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의심
태자에게 밀쳐진 정요는 비틀거리다가 옆머리가 문틀에 스쳤고 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의 백옥 비녀가 청석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 나고 말았다.
머리가 풀리자 아름다운 머리칼이 구름처럼 흩어졌다. 작은 창 하나밖에 없는 방 안, 시간은 대낮이었지만 당황하고 흐트러진 여인의 모습은 어두운 밤 속의 요정처럼 사람의 마음을 홀렸다.
“태자―”
정요의 외침은 태자가 뻗은 손에 막혀버렸다.
정요는 충격이 가신 후 곧바로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자신이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에게 들키게 되면 당연히 봉변을 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 터였다.
태자는 정요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하며 문을 닫았고 그녀를 옆으로 안아 그리 크지 않은 침상 위로 던졌다.
여긴 태자의 동궁 안, 눈에 띄지 않는 방이었다. 외지고 조용해 원래는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그러다 태자가 몰래 이곳을 정리한 뒤로 두 사람은 이미 여기서 몇 번이나 만난 적 있었다.
침상의 크기는 작았지만 유난히 부드럽고 편안했다. 태자는 곧바로 정요의 위로 올라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혼례를 치렀다고 본궁을 잊은 게냐? 본궁 앞에서 ‘신부’라는 호칭을 쓰다니!”
태자는 그 ‘신부’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어 멈칫하더니 평소보다 더욱 흥분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손을 뻗어 거침없이 정요의 옷을 벗기려 했다.
정요는 깜짝 놀라 옷을 꼭 잡으며 애원했다.
“전하, 신부는 이따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옷이 바뀌면―”
태자는 정요의 말에 더욱 흥미가 생겨 손에 힘을 주어 옷을 벗겼다. 연분홍색 내의를 벗기자 노란색 배두렁이가 드러났다.
“바뀌면 왜? 설마 위국공 세자가 알 리 있겠느냐?”
태자가 정요의 귓가에 다가가 물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정요의 살갗을 드러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정요는 감히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나 태자를 자극했다가 몸에 흔적이라도 남을까 봐 차라리 먼저 태자의 목을 껴안기까지 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태자가 정요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만족스러운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본궁이 만나본 여인은 결코 적지 않지만, 넌 본궁에게 이례적인 여인이다.”
다른 자와 한 여인을 공유하다니 어엿한 태자에게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 이 여인이 끼를 타고나서 도저히 그냥 포기할 수 없는 탓이지.’
위국공 세자가 자신보다 먼저 정요를 취했으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정요의 부군이 되어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태자는 왠지 참을 수 없이 한스러워졌다.
이런 생각이 드니 태자는 또 가슴이 뛰어 옆의 여인을 잡아당겼다.
“태자―”
정요는 태자가 이렇게 빨리 또 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기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미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는데, 한지가 멍청이도 아니고 무슨 흔적이라도 남으면 어찌 숨기라고!’
태자는 정요를 꿈쩍도 하지 못하게 꽉 잡고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의매, 본궁의 능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나. 궁에 도통 들어오질 않아 본궁을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한 번 만에 내쫓을 셈인가?”
헐떡이는 소리가 뒤얽혔고 방 안의 빛이 점점 어두워질 때쯤 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방을 떠났다.
정요는 침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켜 옷을 입은 뒤 구석의 화장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어두운 방 안, 거울엔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습만 흐릿하게 보였다. 정요는 짧은 한숨을 쉰 뒤 빗을 들고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요는 긴 머리를 궁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타마계(*墮馬髻: 살짝 기울어지게 한쪽으로 틀어 올린 머리 모양새)로 틀어 올린 뒤 장신구를 착용했다. 하지만 백옥 비녀는 이미 두 동강 났기에 어쩔 수 없이 화장대 밑의 서랍에서 비슷한 옥비녀를 꺼내 꽂았다.
* * *
정요가 위국공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정요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앉아 있는 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세자, 계속 여기 계셨습니까?”
한지가 맞이하며 정요의 손을 잡았다.
“그래. 어차피 오늘은 그다지 할 일이 없고 서재에도 가기 귀찮아서. 피곤하진 않아? 시종들에게 식사를 내어오라 하지.”
한지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정요의 비녀에 시선을 두었다.
‘정요가 궁에 들어갈 때 착용했던 비녀는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한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아냐. 아까 아무렇게나 고르긴 했지만, 그 나비 비녀가 너무 눈에 거슬려서 다른 평범한 비녀를 골라준 뒤 일부러 몇 번이나 다시 살펴봤다고. 그 비녀는 어디로 간 거지? 머리도 다시 틀어 올린 것 같고…….’
한 번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마치 비옥한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부는 바람만으로도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자라기 마련이었다.
한지는 평범한 사내였기에 자신의 여인에게 마음이 쓰일수록 도저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저번 원파 때처럼 정요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요가 내게 부끄러울 일을 저질렀을 리 없어. 만약 내가 정요에게 직접 물으면 우리 둘의 감정만 상할 뿐이고 내 속이 좁다고 여길 것 아냐?’
한지는 그 비녀에서 시선을 거두고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정요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마음속은 왠지 무겁고 답답했다.
한지는 식사를 마친 뒤에도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한편 정요는 얼른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몸에 흔적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기에 한지가 떠나지 않자 마음이 급해졌다.
사람은 늘 두려워하는 것과 맞닥뜨리게 되기 마련이었다. 정요가 변명을 생각하고 있을 때 한지가 갑자기 훅 다가왔다.
“소야.”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기에 한지의 부름이 무슨 의미인지 정요도 알고 있었다. 정요는 더욱 긴장이 되어 한지를 밀어냈다.
“세자, 오늘 궁에 다녀와 피곤합니다. 일찍 쉬고 싶어요.”
한지가 정요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소야, 얼마 전까진 계속 어머니의 간병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께서 좋아지신 뒤로도 네가 피곤할까 봐 계속 참고 있었는걸.”
그러고는 정요의 손을 잡아당겨 아래에 댔다.
“오늘은, 되지 않을까?”
“정말 안 됩니다.”
정요는 한지를 휙 밀어냈고 한지의 표정이 살짝 변하자 급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 오라버니, 정말 피곤해서 그래요. 저를 가엾게 여겨 일찍 쉬게 해주세요. 내…… 내일이면 꼭 뭐든 들어드릴게요…….”
한지는 당연히 강제로 여인을 취하는 자가 아니었기에 정요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찍 쉬어. 나는 서재로 가서 자마.”
그러고는 뒤돌아 떠나버렸다. 정요는 한지가 화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한지와 동침할 수 없었기에 달래러 갈 수도 없었다.
‘됐어. 내일 달래주면 될 거야.’
* * *
한편 한지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서재로 갔다.
‘만약 그 의심이 없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정요가 나를 거절하기까지 하다니. 설마, 정말 태자와 보통 관계가 아닌 건가?’
한지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미, 네가 한 말 때문에 너무나도 괴롭구나!”
정미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차갑고 냉담한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의심하는 마음과 정요를 놓지 못하는 마음에 화를 낼 뿐이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재의 등이 아직 켜져 있길래 소인이 흰목이버섯 탕을 끓여왔습니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자 반반이 쟁반을 들고 걸어 들어왔다.
“여기 놓아두어라.”
반반이 사뿐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높은 탁자 위에 그릇을 살살 내려놓고는 날렵한 눈매로 한지를 쳐다봤다.
“따뜻할 때 드세요. 식으면 맛이 떨어진답니다.”
한지의 표정은 담담했다.
“알겠다. 물러나거라.”
반반은 입을 꾹 다물고 실망과 애원이 담긴 눈빛으로 한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한지는 천천히 닫히는 방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반반의 뜻을 어찌 모르겠어. 하지만 정요에게 일편단심 하기로 결정한 이상, 지금 상황에서 반반과 함께한다면 정요에게 상처를 주게 될 테지.’
한지는 흰목이버섯 탕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식어가게 두었다. 손엔 서책을 들고 있었지만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이따금 반반의 복잡하고도 아리따운 눈동자가 떠오르자 그는 조금 짜증이 나서 서재에서 나와 바람을 쐬러 나갔다.
* * *
정요의 방, 시종이 보고를 올렸다.
“반반이 세자께 탕을 올리고 나갔습니다.”
“세자는?”
“세자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셨습니다.”
정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 반반과 석이가 떠오르자 차가운 눈빛을 했다.
‘아직 시집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통방과 서장자를 처리하는 건 아무래도 보기 좋지 않을 테지. 하지만 그 통방 계집이 이리 대담할 줄은 몰랐구나. 허를 틈탈 생각을 하다니! 한지의 마음이 아직 내게 있어서 다행이지. 하지만 나중엔…….’
정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귀비마마께서 궁으로 부르실 때마다 골치가 아프겠어.’
정요는 살짝 후회가 되었지만, 만약 태자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그때 청량산에서 그리 쉽게 화 귀비를 만나지도 못했을 거란 생각에 후회하는 마음을 접어두었다.
* * *
위국공부가 평화로운 반면 회인백부는 떠들썩했다.
다름이 아니라 궁에서 태자비를 선출한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동이는 규율을 잘 배우고 있느냐?”
맹 노부인이 ‘동 씨’로 승격한 동 이낭에게 물었다.
동 이낭은 수수한 무늬의 비단옷에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어 단아하고 청초해 보였다. 단 노부인이 묻자 그녀가 급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동이는 매일 묘시(*卯時: 오전 5시에서 7시까지)에 일어나 유모에게 규율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 번도 태만하지 않고요.”
맹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궁에서 태자비를 선출할 계획을 세웠다 하고 동이는 우리 회인백부의 적녀이니, 기대가 아주 크구나. 너도 어미로서 잘 지켜봐야 한다. 잘 가르치지 못해 나중에 창피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노부인. 동이는 늘 사리가 밝은 아이였으니까요.”
“그렇지. 손녀들 중에는 동이가 확실히 사리에 밝은 편이지.”
맹 노부인이 나무라는 눈빛으로 동 이낭을 훑어봤다.
“넌 앞으로 그렇게 수수하게 입지 말거라. 기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 않느냐!”
동 이낭의 웃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이내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맹 노부인은 손을 내저어 동 이낭을 내보낸 뒤 한숨 쉬었다.
“역시 시골 여인이로군. 얼굴을 내놓긴 힘들겠어.”
옆에 있던 유모가 급히 말했다.
“노노가 보기엔 둘째 마님이 가장 효성스럽고 공손하신 것 같은걸요.”
둘째 나리는 4품 관직에 있었고 동 이낭이 정처가 되었으니 원래는 봉호를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직 위쪽에서 결재가 되지 않았기에 집안사람들은 동 이낭을 ‘둘째 부인’이 아닌 ‘둘째 마님’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맹 노부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그게 장점이긴 하지. 씁―”
노부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노부인, 머리가 또 아프십니까?”
맹 노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구나. 예전엔 셋째 계집이 제때 부수를 만들어주었는데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겠어.”
“노부인, 어찌 현청관으로 가 셋째 아가씨를 찾지 않으시는 겁니까. 셋째 아가씨께서 어디에 있든 아가씨는 노부인의 손녀입니다.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 노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