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귀비의 부름
그렇게 밤이 되자, 도 씨가 몸을 뒤척이며 외쳤다.
“물―”
바닥에 잠자리를 깔고 자고 있던 정요가 급히 일어나 눈을 비비더니 밖으로 나가 물을 가져왔다.
“부인, 물을 가져왔습니다.”
도 씨는 눈을 감은 채 물을 건네받고 한 모금 마셨다가 모조리 뿜어냈다.
“너무 차갑지 않느냐!”
정요는 얼굴에 물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잠이 확 달아나 도 씨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도 씨는 그제야 눈을 뜨더니 시야가 밝아졌을 때쯤 입을 열었다.
“너였구나. 청아인 줄 알았는데.”
청아는 소여와 함께 도 씨의 곁을 모시는 여종이었다. 원래는 교대로 밤을 새우며 도 씨를 모셔야 하지만 지금은 방에서 편하게 자고 있었다.
정요는 몹시 화가 났지만, 효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도 씨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널 너무 고생시키는구나.”
도 씨가 부드럽게 웃었다.
“고생이긴요. 그럼 다시 물을 따라오겠습니다.”
정요는 방에서 나온 뒤에야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물을 닦아냈다. 이 물이 도 씨의 입에서 나온 물이라 생각하자 너무 역겨웠다.
잠시 뒤, 정요는 병풍 뒤로 돌아가 따뜻한 물을 가득 따라 도 씨에게 바쳤다.
도 씨는 잔을 건네받고 입가에 갖다 댔다가 결국 마시지 않고 옆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목이 별로 마르지 않구나. 잠도 다 달아났어. 내 말동무나 해주려무나.”
정요는 눈앞이 새카매졌다.
‘이 마귀할멈 같으니. 황후도 이렇게 까다롭진 않겠다!’
‘마귀할멈’은 당연히 졸리지 않았다. 낮에 아들이 간병할 때 푹 잤기에 밤이 되니 며느리를 괴롭힐 힘이 남아돌았다.
다음 날 아침, 한지가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오자 도 씨가 웃으며 말했다.
“지야, 네 아내가 몹시 효성스럽구나. 밤에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벌써 미리 준비해놓지를 않나. 친딸이라도 이리 세심하진 않을 게다. 앞으로 그 아이에게 잘해주거라.”
어머니가 아내를 마음에 들어 하자, 한지는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도 씨는 속으론 짜증이 났지만 얼굴엔 계속 웃음을 머금고 미안한 듯 정요를 쳐다보았다.
“단지 네가 너무 고생해서 그렇지. 봐라. 며칠 만에 얼굴이 핼쑥해졌지 않니. 내 몸이 다 낫기도 전에 네가 앓아누우면 어찌하겠느냐?”
한지는 아까부터 정요의 초췌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의 병에 고부갈등이 풀리고 있다는 생각에 걱정은 잠시 잊어두고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의 몸이 가장 중요하지요. 아들과 며느리가 효도를 다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요. 걱정 마세요. 소야는 효심이 가득하니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스스로를 잘 돌볼 겁니다.”
그러고는 정요를 다정하게 쳐다봤다.
“소야, 그렇지?”
‘그렇긴 개뿔!’
정요의 입술이 떨렸다. 욕을 퍼붓고만 싶었다.
‘안 그래도 며칠 밤을 새웠더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오늘 일부러 초췌하게 꾸민 것도 한지가 안타깝게 여겨 간병을 멈춰 달라 부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도저히 안 되겠으면 한지 앞에서 쓰러져야겠다. 며느리가 과로로 앓아누웠는데도 간병을 시키진 않을 거 아냐?’
하지만 도 씨의 말에 정요는 쓰러질 수도 없게 되었고 자신을 사랑한다던 사내는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를 하고 말았다.
정요는 눈앞이 캄캄해져 정말 쓰러지고만 싶었다. 하지만 한지가 방금 했던 말 때문에 지금 기절하면 체면을 구기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며칠 동안의 고생도 물거품이 될 터였다.
정요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도 씨의 병은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나았고 핼쑥해진 정요도 그때가 되어서야 간병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 * *
도 씨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응접실에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
“귀비마마께서 널 보고 싶다 하셨다니 빨리 궁으로 가보거라.”
“예.”
정요는 화 귀비의 입궁 명령에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화 귀비의 부름에 자신이 결코 기댈 곳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릴 수 있어 기뻤지만, 태자가 여전히 자신에게 치근덕대고 있었기에 불안하기도 했다.
정요는 계산적인 사람이었기에 태자비가 될 희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론 당연히 태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이상, 정요가 끊고 싶다고 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요는 불안한 마음을 눌러두고 방으로 돌아가 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지가 방으로 들어왔다.
“세자, 오늘 친우와 사냥 약속이 있다 하지 않으셨나요?”
정요는 비취 나비가 달린 비녀를 머리에 꽂은 뒤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한지는 과거를 치르지 않았지만 올해 초 병부(兵部)에서 공무를 맡게 되었고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
한지가 다가와 정요의 머리에 꽂힌 나비 비녀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오늘 궁에 들어간다던데?”
정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귀비마마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하셔서 말동무가 되어드리러 갑니다.”
한지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귀비마마께서 소야를 정말 아끼시는군.”
그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야 함을 알면서도 정미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며 떨쳐지지 않았다.
‘정요가 혼사를 미루기 위해 나와 이미 평생을 약속했다 거짓말했다는 건 믿고 있어. 하지만 태자는―’
한지는 한때 태자의 반독(*伴讀: 옛날, 귀족이나 부호 자제의 독서 친구)이었기에 태자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여색에 관해선 방자하고 난폭한 자였다.
정요는 원래도 수도의 귀녀 중 출중한 아이였으니, 태자가 정요에게 마음이 있는 것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이 들고 아름답게 꾸민 정요의 모습을 보자 한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요는 그런 한지의 생각을 알 리 없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귀비마마의 병을 치료해드렸기 때문일 겁니다. 귀비마마는 늘 제게 잘해주셨어요. 심지어 궁에서 지낼 때 아홉째 공주보다도 제게 더 세심히 대해주셨답니다.”
“그렇군. 그럼 일찍 갔다 일찍 와. 집에서 기다리마.”
한지가 정요의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자연스럽게 나비 비녀를 빼내며 말했다.
“이 비녀는 지금 입은 옷과 잘 안 어울리는 것 같구나.”
그러고는 열린 서랍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백옥 비녀를 꺼내 직접 정요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이게 예쁘다.”
정요는 그저 한지가 단아하고 수수한 모습을 좋아하는 거라 여기며 거울에 비춰보았다.
“역시 안목이 좋으시네요. 마음에 들어요.”
정요가 거절하지 않자 한지는 마음이 꽤 놓여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서 가보거라. 귀인을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니.”
* * *
장춘궁은 여전히 화려했고 특히 4월은 한창 오색찬란한 시기였다. 고운 치마를 입은 화 귀비는 꽃다운 나이인 정요보다도 혈색이 좋아 보였다.
“어찌 혼인한 뒤 더 살이 빠진 것 같으냐? 설마 위국공 세자가 네게 잘해주지 않는 게냐?”
화 귀비가 다정하게 묻자 정요의 뺨에 홍조가 스치며 급히 대답했다.
“세자는 제게 몹시 잘해주십니다. 단지 지내는 곳이 달라지니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정요는 천진난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화 귀비가 자신을 친딸로 여기리라 믿지 않았다. 만약 화 귀비에게 고충을 털어놓고 도 씨의 행동을 하소연했다간 자신의 발등을 찍는 거나 다름없었다.
화 귀비가 정요와 위국공부의 혼사를 지지한 목적도 위국공부를 잘 구슬려 앞으로 태자에게 도움이 되라는 뜻이 분명했다.
기댈 친정도 없는 정요가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어른들의 예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아봤자, 화 귀비가 자신을 쓸모없다고 여길 뿐이었다.
화 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됐다. 본궁은 네가 시집살이를 할까 걱정했단다. 만약 세자가 네게 시집살이를 시키면 본궁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본궁이 나서주마.”
정요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의모님은 소야를 정말 아껴주십니다.”
화 귀비가 웃었다.
“본궁에겐 너와 아홉째 공주 두 딸밖에 없는데, 너희를 아끼지 않으면 누굴 아낀단 말이냐? 게다가 네가 시집간 후 너만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본궁도 마음이 아주 허전했단다.”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모습은 친모녀와 다름없어 보였다.
“태자 전하 납시오―”
태자가 들어와 화 귀비에게 절을 올리고는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가 급히 절을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 예를 갖출 필요 없다. 따지자면 본궁은 네 황형(皇兄)이 아니냐.”
정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자는 정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화 귀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대범하게 말했다.
“모비, 사실 아들은 의매가 입궁했다는 소식에 일부러 찾아온 겁니다.”
“음?”
“유야는 온종일 유모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습니까. 이 아들도 신경 써주려 해도 그리 시간이 많지 않더군요. 의매는 회인백부의 친척이니 따지고 보면 유야의 친척이나 다름없지요. 그래서 의매에게 유야를 봐 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유야와 의매가 잘 맞아서 그 아이의 병세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유야를 언급하자, 화 귀비는 웃음기를 거두고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소야, 태자와 함께 가보거라.”
정요는 속으론 불안했지만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자를 따라갔다.
둘이 떠나자, 화 귀비가 이마를 문지르며 탄식했다.
“유야는 정말 안타깝구나…….”
뽀얗고 똘똘하게 생긴 손자는 겉으론 몹시 건강해 보였지만 하필 머리가 좋지 않았다. 황상이 국사도 모셔보았지만, 국사는 그저 유야에게 나중에 인연이 있을 테니 지금은 이렇게 두어야 한다고만 했다.
나중에 인연이 있을 거란 말에 화 귀비는 완전히 기대를 접지 않았다.
아무리 바보라도 아들의 적장자이고 귀중한 신분의 황손이었으니 말이다.
“마마, 또 머리가 아프십니까?”
대태감 등안이 묻자, 화 귀비는 등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등안, 주물러주거라.”
“예.”
등안이 화 귀비의 뒤로 돌아가 머리를 살살 주물러주었다.
한참 뒤, 화 귀비가 말했다.
“이 안마법도 소야가 네게 가르쳐준 것이지?”
“예, 소 아가씨는 몹시 총명하시군요. 이 안마법은 소인이 예전에 배웠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음, 확실히 유능한 아이지. 만약 그 아이가 자주 유야를 돌볼 수 있다면 유야에게도 좋을 텐데.”
화 귀비가 잠시 멈칫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유야를 보살필 적당한 여인을 찾아보아야겠구나.”
유야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원래는 알아서 자생하거나 자멸하게 둘 생각이었기에 당연히 장춘궁에서 키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신분의 여인이 유야의 직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도 꽤 나쁘지 않을 거라 여겨졌다.
“태자에게 태자비를 골라줄 때가 되었기도 하고.”
등안은 대답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안마하기 시작했다.
* * *
정요는 태자를 따라 조용히 동궁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태자가 고개를 돌려 정요를 바라봤다.
“의매, 어찌 며칠 안 봤다고 황형에게 이리도 냉담해졌는가?”
“신부(臣婦)가 어찌 감히요.”
“어찌 감히? 네 주제를 알면 됐다.”
태자가 정요를 휙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