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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71화 (271/375)

271화. 축복

“조모님, 왜 그러세요?”

사철은 어렸을 때 사 노부인의 곁에서 지냈기에 조모에 대한 애정이 특히나 두터웠다. 게다가 사철은 몹시 세심한 자여서 사 노부인의 기분을 당연히 알아챌 수 있었다.

사 노부인은 우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사철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철아, 위국공부의 아이들과 정가 둘째에게 가는 것이냐?”

사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선 위국공부로 갔다가 사촌들과 함께 갈 예정입니다.”

“정미도 가느냐?”

사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정미는 철 형님과 가장 가까우니 당연히 갈 겁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요.”

사 노부인은 붉어진 손자의 옆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파졌다.

‘바보 같은 녀석. 정미가 가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이렇게나 꾸몄다고? 장모님을 뵈러 가는 것마냥.’

사 노부인은 손자의 마음을 눈치챌수록 이 일을 더는 미뤄선 안 되며 얼른 손자에게 사실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목을 가다듬고 ‘오늘 날씨가 좋구나’ 따위의 말로 운을 떼더니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위국공부에서 답장이 왔다. 혼사는 무르기로 했다.”

사철은 웃음을 머금고 조모의 말을 듣다가 한참 뒤에야 무슨 말인지 깨달은듯했다.

“괜찮으냐?”

사 노부인은 알고 있었다. 손자가 처음으로 마음을 쓴 아가씨이니 이 소식이 괜찮게 들릴 리 없었다.

사철의 표정이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을 되찾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시간이 늦었네요. 우선 가보겠습니다. 돌아와서 다시 인사드리러 올게요.”

“그래, 가보거라.”

사철은 사 노부인의 방에서 나와 밖으로 걸어갔고 그제야 고개를 숙여 손바닥을 쳐다봤다. 손바닥이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 * *

위국공부 안, 아랫세대들이 모두 함께 정철에게로 가기 위해 형무원에 모여 있었다.

한지가 정요를 데리고 오자, 정미는 깜짝 놀라 곧바로 한지에게로 다가갔다.

“지 오라버니, 잠시 저를 따라오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고는 한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뒤돌아갔다.

한지가 정요를 쳐다보자 정요는 방긋 웃었다.

“사촌 여동생이 볼일이 있나 봅니다. 어서 가보세요. 오래 기다리게 해선 안 되니.”

“그럼 금방 갔다 오마.”

한지가 정미를 쫓아가 칸막이 방으로 들어갔다.

정미가 똑바로 서서 한지를 쳐다봤다.

“정미, 무슨 일이야?”

한지는 미묘한 표정으로 지척의 소녀를 쳐다봤다.

정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오라버니의 생일에 사촌 올케언니를 데리고 갈 생각인가요?”

“응?”

한지는 깜짝 놀랐다.

‘정요를 데리고 철 형님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게 뭐 어때서? 정요와 철 형님이 예전엔 남매 관계긴 했지만, 지금은 내 아내의 신분으로 참석하는 것이니 그리 비난할 게 못 되는데.’

“지 오라버니는 저희와 함께 가도 되지만 사촌 올케언니는 안 됩니다!”

한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 너와 소야 사이에 응어리가 있는 건 알고 있어. 하, 하지만 이렇게 멋대로 굴어선―”

“제멋대로요?”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차갑게 웃더니 서랍에서 신발창을 꺼내 한지 앞에서 흔들었다.

“이걸 보고 나서 다시 말씀해보시죠.”

“이게 뭔데?”

한지는 신발창을 건네받은 후, 둘러보다가 갈라진 신발창 사이에서 흰 종이를 발견했다.

깔끔한 글씨가 적혀진 종이였는데 내용을 읽자 순간 깜짝 놀랐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했던 한지였기에 당연히 이 문장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이건―”

한지가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가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비웃었다.

“과거 시험에서 자주 보이는 쪽지지요.”

과거는 학도들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기회였기에, 조정에서 늘 부정행위를 단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쪽지를 몰래 숨기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한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네게 왜 이런 게 있어?”

“따지자면 사촌 올케언니한테 감사할 일이지요. 이건 둘째 오라버니의 시험 전, 제가 오라버니에게 주려던 선물입니다. 당시 우연히 다른 선물을 주게 되었는데, 나중에 시험장에서 누가 쪽지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해서 이 신발창을 잘라보았더니 그게 있더군요.”

한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미, 함부로 말하지 마!”

한지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복잡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 네 마음…… 네 마음이 힘든 건 나도 이해해. 하지만 소야에겐 잘못이 없어. 그저―”

정미는 횡설수설하는 한지의 모습에 짜증이 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정요가 잘못이 없다고요? 잘못이 없다면 이 신발창 사이에 있던 종이는 어디서 난 건데요?”

정미의 손이 떨렸다. 다른 한쪽 신발창을 한지의 얼굴에 내려치고만 싶었다.

‘어릴 땐 진중하고 믿음직스럽던 지 오라버니가 왜 크고 나니까 오히려 어리석어졌을까? 정말 사랑에 눈이 멀기라도 한 건가?’

한편 한지도 정미의 고발에 마찬가지로 화가 났다.

‘이건 여자아이들의 사소한 다툼이 절대 아냐. 하지만 이 신발창 안의 종이가 정말로 정요가 한 짓이라면 그, 그럼 정요가 어떤 사람이라는 거야?’

한지는 결코 이 일을 인정할 수 없어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정요의 필체는 이렇지 않아.”

정미가 한지를 흘끗 흘겨보더니 차갑게 웃었다.

“지 오라버니, 정요가 왼손으로 글씨를 쓸 줄 아는 걸 모르시나요?”

한지는 당황했다.

작년 중양절에 궁에서 열린 상국연에서 정요가 썼던 시 두 수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한지도 몇 번이나 숙독하며 절로 감탄이 나왔었다. 그리고 그 시 두 수는 정요가 양손으로 동시에 쓴 것이었다.

아쉽게도 한지는 그날 상국연 자리에 없었고 본인도 이에 몹시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게 정요가 쓴 거라고 할 순 없어.”

한지는 표정은 확고했지만 속으론 왠지 불안해했다.

정미가 다가오자 한지는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났다.

소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말보다 직접 확인하는 게 더 확실하겠지요. 정요와 오라버니는 이제 부부이니, 앞으로 사촌 올케언니가 왼손으로 쓴 글을 볼 기회가 분명 있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신발창 한 짝을 한지의 손에 살짝 내려놓았다.

“한 짝은 지 오라버니에게 드리지요. 잘 챙겨두세요.”

한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신발창을 품에 감췄다.

정미는 절로 웃음이 나 입꼬리를 올렸다.

‘나와 큰언니를 짓밟았으니 언젠간 그 빚을 갚고 말 테다.’

소녀의 표정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지 오라버니. 믿든 안 믿든, 저는 정요가 제 둘째 오라버니를 해치려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오라버니의 생일에 정요를 보고 싶지 않아요. 이해해주실 수 있죠?”

정미가 한지에게 이런 태도로 말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늘 자신의 옷깃을 잡고 따라다니던 어린 소녀가 이리 아름답게 성장하자 예전에 소꿉친구로 지냈던 세월도 흐릿해지기 시작해 그리우면서도 허전했다.

한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미가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요, 지 오라버니.”

* * *

한지가 응접실로 돌아오자 정요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한지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어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소야, 정미가 널 보고 싶지 않대. 가지 마.’ 라고 할 순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정요가 다가와 작게 물었다.

한지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정미가 내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맥을 짚어보라네.”

“정미가요?”

정요는 꽤 불쾌했다.

‘아직도 한지에게 마음이 남아있는 건가?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내 사내를 신경 써?’

정요는 이런 생각이 들수록 더욱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세자께서 느끼기엔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머리가 조금 아팠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거든.”

“그럼 오늘은 철 형님네에 가지 말도록 하지요. 가면 또 술을 드셔야 하잖아요.”

정요가 부드럽게 말렸다.

‘정미가 많이 달라졌어. 앞으로 주의해야겠군. 둘이 마주칠 일도 최대한 줄이고.’

한지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가서 정미에게 말하고 오마.”

정요가 한지를 붙잡았다.

“어서 가서 앉으세요. 제가 가서 말할게요.”

“알겠다.”

한지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날씨는 맑았고 형무원의 응접실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미리 둘 셋씩 모여 마당으로 나가 외출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정요가 정미를 찾아와 말했다.

“미 동생, 오늘 미 동생의 사촌 오라버니가 별로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참석할 수 없을 것 같네. 이건 우리가 철 형님에게 드리는 생일 선물이야. 대신 챙겨주렴.”

정미가 선물을 건네받으며 씩 웃었다.

“그럼 사촌 올케언니, 지 오라버니를 잘 보살펴주세요.”

정요는 마침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저도 모르게 차갑게 대답했다.

“그건 미 동생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당연히 신경 쓰지 않지요. 사촌 올케언니가 신경 써주시면 됐습니다.”

정미가 정요를 지나쳐갔다. 정미는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정요가 준 선물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교양 없는 짓임을 알기에 꾹 참아냈다.

정철이 빌린 작은 주택은 위국공부 근처에 있었기에 사람들은 마차가 아니라 둘 셋이서 모여 잡담을 나누며 걸어갔다.

한추화가 작게 말했다.

“정미, 방금 사가 동생이 고개를 돌리고 널 쳐다봤어.”

정미가 웃으며 그녀를 살짝 밀쳤다.

“잘못 본 거겠지.”

정미는 사철에게 마음을 준 적도 여지를 준 적도 없었으며 몇 번 만났을 때도 늘 거리낌 없이 대했다. 취소되긴 했지만 어쨌든 혼사를 주고받은 사이가 되었으니 정미는 더욱 사철과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

* * *

그들이 정철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주인은 아직 집에 없었다. 정미는 사람들에게 차와 과일을 내어오느라 이리저리 바빴다.

그녀가 주방에 어떤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지 분부한 후, 마당의 석류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

정미가 뒤돌아보자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철이 보였다.

“사철 오라버니.”

정미가 그를 보며 환히 웃자 위에 피어있는 석류꽃보다도 더욱 아리따웠다.

사철은 그 웃음에 왠지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정미에게로 다가와 석류나무 아래의 소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작게 물었다.

“정미, 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진지하고도 다정한 말투에 정미는 왠지 마음이 떨떠름해졌다.

정미는 사철과 마주 보며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철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사내 중 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한 사람만 담을 수 있으니까.”

사철이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지었다.

“이해했어.”

소년이 발걸음을 떼 다시 돌아가다가 멈춰 서서 작게 말했다.

“정미가 원하는 바를 꼭 이뤘으면 좋겠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축복해줄게.”

정미는 시선을 거뒀다가 뭔가 느껴져 마당 입구를 쳐다보았다. 과연 정철이 어떤 뚜렷한 이목구비의 청년과 함께 서 있는 게 보였다.

정철은 정미가 자신을 쳐다보자 웃으며 다가왔다.

정미가 치맛자락을 들고 맞이했다.

“다녀왔구나, 오라버니.”

자연스럽고 정다운 말투는 왠지 정미가 이 집의 안주인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정미가 정철 옆의 청년을 보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분이 임 오라버니셔?”

임랑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을 끔뻑이며 몰래 정철을 콕콕 찔렀다.

정철도 어리둥절했다.

‘미미가 임랑을 어찌 알고 있지?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설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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