다고. 당연히 나도 오라버니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지만 지금은 안 돼. 아직 혼인하지도 않았잖아…….”

정철의 뺨이 붉어졌고 가슴은 쿵쿵 뛰었다. 정미의 말을 들으니 곧바로 그녀를 다시 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니까 앞으론 취하지 마. 방금 취한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는데.”

정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내가 또 뭘 했어? 혹시 널 다치게 한 거야?”

‘설마 내가 더 몹쓸 짓을 한 건가?’

“다치진 않았는데, 방금 비수로 날 위협했었어.”

정미의 시선이 정철의 허리춤에 꽂히더니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평소에도 비수를 허리춤에 품고 다녀?”

“아니―”

정철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말문이 막혔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꼭 깨야 한다면 깨어나기 전에 벼락에 맞아 죽었으면 좋겠네.’

정철은 난생처음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을 느꼈다.

“셋째 아가씨, 해장국을 끓여왔습니다.”

팔근이 문밖에서 외쳤다.

“들어오거라.”

팔근은 들어오자마자 깜짝 놀랐다.

“공자님, 깨어나셨군요.”

정철의 얼굴은 붉으면서도 새하얗게 질렸다.

‘내가 지금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바로 그 깨어났다는 말이라고!’

그러나 팔근 덕분에 정철은 정미의 의혹을 풀어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리 가져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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