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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70화 (270/375)

270화. 유숙(留宿)

식사 후, 정미는 노심초사하며 수시로 정철을 몰래 쳐다봤다.

‘홍소육 한 그릇을 다 비웠어. 다 타고 맵고 냄새나는 음식이었는데 배탈이 나는 건 아니겠지?’

정철은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세 잔이나 들이키고 말문을 열었다.

“미미, 오라버니가 위국공부로 데려다줄게.”

“응.”

정미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며 여기 머물고 싶다고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정철이 일어나 정미를 잡아당겼다.

“그럼 가자. 오늘 하늘이 조금 흐리던데 이따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어.”

‘응? 비가 내려?’

정미가 침착하게 손을 빼며 찻잔을 움켜쥐었다.

“오라버니, 음식이 조금 짰나 봐. 차 좀 마시고 갈래.”

정철은 별생각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정미는 반 시진 동안이나 그 차를 붙들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정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라버니, 밖에 비가 오는 것 같은데…….”

비는 꽤 세차게 내렸고 창문 앞의 파초나무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처마에서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비가 꽤 내리는 것 같은데 집에 우산 있어?”

정미가 일어나 밖으로 발걸음을 떼려 하자 정철이 붙잡았다.

“오라버니?”

소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반쯤 고개를 들었다.

정철의 표정이 살짝 붉어지더니 한참 뒤에야 작게 말했다.

“여기 있어.”

“응?”

“비가 너무 많이 내리니까. 젖으면 감기 들잖아.”

정미가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가 남으라 했으니까 남을게.”

정철의 입가에 띤 웃음기가 살짝 굳었다.

‘미미가 방금 한 말, 왠지 내가 기회를 잡은 변태가 된 기분이잖아? 그런 뜻은 전혀 없었다고!’

정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일부러 물었다.

“그럼 난 어디서 자?”

“따라와.”

정철이 정미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와 좁은 복도를 따라 동쪽 곁채로 들어갔다.

정미는 진작 여기에 와보긴 했지만 마치 처음 온 것처럼 벽에 걸린 눈 내리는 매화 그림을 가리켰다.

“저 그림, 마음에 든다.”

그러고는 연청색의 창문 휘장도 가리켰다.

“저 색깔도 예뻐.”

정철은 얼굴이 살짝 뜨거워져 목을 가다듬고는 정색하며 설명했다.

“미미랑 어머니가 가끔 오실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놨어.”

정미는 입꼬리를 올리며 속으로 몰래 웃었다.

‘또 거짓말을 한다니까. 저 설경도랑 휘장 색깔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건데 어머니랑 무슨 상관이라고? 됐어. 오라버니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는데 굳이 캐내지 말아야지.’

정철은 누가 봐도 여자아이의 규방으로 꾸며진 방에 서서 귀 끝이 점점 붉어졌다.

“시간이 꽤 늦었어. 미미, 일찍 쉬어.”

정미가 정철을 보며 웃었다.

“오라버니, 아직 목욕을 못 했는걸.”

‘목욕?’

정철은 잠시 멍해졌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여기 욕실은 아직 정리하지 못해서 씻기에 불편할 거야. 그냥 내일 위국공부로 돌아가서 목욕해.”

“알겠어.”

정미는 아쉬운 듯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오라버니가 왜 갑자기 이렇게 얌전해졌지? 현청관 은행나무 아래에 있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간 거야.’

정철은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아직 혼약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굴어선 안 돼. 그럼 미미를 가볍게 여기는 꼴이 되니까.’

“오라버니, 나 아직 잠이 안 와. 나랑 얘기나 나누자.”

정미가 방에서 나가려는 정철을 잽싸게 붙잡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놓아줄 순 없지.’

정미가 정철을 앉히고 물었다.

“요즘 왜 그렇게 바쁜 거야? 소매의 말로는 늘 이렇게 늦게 돌아온다던데.”

한림원은 지위는 높지만 정치적 실권은 없었기에 한가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정철은 분명 다른 일로 바쁜 것이었다. 그러나 매번 굳이 늦게 돌아오는 건 안양 공주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정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최근 전조(前朝)의 역사서를 수정하고 있어.”

정미는 이 방면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별로 재미가 없어 도관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매 식사 전, 도사들은 반 시진 동안 무릎을 꿇고 불경을 읽은 뒤에야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청령진인의 제자인 정미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요즘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도동은 몰래 뒷산에서 참새를 구워 먹다가 들켜 쫓겨날 뻔했지만, 정미가 도와 남을 수 있게 됐던 일도 말해주었다. 다음날 도동이 감사의 뜻으로 맛있게 구워 윤기가 좔좔 흐르는 참새를 올렸고 정미는 마지못해 그 참새를 먹었다.

그리고 또…….

정철은 열심히 들었다. 창밖에선 거센 빗소리가 들려왔고 방 안엔 따뜻한 촛불이 켜져 있었다.

정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눈을 들어 정철과 마주 봤다.

정철이 정신이 들어 물었다.

“왜 말을 안 해?”

“다 했어. 오라버니, 다른 거 하자.”

정철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자 곧 복사꽃보다 아리따운 소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더니 방긋 웃었다.

“입맞춤해주면 안 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정철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정철은 저도 모르게 꾸짖었다.

“허튼소리!”

정미는 억울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날은 내게 두 번이나 입을 맞췄잖아! 이제 싫은 거야?”

‘이게 무슨 말이야?’

정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게 아냐.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더 이상 그럴 순 없어…….”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목소리에 무게를 싣고 말을 이었다.

“바보야, 누가 봤다가 네 청예(*淸譽: 청렴을 지킨 명예)가 더럽혀지면 어떡하려고?”

정미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집 안인데 누가 본다는 말이야? 오라버니는 가끔 짜증 날 정도로 점잖다니까.’

정철은 왠지 지나치게 말한 것 같아 다시 누그러진 말투로 작게 말했다.

“혼인하고 나면 네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곁채를 나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정미는 어안이 벙벙했다.

‘복도랑 정방은 이어져 있잖아. 왜 굳이 비를 맞는 거야?’

그러고는 신발을 벗고 침상 위에 누워 정철이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리며 바보처럼 웃었다.

* * *

다음 날, 날씨는 다시 맑아졌다.

청색 관포를 입은 정철이 정미에게 당부했다.

“돌아다니지 말고 곧장 위국공부로 가야 해.”

정미는 만족스러운 듯 오라버니를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늘은 일찍 돌아와. 오라버니 생일이잖아.”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궁에 강독하러 가는 날이니까 오후면 돌아올 거야. 친우를 데려올 수도 있고.”

정철이 떠난 뒤, 정미는 환안을 데리고 선물을 고른 뒤 위국공부로 향했다.

정미가 돌아오자 단 노부인이 활짝 웃으며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고 한 씨의 앞에서 말했다.

“미야, 궁에서 태자비를 고를 준비를 한다는구나. 나와 네 어미가 생각하기로는 아무래도 네 혼사를 일찍 정해놔야 할 것 같다.”

“혼사요?”

정미는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래.”

한 씨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간에 네 몸에 흐르는 건 정가의 피가 아니니. 윗사람들의 마음은 도통 알기가 어려운데 만일 네가 태자비로 선출되면 어떡한단 말이야. 나는 다신 내 딸을 그 불구덩이로 내보내고 싶지 않구나.”

“그럼 조모님과 어머니의 말씀은―”

한 씨가 웃었다.

“안 그래도 이틀 전 사가에서 찾아왔었단다. 미야, 사철을 어찌 생각하니?”

“사철 오라버니요?”

정미는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은 좋죠.”

한 씨가 안도하듯 웃었다.

한 씨는 본인이 엉망진창인 혼인 생활을 겪었기에 딸에게 같은 경험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집안의 수준이 서로 걸맞다는 가정하에 두 사람의 마음이 맞다면 그보다 좋을 건 없었다.

그러나 정미의 말투가 급변했다.

“하지만 사철 오라버니는 그저 친척 오라버니일 뿐인걸요. 외조모님, 어머니, 저와 사철 오라버니를 약혼시키시려는 거예요?”

단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미야, 사철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친오라버니를 좋아하듯 좋아할 뿐이에요.”

단 노부인과 한 씨가 서로를 마주 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한 씨는 딸이 자신과 같은 경험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고, 단 노부인도 손녀가 만족할만한 혼사를 정해주고 싶었다.

“그럼―”

단 노부인은 잠시 멈칫했다가 결국 화서 얘기는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았다.

“미가 마음에 둔 사람은 없느냐?”

정미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혼사는 부모님과 중매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외조모님과 어머니의 뜻에 따를게요.”

단 노부인과 한 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얌전하게 구는 것도 성의가 있어야지!’

“그렇다면 다음에 이 할미가 네 이모할머니와 말해보마. 계속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단 노부인이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바보 같은 녀석아. 사철은 보기 드물게 좋은 아이란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울고 불며 나를 찾아와도 소용없어.”

정미가 단 노부인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

“당연히 후회 안 해요. 사실 지금 부법과 주술을 배울 시간도 충분치 않거든요. 시집갈 시간이 있을 리가요. 어쨌든 저는 이제 막 열다섯이니 그리 급할 필요도 없고요.”

한 씨가 눈을 부라렸다.

“만약 궁에서 그런 소문이 퍼져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도 급할 것 없지. 사철을 놓친 네가 후회할지 않을지는 나도 모르지만, 입궁하게 되면 분명 후회할 게다.”

‘입궁? 태자에게 시집?’

정미는 이 가능성을 떠올리자 구역질을 할 뻔했다.

“관으로 돌아가 사부님께 말씀드려볼게요. 사부님께서 분명 막아주실 거예요.”

국사의 권세와 지위를 떠올리자 단 노부인과 한 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정철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네 오라버니의 생일이니 이따 철이를 찾아가 우리 집에서 놀다 가라고 하거라.”

“이미 오라버니랑 얘기해놨어요. 저와 큰 사촌 언니, 사촌 오라버니들이 같이 둘째 오라버니의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요.”

“그랬구나…….”

한 씨는 조금 서운해졌다.

“그 집은 크지도 않은데 무슨 재미가 있겠니!”

단 노부인이 웃었다.

“어린아이들끼리 모이니 더 재미있겠지. 그럼 나중에 음식과 술을 보내면 되겠구나.”

이후 정미는 단 노부인의 거처에서 나와 한추화와 사촌 오라버니들을 초대하러 갔다.

* * *

사가(謝家)

사철도 초대장을 받은 뒤, 새것 같은 맑은 푸른색의 직철으로 갈아입고 사 노부인에게로 찾아갔다.

사 노부인은 안으로 들어오는 손자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손자. 인품, 용모, 재학까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아이인데, 어째서 정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까.’

사 노부인 정도의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일에 눈치가 빨라지는 편이었다.

‘위국공부와 사가에선 이 두 아이의 혼사를 기꺼이 빨리 추진하고 싶어 했는데 이리 완곡히 거절함은 분명 정미 마음에 들지 않아서겠지. 이렇게 훌륭한 내 손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다니 정미는 도대체 어떤 사내에게 시집가려 하는 걸까?’

사 노부인도 정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능력도 있고 재미도 있으며 예쁘기까지 한 아가씨가 앞으로 자신을 ‘조모님’이 아닌 ‘이모할머니’라고 밖에 부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고는 눈앞의 손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늘 수수하게 입고 다니던 손자가 오늘은 철저하게 꾸민 채였으며 허리에 맨 옥패마저 평소 매고 다니던 것과 달랐다. 그러니 더욱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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