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고기
동 이낭은 연교거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정동에게로 향했다.
입구에 다가가자마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동이 침상 기둥에 기대 가련하게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아, 왜 그러니?”
정동이 고개를 들더니 동 이낭의 품에 달려들었다.
“어머니, 정말 못 하겠어요.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규율을 공부하라는 거예요? 어머니, 보세요.”
정동이 치맛자락을 걷고 동 이낭에게 발을 내밀었다.
“발목이 계속 부어있다고요. 설마 적녀라면 모두 이런 요구를 받아야 하는 건가요? 예전에 셋째 언니는 이런 걸 배우지 않았잖아요.”
“셋째 언니는 무슨. 정미는 이미 우리 집안의 아가씨가 아니다. 앞으로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정미가 아직도 셋째 아가씨라면 동이는 뭐란 말인가?’
동 이낭이 손수건을 꺼내 정동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부어오른 딸의 발목을 보자 마음이 아팠지만 꾹 참고 위로했다.
“동아, 갖은 고생을 견뎌야 비로소 큰 사람이 된단다. 지금 고생해놓으면 앞으로 복을 누릴 수 있을 거야. 정미는 배우고 싶어도 이런 기회가 없었을 거란다.”
정동은 뭔가 실마리를 얻은 느낌에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동 이낭은 어차피 정동도 알게 될 일이라 생각해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궁에서 태자비를 선출할 거라 하는구나. 너는 지금 우리 집안의 적녀이고 황가에서 내려오는 유지(*遺旨: 유서)가 있으니, 네가 선출될 가능성은 아주 크단다……. 동아, 왜 그러니?”
동 이낭이 말하는 사이, 정동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더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기 시작했다.
정동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져 동 이낭의 초조한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어머니, 그게 정말이에요?”
“당연히 정말이지. 이 녀석아, 아무리 감격스러워도 이럴 정도까지는……. 동아?”
정동은 그대로 기절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방 안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 중엔 맹 노부인까지도 자리에 있었다.
“조모님―”
맹 노부인이 다정한 표정으로 정동의 팔을 눌렀다.
“깨어났으면 됐다. 움직이지 말거라. 그동안 공부하느라 너무 피곤했던 게지? 그럼 우선 며칠 쉬어라. 건강이 가장 중요하단다.”
“감사합니다, 조모님.”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정동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맹 노부인 앞에서 울며 애원해봤자 전혀 소용없을 거란 걸.
가족들의 응원을 실컷 듣다 보니 사람들은 점차 방을 나섰다. 정동은 그제야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 * *
현청관 안, 정미는 은행나무 아래에 앉아 초혼부(招魂符)의 화법을 조용히 외우고 있었다. 도포를 입은 환안도 옆에 서서 손을 휘두르며 날벌레를 쫓아내고 있었다.
그때 어린 도동이 급히 달려왔다.
“태사숙조님, 산 아래서 누가 태사숙조님을 찾으십니다.”
정미가 눈을 떴다. 눈에는 기쁜 기색이 드러났다.
‘곧 오라버니의 생일이잖아. 설마 나랑 함께 보내고 싶어서 찾아온 건가? 역시 마음이 통했구나.’
“누구더냐?”
도동이 대답했다.
“태사숙조님의 조모님 곁을 모시는 유모라고 합니다. 두통을 완화시키는 부수를 부탁하러 오셨답니다.”
정미의 눈에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태사숙조님?”
도동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대며 자신보다 몇 살밖에 많지 않은 어린 태사숙조를 살펴봤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도동이 환안을 쳐다봤다.
“태사숙조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환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폐관하셨어요.”
* * *
‘폐관’한 정미는 그날 오후 산에서 내려왔다.
4월의 날씨는 따뜻했고 불쾌할 정도로 덥지도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활기차 보이자 정미도 기분이 꽤 좋아졌다.
정미는 현청관에서 지내는 나날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과 실랑이할 일도 옥신각신할 일도 없었다. 정미는 그저 책을 읽고 부적을 그리며 연습하고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나가서 식사를 하면 되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산에선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미는 환안을 데리고 거리를 거닐다가 결국 손에 통닭구이 하나와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들고서야 만족스럽게 정철에게로 향했다.
‘오늘은 관리들이 쉬는 날이니 오라버니도 집에 있겠지.’
정미는 들뜬 마음으로 돼지고기를 들고 정철이 지내는 작은 주택에 도착했지만 문지기 하인이 수찬 대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실망한 정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돼지고기와 구운 통닭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안의 손엔 짐이 더욱 많아 조심스럽게 곁을 지키며 목을 쭉 빼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매가 그들을 맞이했다.
“셋째 아가씨께서 오셨군요. 짐을 제게 주세요.”
“괜찮아. 주방은 어디에 있어?”
정미는 소유욕이 강했고 특히 남녀 사이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더욱 속이 좁았다. 정철을 누군가와 함께 가질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소매를 적대시하진 않는대도 호감이 있을 리는 없었다.
“이쪽입니다. 소인을 따라오세요.”
이곳은 정미도 한 번밖에 와보지 않은 곳이었다. 그 한 번도 정철이 이사한 후 이튿날 한지 등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을 구경하느라 온 것이었다.
당시엔 사람이 많아서 별 느낌이 없었지만, 지금 한 손에는 돼지고기 다른 한 손에는 구운 통닭을 들고 작은 주방에 들어가니 왠지 자신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미는 주방을 한 번 둘러봤다.
정말 아주 작은 주방이었다. 하지만 갖출 건 다 갖춰져 있었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 마음이 편해졌다.
정미는 생각했다.
‘그때 오라버니가 은표를 가져가지 않았지. 역시 이따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가져가라고 해야겠다. 나도 이 집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빌려 쓰는 건 역시 별로야. 사는 게 좋겠어. 나와 오라버니의 집이니까.’
정미는 짐을 내려놓고는 그리 크지 않은 저택을 안팎으로 한 바퀴 둘러봤다. 마구간마저도 빼먹지 않고 구석구석 살폈다.
정미는 마구간밖에 서서 정철이 자주 타는 백마를 한참 쳐다보다가 다음에 자신의 흑마를 데리고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지금 오라버니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우리 둘의 말은 미리 친해지게 해놓아도 좋겠지. 두 말의 성별이 같은지 아닌지는…… 큼큼, 별로 중요치 않아.’
정미가 응접실로 가자 소매는 그제야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 셋째 아가씨가 이상하시네. 왜 공자님의 말을 계속 살펴보시는 걸까.’
“소매, 오라버니는 보통 언제쯤 와?”
정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소매는 셋째 아가씨가 자신에게 그리 다정하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더욱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최근엔 계속 좀 늦게 돌아오셨어요. 어쩔 땐 밤에 돌아오기도 하셨고요.”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많이 바쁜가?”
“그건 소인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혼자 살고 계시니 처리할 일이 예전보다 많으실 겁니다.”
백부에 살 때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건 다 처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지만, 지금은 직접 처리하진 않더라도 대다수의 일을 정철이 한 번 훑어봐야만 했다.
“집에 사람이 좀 적긴 해.”
소매와 팔근 외에 이 집에는 문지기 노한(*老漢: 늙은 사내)과 주방일을 하는 파자, 그리고 청소하는 하인 둘이 있었다. 마부조차도 없었다.
‘오라버니도 분명 돈이 모자랄 텐데 굳이 혼자서 해결하려고만 하니.’
이 생각이 들자, 정미는 마음이 아파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안, 나랑 주방에 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자.”
소매가 급히 말했다.
“소인에게 시키세요. 어찌 아가씨께서 일을 하십니까.”
정미가 소매를 흘끗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라버니의 집이 곧 내 집 아니겠어? 당연히 내가 맡아야지.”
소매는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셋째 아가씨의 태도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어디가 이상한지는 또 모르겠네!’
주방에 들어서자 환안이 조용히 물었다.
“아가씨, 홍소육 할 줄 아세요?”
그러자 정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니. 네가 있잖아?”
환안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가씨, 소인도 할 줄 모르는걸요!”
‘간단하게 채소를 볶는 거라면 몰라도 내가 홍소육을 만들어봤을 리가!’
정미도 당황했다.
“못 해? 화미가 주방에서 요리를 할 때마다 너도 같이 갔었잖아? 도와주러 간 거 아니었어?”
환안이 배시시 웃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도움은 청가의 일이었고요. 소인은 주로…… 시식을 담당했어요…….”
‘참 잘하는 짓이구나!’
정미는 이를 갈다가 소매를 걷고 새하얀 팔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칼을 들고 돼지고기를 반으로 잘라버렸다.
‘먼저 반만 만들자. 그럼 만약 망치더라도 기회가 한 번 더 있을 테니까.’
날이 점점 저물었다. 주방에서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올 때쯤 정철이 마침내 돌아왔다.
“공자님, 돌아오셨군요. 셋째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어요.”
소매가 나와 맞이하다가 정철 뒤의 팔근을 한 번 훑어보고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눈을 피했다.
“오라버니―”
정미가 인기척을 느끼고 걸어 나왔다.
정철은 검뎅 묻은 정미의 얼굴과 이상한 고기 냄새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설마 미미가 요리를 하는 거야?”
“응.”
정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밥은 다 됐어? 미미가 무슨 맛있는 음식을 했는지 봐야겠다.”
정철이 안으로 들어가자, 정미는 뒤에서 뭔가를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의기소침하게 따라 들어갔다.
상은 응접실에 차려져 있었고 문에 들어서자 상을 가득 채운 요리가 보였다.
통닭구이는 윤기가 흘렀고 버섯과 채소는 신선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황금색으로 튀긴 두부와 뽀얀 생선국, 파와 고기가 얹어진 계란찜까지. 요리 하나하나가 다 맛있어 보였다. 다만 홍소육만큼은 검은빛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정철이 웃으며 칭찬했다.
“미미가 손재주가 좋구나. 몰랐네.”
정미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 홍소육은―”
“아, 홍소육은 원래 만들기 힘든 음식이잖아. 다른 건 다 잘 만들었는걸.”
정철이 급히 위로했다.
‘미미가 직접 해준 요린데 어떻게 자존심을 구길 수 있겠어.’
정미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이를 갈았다.
“내 말은, 상 위의 요리 중에 이 홍소육만 내가 만든 거라고…….”
홍소육을 만들어보던 정미는 아무리 체면이 중요하더라도 차마 식자재를 더 낭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철이 집에 돌아온 후 굶게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시식밖에 할 줄 모르는 환안을 몇 번 노려본 뒤, 얌전히 소매에게 주방 자리를 내어주었다.
늘 침착하던 정철의 입가가 떨리더니 한참 뒤에야 말했다.
“어쩐지 다른 음식과 조금 달라 보이더라니 미미가 만든 거였구나.”
정철은 손을 씻은 뒤 젓가락을 들고 홍소육을 한 조각 집어 입안으로 넣었다. 그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으나 순식간에 다시 평온함을 되찾고 말했다.
“맛있다.”
정미가 그릇을 치웠다.
“빈말할 필요 없어.”
정철이 정미를 붙잡았다.
“위로가 아냐. 정말 맛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