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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66화 (266/375)

266화. 그림자

한지가 허리를 숙여 원파를 주워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억울한 표정의 한지를 보자 도 씨는 더욱 화가 났다.

“그래! 아직도 나를 속일 셈이냐? 그렇게 맹 씨를 감싸고 싶으냐?”

‘맹 씨?’

한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정요는 지금 회인백부의 먼 친척이고 성이 맹, 이름이 소였지.’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저와 소야가 잘못한 게 있다면 잘 가르쳐주세요.”

“가르쳐달라고?”

도 씨가 차갑게 웃었다.

“아들이 크면 어미가 도저히 관리할 수가 없나 보구나. 이것만 묻겠다. 이 원파는 어떻게 된 일이냐?”

한지는 점점 의아해졌다가 도 씨의 물음에 낯이 살짝 뜨거워졌다.

“당연…… 당연히 어젯밤…….”

“어젯밤? 나를 언제까지 속일 셈이냐? 너와 그 계집은 혼인도 하기 전에 진작 뒹굴지 않았느냐!”

한지는 멍해졌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도 씨는 더욱 화가 났다.

“어찌 모르느냐? 이 원파는 어젯밤 너희가 나를 속이기 위해 꾸며낸 것 아니냐? 네 고모가 이미 내게 알려주었다. 그 애는 이미 작년에 네 사람이 되었다고!”

“그럴 리 없습니다!”

한참 뒤, 한지가 이를 악물고 도 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고모님께서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도 씨가 한지를 흘끗 쳐다봤다. 감정을 쏟아내고 나니 이미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왜, 네 고모가 거짓말을 했다 할 셈이냐?”

“저는―”

한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히 나도 고모가 이런 말로 정요를 모함하실 거라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정요와 나는 어제가 분명 처음이었는데.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

“어머니, 저와 소야는 늘 선을 지켜왔습니다. 정말로 함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고모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도 씨가 손을 들며 차갑게 웃었다.

“됐다. 넌 그 애를 감쌀 생각뿐이니 나도 더는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 앞으론 얌전히 지내면 된다.”

“어머니―”

한지는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지야, 돌아가거라. 피곤하구나.”

도 씨가 손을 내저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지는 기분이 상해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 * *

도 씨의 거처에서 나온 뒤, 한지는 인상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형무원으로 가 정미를 찾았다.

“지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정미는 의서를 내려놓고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지금 시간이면 정요와 함께 식사를 할 때인데. 아, 설마 식사 후에 그 통방을 마주쳐서 화난 정요에게 쫓겨난 건가?’

정미는 만약 둘째 오라버니와의 초야 뒤, 소매든 홍매든 다른 여인을 마주치게 되면 분명 오라버니를 쫓아내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정미, 물어볼 게 있어.”

“말씀하세요.”

한지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고모님께서…… 정요에게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

“네?”

“정미 너는 알겠지. 내가 줄곧 정요를 마음에 두고 있긴 했지만, 우리 둘은 항상 본분을 지켜왔어. 고모님께서 뭔가 오해하셔서 정요의 명예를 실추하신 것 같아.”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 오라버니, 무슨 이상한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정요와 이미 혼인하셨잖아요. 왜 우리 어머니를 끌어들이는 건데요? 도대체 뭐가 정요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거예요?”

“그건―”

한지는 뭐라 말하려다가 정미가 아직 아가씨라는 걸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닫았다.

정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한지를 쳐다봤다.

“본분이라면 지 오라버니는 지켰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요는 언제 본분을 지켰다는 말이에요?”

‘본분을 지켰다면 큰언니 몰래 태자와 만나지도 않았겠지.’

“정미, 그게 무슨 뜻이야?”

정미는 당연히 이 사실을 숨겨줄 생각이 없었기에 솔직히 말했다.

“별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정요와 태자 전하가 유난히 가까워 보여서요.”

한지의 표정이 급변했다.

“정미, 말조심해! 정요는 지금 태자와 남매 사이니까 가깝게 지내도 이상한 일이 아냐.”

정미는 턱을 괴고 하품을 했다.

“그래요? 요 2년 동안 제가 매번 궁에 들어갈 때마다 정요가 가지 않으면 태자 전하께서 분명 여쭤보셨는걸요. 그것도 형부와 처제기 때문에 가깝게 지내는 걸까요? 그런 거라면 제 성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태자 전하께서 그리 차별하신 거네요.”

정미의 말엔 많은 뜻이 담겨있었기에 한지는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의 정미는 더 이상 2년 전의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아니었기에 긴 눈을 살짝 치켜뜨더니 차갑게 한지를 쳐다봤다.

“또 여쭈실 게 있나요? 제 대답이 불쾌하셨다면 화를 내셔도 좋습니다. 기꺼이 상대해드리지요!”

“난…… 괜찮아. 이만 갈게.”

한지는 복잡한 마음으로 형무원에서 나왔다.

* * *

‘어머니는 내가 원파를 꾸며냈다고 하고, 고모님은 내가 정요와 일찍이 몸을 나눴다고 하고, 정미는 정요와 태자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고 말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만약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면 나도 이 말에 흔들렸을지 몰라. 아니, 어젯밤도 사실 희미한 느낌만 남아있을 뿐 자세한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아…….’

한지는 소매 속 원파를 넣어둔 곳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야, 어찌 여기 서 있어.”

거처의 마당 입구에 서 있는 정요가 보이자, 한지는 잠시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물었다.

정요가 부드럽게 웃었다.

“세자께서 돌아오시면 함께 식사하려고 기다렸습니다.”

한지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먼저 먹으라 했잖아. 그렇게 야윈 몸인데 굶어선 안 되지.”

“같이 먹어야 맛있으니까요.”

“그럼 어서 들어가지.”

한지가 정요를 품에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 후, 반반과 농금이 신부에게 인사를 올리러 왔다.

“네가 석이의 생모인 반반인가?”

반반은 얌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여 가느다란 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 소인입니다.”

“고개를 들어보거라.”

반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요는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소매 속에서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역시 여우 같은 계집이군. 저 눈빛으로 한지를 홀렸겠지. 어쩐지 한지가 늘 나를 그리워하면서도 아들을 만들어냈더라니!’

정요가 한지를 쳐다보자 그는 급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적처를 들이기도 전에 서장자가 생겼으니 한지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됐어. 앞으로 반반에겐 적게 찾아가고 반반에게도 정요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찾아오지 말라고 하면 돼.’

“역시 좋은 아이로군요.”

정요는 반반에게 꽤 괜찮은 옥팔찌를 하사했고 농금에게는 평범한 금비녀를 하사한 뒤 손을 내저어 두 사람을 내보냈다.

정요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한지를 쳐다봤다.

“세자, 곁에 이리 아리따운 미녀를 두셨군요…….”

한지가 정요의 손을 잡았다.

“소야, 질투하는 건가?”

“사내에게 통방이 있는 건 더없이 평범한 일이지요. 하지만 세자께서 반반과 농금에게 공평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한지가 잠시 멈칫했다.

“그건 당연하지. 앞으로 그 아이들을 찾아가지 않고 너만 곁에 두마. 어때?”

정요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작게 ‘예’하고 대답했다.

한지는 그런 정요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설레었지만, 원파가 떠오르자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결국 한지는 그 원파에 관한 것을 정요에게 말했다.

정요는 충격받은 눈빛이었다가 수치스럽고 실망한 표정으로 슬프게 한지를 쳐다봤다.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한지는 깜짝 놀라 정요의 손을 잡았다.

“아니, 난 그저 무슨 오해가 있나 해서―”

정요는 뒤돌아서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한지는 미안한 마음에 정요를 품에 안았다.

“소야, 나는 우리 둘 사이에 응어리가 없었으면 해서 물어본 거다. 너를 의심한 게 아니라.”

정요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한지를 응시하다가 마침내 웃음을 지었다.

“지 오라버니, 역시 오라버니는 절 믿어주시는군요. 만약 오라버니마저 저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정말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미안하다, 미안해.”

한지는 가녀린 여인을 품에 안고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정요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천천히 설명했다.

“사실, 아버지께 당신과 평생을 약속했다고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응?”

한지가 깜짝 놀라 묻자 정요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더 세게 안았다.

“바보, 당시 제가 그리 말하지 않았다면 현승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졌을 것 아니에요. 임시방편으로 뱉었던 말인데 어른들께서 오해하셨군요.”

그제야 마음이 놓인 한지의 입꼬리에 웃음기가 띠었다.

“그런 거였구나. 그럼 바로 어머니께 가서 제대로 해명하도록 하지.”

“가지 마세요.”

정요가 한지를 붙잡았다.

“제대로 해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라버니께서 해명하실수록 어른들께선 변명이라 여기실 겁니다.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두세요. 지 오라버니가 저를 믿어주시고 우리 둘이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한지가 정요의 뽀얀 뺨을 어루만졌다.

“소야, 내가 널 서운하게 했구나.”

정요가 입을 오므리고 웃더니 한지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수 있는데 서운할 게 뭐가 있겠어요.”

정요의 다정함에 한지는 가슴이 설레어 저도 모르게 다가가 향기로운 그 입술을 덮쳤다.

휘장이 다시 걷힌 뒤에도 취한 듯한 분위기는 여전히 흩어지지 않았고 한지는 정요를 품에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온몸 구석구석 느껴지는 짜릿한 느낌에 아까의 의심도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

달콤한 신혼 때 부부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도 씨는 이 소식을 듣자 몹시 화가 났다.

“세자와 세자 부인이 정말로 매일 밤 여러 번 물을 길어오라 한단 말이냐?”

상황을 보고한 파자는 낮게 숙인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나도 내 아들이 이랬으면 울화가 치밀었을 텐데 부인께선 또 그리 강한 분도 아니시니 계속 이러면 견딜 수 있을 리 없지.’

도 씨가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이 내뱉었다.

“역시 여종이 낳은 종자로구나. 조금도 얌전하지 않아!”

파자가 급히 고개를 더 낮게 숙였다.

도 씨는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파자는 귀에 담기도 무서웠다.

어쨌든 파자에게 정요는 작은 부인이자 위국공부의 세자 부인이었기에, 정요가 아무리 얌전하지 않더라도 고작 파자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됐다. 물러나거라.”

도 씨가 손을 내저었다.

다음 날, 도 씨는 결국 몸져눕고 말았다.

위국공부는 주 태의를 모셔 진료를 부탁했고, 주 태의는 늘 먹던 약을 지어주고는 몸조리를 잘하라 당부했다.

도 씨는 항상 몸이 약했지만 큰 병은 없었다. 때문에 몸조리에 신경 쓰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몸져누웠으니 며느리로서 간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요는 예의 바르고 사리에 밝은 여인이었기에 아무도 깨우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간병을 하겠다고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도 씨는 침상 머리맡에 반쯤 기대 힘없이 정요의 효심을 칭찬했고 간병을 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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