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65화 (265/375)

265화. 원파(元帕)

흔들리는 화촉 아래 신부의 얼굴은 꽃처럼 아리따웠고, 신랑은 아까부터 마음이 들떠있었기에 정요의 손을 잡고 말했다.

“소야, 일찍 쉬자꾸나.”

하지만 정요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어 한지는 깜짝 놀랐다.

“왜 울어?”

정요가 눈을 내리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냥, 만약 정요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당신께 시집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서요. 이렇게 평생 가짜 이름으로 지내는 게 아니라.”

한지는 정요가 몹시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는 눈물을 닦아주며 따뜻하게 위로했다.

“울지 말거라. 이름은 그저 호칭일 뿐이니. 나는 이름이 무엇이든 너이기만 하면 충분해.”

정요가 눈물을 거두고 웃었다.

“지 오라버니는 제게 정말 잘해주십니다.”

‘지 오라버니’라는 말에 한지의 눈빛이 더 그윽해졌다.

정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희탁 옆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작은 술독을 안고 돌아왔다.

“이건―”

정요는 붉은 비단으로 밀봉된 술독을 한지에게 건네 보였다.

“여아홍(*女兒紅: 딸이 태어났을 때 나무 아래 묻어놓고 시집을 갈 때 꺼내 마시는 축하주)입니다. 어릴 때 제가 직접 계수나무 아래에 묻어두었지요.”

정요는 회상에 빠진 듯 게슴츠레한 눈빛이었다.

“이제 막 세상 물정을 알기 시작했을 때, 집안에 딸이 태어나 만월이 되면 어머니가 직접 여아홍을 묻은 뒤, 시집갈 때 꺼내 연회를 베푼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비천한 출신이라 그런 복은 타고나지 않았지요. 하지만 도무지 욕심이 나 몰래 이 작은 술독을 묻어놓았답니다. 오늘 손님들과 나누기엔 충분치 않은 양이지만, 부군과 제가 함께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요.”

정요가 술독을 열자 진한 술향이 풍겨왔다.

한지는 밖에서 술을 꽤 마시고 온 바였다. 정신이 맑은 지금도 술기운이 느껴지고 있었기에 그 향을 맡자 절로 겁이 났다. 하지만 정요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나니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곧바로 잔을 가득 채웠다.

몇 잔 들이키자, 나머지 술은 어떻게 다 마셨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정요는 그가 충분히 마신 것 같아 한지를 데리고 침상으로 갔다.

한 겹, 또 한 겹씩 옷이 벗겨지고 두 사람이 함께 침상으로 쓰러지자, 진홍색 휘장이 차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한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날이 밝아져 있었다.

“소야, 내가―”

한지가 망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정요는 수줍은 듯 고개를 떨궜다.

“부군, 준비하셔야 합니다. 어른들께 차를 올리러 가야 해요.”

한지는 저도 모르게 진홍색 이불 위에 깔려 있는 흰 천을 쳐다봤다.

검붉은색이 보이자 순간 낯이 조금 뜨거워졌고 더욱 다정한 눈빛으로 정요를 쳐다봤다.

“소야, 괘…… 괜찮아? 미안하구나. 어제 너무 많이 마셨더니…… 다치진 않았을지…….”

한지는 말할수록 속으로 화가 났다.

‘어떻게 그 정도로 취할 수가 있지. 초야의 아찔한 느낌만 어렴풋이 남아있고 과정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군.’

“저는 괜찮습니다……. 세자, 어서 가시지요. 늦으면 안 됩니다.”

정요가 수줍게 웃었다. 마음속의 큰 짐이 덜어진 듯했다.

* * *

대청 안, 위국공부의 모든 주인들이 모여 차를 올리는 신랑 신부를 지켜봤다.

“조부, 조모님께 차를 올립니다.”

단 노부인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위국공부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앞으로 단정하고 조신하게 지내거라. 또한 세자와 함께 어른들을 공경하며, 형제와 자식, 조카들을 우애하며 지내야 한다. 알겠느냐?”

정요는 가슴이 펄쩍 뛰었다.

‘노부인의 말씀이 조금 미묘한 것 같은데.’

정요는 재빨리 눈을 들어 단 노부인을 흘끗 살펴봤지만 겉으론 아무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공손하게 ‘예’하고 대답했다.

단 노부인이 옥팔찌를 정요에게 하사했다.

정요는 기분이 언짢았다.

비싼 고급 옥팔찌였지만, 세자 부인이자 위국공부 적장손의 아내에게 주는 첫 선물로는 가벼운 것이었다.

단 노부인 근처에 앉아있던 한 씨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차갑게 웃었다.

‘선물이 가벼워서 싫은가 보지? 하하, 아직도 내가 회인백부의 둘째 부인이라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줄 알았나? 정수문과 여종이 낳은 천한 자식 주제에 혼인도 하기 전에 사통을 하다니. 그냥 넘어갈 순 없지.’

한 씨가 단 노부인과 도 씨를 흘끗 쳐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그래도 꽤 너그럽게 굴었지. 큰올케언니의 체면을 봐서 어머니와 큰올케언니에게만 알려드리고, 작은올케언니와 제수씨에겐 말하지 않았으니.’

“아버지, 어머니께 차를 올립니다.”

위국공은 찻잔을 들고 마신 뒤 선물을 하사했지만, 도 씨는 한참 동안 공손한 모습의 신부를 쳐다보기만 하고 차를 들지 않았다.

도 씨는 태사의에 앉아 신부를 내려다보았다.

신부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공손한 표정을 지은 채 도 씨가 한참 차를 받지 않아도 전혀 싫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찻잔을 든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시어머니인 도 씨 쪽이 일부러 며느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 씨는 오늘 아침에 심복 파자가 신방에서 가져온 원파(*元帕: 혼인 첫날밤 피를 받치기 위해 쓰는 수건)와 한 씨가 했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너무나도 꺼림칙했다.

‘시누이가 나를 속인 건가? 늘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랬을 것 같진 않은데. 이 새신부가 내 아들과 일찍이 몰래 내통했다는데, 한 씨의 신분과 성정에 증거도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지 않은가. 만약 시누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밝혀지면 노여움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시누이의 인품이 바닥을 치게 될 텐데. 그럼 오늘 아침 그 원파는 꾸며낸 것이로군. 내 아들도 함께 도왔을 테고!’

조신하지 않게 혼인하기도 전에 정조를 잃은 며느리와 대혼 뒤 며느리와 함께 일을 숨기려 한 아들을 떠올리자, 도 씨는 가슴이 몹시 답답해졌다.

그렇기에 도 씨가 정요를 곱게 볼 리 없었다.

도 씨가 꿈쩍도 않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왜 저러시지. 분명 나와 정요의 혼인을 허락하셨으면서 왜 지금 일부러 정요를 괴롭히시는 걸까?’

한지는 정요가 더욱 안쓰러워졌고 도 씨에게 약간의 불만이 일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하시다니. 이건 정요를 난처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들인 나도 난처해지지 않는가. 그저 한 번만 가엾게 여겨주실 순 없을까. 난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인데. 정요의 언행에 흠잡을 데가 전혀 없는 건 둘째치고, 설령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다고 해도 어머니로서 정요를 감싸주어야지. 정요는 지금 얼마나 불안할까.’

어젯밤 아내의 눈물이 떠오르자, 한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조용히 정요의 손을 붙잡았다.

도 씨는 그런 아들의 행동을 보고 화가 나 조용히 이를 악물었고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뒤 찻잔을 건네받았다.

‘됐다, 사람들 앞에서 불만을 드러내선 안 되지. 아들의 체면을 구길 순 없으니. 며느리가 혼전에 정조를 잃었다는 걸 모두에게 알릴 순 없잖아.’

차를 마신 뒤, 도 씨는 정요에게 홍옥으로 만들어진 머리 장신구를 하사했다. 장신구의 보석은 아주 고급이었고 첫 선물로 가볍지 않은 물건이었다.

한지는 마침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다른 어른들에게 차를 올린 뒤, 아랫세대들 차례가 되어 한평 등의 아이들이 정요와 인사를 나누었다.

정요는 남자아이들에겐 신발을, 여자아이들에겐 손수건을 선물했다.

정요는 자수 실력이 출중했기에 양면으로 수놓인 손수건을 보자 한추몽과 다른 여자아이들은 몹시 감탄했다.

그리고 곧 정미의 차례가 되었다.

오늘 정미의 신분은 국사 제자가 아닌 위국공부의 사촌 아가씨였기에 예의 바르게 한지와 정요에게 인사를 올렸다.

“두 분 모두 백년해로하시길 바랍니다.”

담담한 말투로 간단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한지는 저도 모르게 정미를 자세히 훑어봤다.

둘도 없이 아리따운 소녀는 어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는지 눈 밑이 살짝 어두웠다.

정미가 잠을 잘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제 화서에게 둘째 오라버니와의 사이를 들켰으니 말이다.

겉으론 침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속은 어찌 조금의 영향도 없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안양 공주가 둘째 오라버니에게 접근하는 걸 황상이 묵허했다는 남 군주의 말을 들으니 밤에 잠을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한지와 정요의 혼례 따위 그저 무시하고 싶었기에 치장도 대충하고 자리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한지의 눈에는 정미가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지는 왠지 쓸쓸했다.

한때 정미에게 불만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지만, 결국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고 예전엔 사이도 아주 좋았기에 정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미, 고마워.”

정요의 입가에 띤 웃음기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한지가 정미에게 미련이 있나? 아니, 아직 개입하기엔 일러. 아직은 남녀의 정이 아니라 소꿉친구의 감정일 뿐일 텐데 내가 끼어들 순 없지. 한지는 그저 정미를 애석하게 여기는 거겠지. 사내들은 다 그런 법이잖아. 아리따운 소녀가 자신을 연모한다 하면, 은애하지 않더라도 애석해하곤 하지.’

정요는 정미를 흘끗 쳐다보자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정말 미운 얼굴이야. 왜 좋은 것들은 다 정미가 가지게 되는 걸까?’

이때, 한지가 정요를 살짝 건드렸다.

정요는 정신을 차리고 정미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미 동생, 정말 고마워. 세자와 내게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 동생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 다음에 우리가 식사를 대접할게. 어때?”

“식사는 필요 없습니다.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도 없고요. 사촌 올케언니와 사촌 오라버니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건 당연히 두 분이 이뤄낸 결실이지요.”

정미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도 씨는 이 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래, 정요 본인이 자초한 일 아닌가. 아가씨일 때부터 내 아들과 침상에서 뒹굴어? 어쩐지 정요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을 거라 하더라니!’

사실 정미는 정요가 한 씨에게 한 거짓말을 알지 못했다. 한 씨는 괜히 딸의 귀를 더럽힐까 봐 굳이 정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저 정요가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걸 비웃은 말을 한 것 뿐이었고, 이 말이 도 씨를 자극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난 뒤, 정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도 씨가 천천히 말했다.

“석이를 데려와 맏며느리에게 보여 주거라.”

이내 진홍색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유모의 품에 안겨 다가왔다. 뽀얗고 통통한 예쁜 아기는 포도알처럼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정요를 쳐다봤다.

한지는 조금 기분이 어색해져 급히 정요를 흘끗 살폈다.

정요는 속으론 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아이가 석이군요. 정말 예쁘네요. 자, 이건 어머니가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마음에 드니?”

그러고는 소매에서 금팔찌를 꺼내 직접 석이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한지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화 내지 않는구나. 역시 정요는 다르다니까.’

한지는 뽀얗고 통통한 아들을 보며 다정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 덕분에 정요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석이는 내 첫 아들이기도 하니까.’

한지의 눈빛을 느낀 정요는 몰래 이를 갈았다.

‘평생 나밖에 없을 거라 했으면서 통방이 낳은 아이를 이리 좋아하다니? 하하, 역시 사내의 말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

“됐다. 다들 인사를 나눴으니 이제 해산하거라. 새신랑 신부도 돌아가서 식사를 들고.”

단 노부인의 말에 사람들은 각자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한지와 정요가 거처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 씨의 여종이 달려왔다.

“세자, 부인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한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요에게 말했다.

“소야, 우선 방으로 돌아가 식사하고 있거라. 나는 기다리지 말고. 금방 갔다 올 테니.”

도 씨에게 도착한 뒤, 한지가 물었다.

“어머니,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도 씨가 원파를 한지 앞에 던지며 고함쳤다.

“지야, 참 잘하는 짓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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